자금성의 노을 -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자매
서인범 지음 / 역사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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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인데 이렇게도 지루할 수가!

역사학자의 책인 만큼 과장하지 않고 사료에 기초해 꼼꼼하게 조선 전기 명과의 관계를 한계란이라는 여인을 매개로 잘 풀어내긴 했으나, 전체적인 서술이 너무 지루하다.

저자 본인의 견해나 역사적 평가가 좀더 첨언되었다면 훨씬 입체적인 책이 될 수 있었을텐데, 너무 아쉽다.

400 페이지의 책이 거의 다 사료를 옮겨 싣는 수준이라 많이 지루했다.

장점으로는 조선 전기 공녀와 환관들이 명에 진헌되어 가는 과정, 또 그들이 사신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외교관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명나라 궁중의 여관 제도 등 덜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사료에 기초해 꼼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여성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부터가 범상한 일이 아니긴 하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 하나가, 명나라는 인구만 해도 엄청났을텐데 왜 굳이 작은 나라 조선에 말도 안 통하는 공녀와 환관을 바치라고 재촉했냐는 점이다.

단순히 황제들의 이국적 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사대하는 나라의 정성을 보기 위함인가?

어찌 보면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또 실제적 이득이 거의 없으면서 상국으로서 체면만 손상되는 행위일텐데 왜 명 초기에만 이런 런 요구가 시행됐는지 궁금하다.

특히 영락제는 조선 출신 후궁이 8명이나 됐다고 한다.

공녀는 권세가 없는 집안에서 뽑혀 가는 줄 알았는데 한확의 여동생처럼 명문가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조선 전기에 공녀로 진상된 조선 처녀는 총 114명인데 그 중 16명이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당시 양인층의 인구수를 고려했을 때 공녀의 숫자가 적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조선 위정자들이 무시했던 오랑캐 원나라가 하던 행태를 천자의 나라 명나라에서도 하다니.

더더군다나 후궁으로 뽑혀 간 조선 여인들은 순장당하기까지 했다.

15세기 근세에 순장이라니, 정말로 놀랍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형상을 한 인형을 묻는 것도 잔인하다고 하여 금했을 정도인데 유교를 국시로 한 명나라 전기에 이런 끔찍한 순장 제도가 남아 있었다니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한확의 누이가 영락제를 5년간 모시다가 순장당하고 그 후 다시 그 여동생이 공녀로 뽑혀 갔을 때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한확의 집안은 공신을 배출한 명문가이고 성종의 외가임에도 딸을 둘 씩이나 보내야 했을 만큼 명의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여동생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 한계란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여인은 비록 아이를 낳지는 못했으나 성화제의 유모가 되어 순장당하지도 않고 네 황제를 모시면서 명의 궁중에 살아 남아 74세까지 천수를 누린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가 어떻게 유모가 됐을까?

젖어미는 따로 있고 보모의 개념이었을까?

한계란은 매사에 빈틈없이 처신해 여러 황제들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 출신 환관과 결탁해 조선으로부터 사적인 공물을 계속 진상하라고 압박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계란을 통해 명과의 외교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은 도움을 줬는데도 실록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이 사적 진상 문제로 골머리를 썪는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외교의 개념이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로 접근하니 오히려 조선 출신 후궁의 존재가 고국에 큰 부담이 됐던 듯하다.

공식적인 사신 절차가 아니라 후궁을 통해 뒷거래를 하는 모양새에 대해 조선의 위정자들은 매우 불편해 했던 것이다.

또 상품경제가 활성화 되지 않은 시절이라 요구하는 공물을 바치려면 전부 새로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에 그 부담이 매우 컸다고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여 머리장신구나 바늘쌈지, 부채 같은 소소한 물품들을 요구했고 따로 은을 주기도 했던 걸 보면 엄청난 부담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오늘날의 개념과 다른 모양이다.

또 중간에 조선인 출신 환관이 끼여서 부담이 커졌던 것 같기도 하다.


조선 전기에 명에 바친 공녀와 환관 제도에 대해 알아 본 좋은 시간이었지만 좀더 저자의 역사적 해석을 곁들였으면 어땠을까, 서술 방식에 아쉬움이 많이 남은 책이다.


<오류>

155p

여섯째는 성종의 왕후에 간택되었다. 바로 소혜왕후이다.

-> 소혜왕후는 성종의 어머니이고, 덕종의 왕후이다.

221p

즉, 한명희가 한계란에게 서신을 보내

-> 한명회이다.

335p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아들 예종이 특별히 지어준 궁전인 수강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 수강궁은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어준 궁전이다.

382p

세자비로만 남게 된 것이 아타까웠던 것이다.

-> 안타까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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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 인류가 잃어버린 25개의 오솔길
하랄트 하르만 지음, 이수영 옮김, 강인욱 해제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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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거창한 제목에 비하면 내용이 너무 평이해서 기대치에 못 미쳐 아쉽다.

저자 약력을 보니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라 대중서 수준으로 책을 낸 듯 한데 오히려 강인욱 교수의 해제가 격에 안 맞는 느낌이다.

제목은 문명의 흥망성쇠인 반면, 실제 내용은 덜 알려진 주변 지역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알려진 4대 문명권 외에도 여러 지역에 크고 작은 문명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큰 지구에 당연히 다양한 문명의 시작이 존재했을 것이다.

특히 발칸 반도 지역의 도나우 강 문명권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해 신선하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국만 해도 황하 이외의 지역에 다양한 문명이 존재했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내용은, 베링 해협이 육교로 이어져 있을 때 시베리아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것 외에, 대서양의 빙하를 따라 유럽 대륙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정황 증거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빙하기였다고 하지만 과연 대서양 횡단이 2만 년 전에 가능했을까?

저자는 물범 사냥꾼들이 빙하에 임시 거주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흘러갔다고 추정한다.

유전자 풀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석기 등을 예로 들지만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다.

페루에 남아있는 하얀 피부의 원주민 차차포야족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래 전에 유럽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이 페루의 고지대에 격리되어 살다 보니 원주민과 섞이지 않고 흰 피부 형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증명이 됐다고 하는데 과연 이들은 언제 어떤 경로로 건너오게 됐을지 궁금하다.


<오류>

125p

지도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표시된 부분은 쿤륜 산맥을 잘못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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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 근대의 문을 연 최후의 중세인 클래식 클라우드 26
이길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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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팟캐스트에서 연재할 때부터 예술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컨셉이 신선해 흥미롭게 들었는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 편집이나 읽기는 좋은 반면, 깊이 면에서는 늘 아쉽다.

분량의 한계일까?

아마도 본격적인 교양서가 아니라 방송용으로 대중에게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수준에 포커스를 맞춘 탓이겠지만 책보다는 팟캐스트에서 김태훈과 게스트 이야기 듣는 게 더 재밌는 듯하다.

이번 책의 주인공은 예술가가 아니라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다.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면서 그의 생애와 주장을 돌아보는 컨셉이다.

도판이나 편집이 아주 예쁘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 보기는 좋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만 깊이 면에서는 아무대로 아쉽다.


루터는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럽 사회를 장악해 온 가톨릭의 사제 계급이 아닌, 성경 읽기를 통한 개별적인 신과의 대면을 통해 오직 신의 자비와 은총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했다.

성경을 읽으려면 문자 해독이 가능해야 하므로 루터는 공교육을 강조했다.

당연히 그리스어나 히브리 원전이 아닌 독일어 번역, 그것도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독일어 문어체 확립에 노력했고 때마친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 덕분에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저자는 이런 사회적 변화에 주목한다.

앞세대의 위크클리프나 얀 후스 등이 참신앙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다가 화형대의 불꽃으로 사라진 반면 루터는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잘 이용해 유럽 세계를 뒤흔든 주역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이 면벌부 판매로 변질되면서 로마의 착취에 대항하고자 했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지원도 큰 방어막이 됐다.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는 제국 추방령을 당하는데, 그가 살해될 것을 걱정한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베르크 성에 안전하게 데려다 놓은 후, 그 10개월 동안 신약성서 번역이 이루어진다.

이런 위정자들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도 얀 후스처럼 화형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루터는 농민 반란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수많은 이들이 잔인하게 진압됐다.

루터는 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가라기 보다는, 페스트와 전쟁의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고 신의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 설정에 몰두한 신실한 종교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저자는 루터를 개인주의 시대인 근대를 연 최후의 중세인이라고 표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스콜라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여 이성으로서 세상을 보는 자연신학을 추구했던 반면, 루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적 체험과 계시를 통해서만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주장했다.

저자는 출세의 도구로 삼았던 유학을 남송 때 철학적 관념론으로 승화시킨 주희와 루터를 비교한다.

약간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는 관념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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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로 읽는 세계사 - 살아남기 위한 세계 왕실의 치열한 생존기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전경아 옮김 / 책밥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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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은 유럽 역사의 자잘한 부분들까지 참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왕실이 아직 존재하는 나라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왕조 국가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기는 하다.

21세기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왕실이 왠 말인가 싶지만, 아마도 헐리우드 스타들을 동경하듯 대중들은 왕자와 공주님이라는 로맨스의 주인공들이 필요한 것 같다.

평등 좋아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나라에서 드라마 주인공들은 거의 재벌 2세들이고, 심지어 가상 왕실 드라마까지 만들어 유행시키고 있으니 인간의 속성에는 뭔가를 숭배하고 싶은 심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봐도 그렇다.

음악이 너무 좋다, 영화가 너무 멋지다, 이 정도면 될텐데 자발적으로 시녀 노릇을 하려고 든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는 정치인도 아이돌처럼 숭배하는 나라구나!

프랑스가 유럽을 좌지우지 하는 강국이 된 것은 2천 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병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점은 소득이다.

사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영토와 인구수를 자랑하는 농업 대국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이후 주변 각국의 공격을 물리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유럽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어떤가?

프랑스보다 훨씬 더 큰 국토와 인구수를 가졌지만 변방에 위치한 탓에 일류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인가?

다양한 민족과 광활한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러시아 제국의 특성상 전제 군주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마치 중국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민자들이 모여 민주정을 수립하고 세계 최고의 선두 국가가 된 미국이 놀랍다.


<인상깊은 구절>

93p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당하자 주변 왕국들은 혁명이 자국에도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프랑스에 군사 개입을 실행하려 했다. 혁명 후, 영국과 같은 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개입이 없었으나 대륙에 있는 프랑스는 사정이 달랐다.

 프랑스는 자국에 개입하려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준대를 물리치기 위해 강력한 육군이 필요했다. 이 육군 병사를 구성한 것이 하층계급인 민중이었다.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그들에게는 강한 정치적 발언권이 있어서 누구도 그들을 얕볼 수 없었다. 혁명 후, 영국의 크롬웰은 가차 없이 하층계급을 탄압했으나 프랑스에서는 하층계급에 대한 탄압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의 침략 위기에 노출된 프랑스에서는 하층계급 병사들이야말로 혁명 국가의 첫 번째 수호자였으므로 그들의 권리와 주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병사들에게 추대되어 단숨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 시대인 19세기 초에는 육군 병사의 수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는 병사의 수보다 장비와 병기의 질이 승패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강했던 이유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징병 가능한 병력의 수가 다른 나라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프랑스의 강대한 군사력을 뒷받침한 것이 하층계급인 민중이었다.

131p

"개인 사이에는 법률과 계약서와 협정이 신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권력자 사이에 신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

166p

러시아의 차리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러시아는 슬라브계, 아시아계, 노르만계 등이 모인 다민족 국가였다. 근대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민족의 다양성도 늘었다.

 나아가 그들은 부족사회를 형성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유럽의 상업국가처럼 법과 사회의 규범에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힘의 강약이 시비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부족 세력이 패권을 다투며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통치자인 러시아 황제는 절대적인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반 4세가 잔악무도한 황제이긴 했지만 러시아를 이끌기 위해서는 그런 통솔력 뛰어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부족 세력이 커지고 국토가 분단되어 전란에 휘말리게 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황제가 필요했다.

 이러한 사회풍토가 러시아만의 독특한 차리즘을 낳았고, 그것이 오늘날 러시아 정치의 DNA로 계승된 것이다.

168p

표트르 1세는 이러한 주변 지역의 코사크들을 제압하고 이들을 러시아 제국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북방 전쟁을 일으켜 그들에게 활약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북방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러시아에 산재하던 코사크 세력이 모여 러시아 제국하에 결속했기 때문이다. 1721년, 승리한 러시아는 발트해로 진출하여 발트해 안에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204p

약 270년간 계속된 에도의 쇼군이 사쓰마, 조슈라는 변경의 다이묘에 굴복하는 치욕을 맛봤다면 막부 세력은 사력을 다해 혁명군과 싸웠을 것이다. 그러면 정권을 쉽게 건네받지 못하고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막부는 어디까지나 대정봉환으로 천황의 뜻에 순순히 따른 것이다. 사람들에게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진 덕분에 일본은 내전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31p

부탄 국왕은 GDP를 중시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GNH(국민총행복지수)를 기준으로 정신의 풍요로움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GDP가 매우 낮다. 그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GNH 라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지표를 만들어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2011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국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좌파 세력은 GNH 를 열심히 추켜세웠다.

 하지만 부탄 왕국의 수도 팀푸에는 약물에 의존하는 청년과 알콜 중독자로 넘쳐난다. 가뜩이나 높은 실업률과 범죄율은 낮아지기는커녕 상승일로에 있다. 인구 85만 명이 안 되는 부탄에서 정부가 GNH만 강조하고 어떤 조취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상황은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다.

279p

고대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국을 형성했다. 특히 아프리카 동부는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 같은 외부 세력에 둘러싸여 있어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강대한 왕권이 필요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왕국이 존립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이 없어 집권적 왕국이 필요 없었던 서,중남부 아프리카에는 여러 부족이 난립했다

 그러다가 8세기 이후, 아프리카 전역에서 이슬람 상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교환물자로 쓰이던 황금을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8세기 니제르강 유역에 탄생한 가나 왕국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오류>

70p

부활한 서로마 제국은 오토 1세가 죽은 후,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는데

-> 오토 1세가 아니라 카를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 1세 사후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셋으로 나뉜다.

105p

부부가 영국 왕에 공동으로 추대된 이유는 영국 왕실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빌럼 3세와 달리 아내 메리가 스튜어트 왕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 메리가 제임스 2세의 딸이기도 하지만, 빌럼 3세 역시 어머니가 찰스 1세의 딸로, 제임스 2세의 외조카이다.

이 둘은 사촌간의 결합인 셈이다.

115p

그림 9-3

마리 테레즈는 펠리페 4세와, 앙리 4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카를로스 2세는 어머니가 다르다.

즉 둘은 이복남매이다.

169p

엘리자베타 여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시백모로

-> 엘리자베타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인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가 예카테리나 2세이므로 시백모가 아니라 시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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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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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도에 나온 책인데 아마도 2002 월드컵 열풍 때문에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에 관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무나 좋아하는 주경철 교수의 책이라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너무 옛날에 출간되서인지 시의성에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 본 파리 역사는 본인이 유학을 한 곳이라 그런지 훨씬 생동감 있고 재밌었는데 반해 네덜란드 편은 수박 겉핥기 느낌이 든다.

네덜란드 사회에 관한 1부는 솔직히 너무 뻔했고 대신 역사를 다룬 2부는 역시 전공 분야라 그런지 상세하고 분석적이라 도움이 많이 됐다.

16세기의 독립운동과 17세기 시민사회의 형성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18세기부터 진행된 인도네시아와 아메리카 식민 지배의 역사도 같이 나와 유익했다.

네덜란드라고 하면 하멜 표류기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데 중국으로 파견된 마태오 리치 등의 선교사들이 학문이나 기술적으로 우수한 인력들이라 황실에 고용된 반면, 표류된 선원들은 특별한 재주가 없어 국왕 행차시 의장대 역할을 했다고 하니 재밌다.

지금도 평균 신장이 180을 넘는 인종이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우람해 보였을 것 같다.

하멜 표류기가 출간된 후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는데 조선은 너무 가난해 특별히 교역할 것이 없다는 평이 실렸다고 한다.

확실히 군자가 다스리는 나라라 청빈하긴 했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초기 자본주의 시절 노동자들이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만 판단한 것은 아닐까 싶다.

정작 도시에는 먹고 살려고 농촌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실제로도 시골에서 보다 삶의 질도 나아졌다고 하니 표면적인 현상만 가지고 비판할 일은 아닌듯 싶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는 오랜 독립전쟁 과정을 보면서 독립은 외교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수반하는 강력하고 끈질긴 투쟁 끝에 쟁취하는 엄청난 것임을 새삼 느꼈다.

영세중립국이자 알프스 산속의 평화로운 나라일 것 같은 스위스가 가장 용맹한 용병들의 나라였다는 게 생각나는 대목이다.

네덜란드 복지정책의 많은 부분이 가스 발견에 의한 소득 상승에 있음도 슬쩍 언급한다.

지하자원이 없는 우리와는 다른 경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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