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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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유익했다.

책에 실린 도판들도 선명해서 중세 그림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전문 학자가 아닌 사람이 글을 쓰면 여러 책의 편집북이기 마련인데 이 책은 저자의 역사적 판단이 근거와 함께 기술된다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제목만 조금 더 인상적으로 지었으면 어땠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정도다.

보통 중세라고 하면 서양인들의 신대륙 정복을 준비하던 시대이고 신앙에 미친 십자군 학살자들 정도의 이미지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이 책에서 저자는 당대인들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유명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소비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과 신앙의 시대에 살던 중세인을 비교하지 말라고.

중세 교황이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신의 이름으로 휘두른 인물 같은데, 그들 역시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적과 싸우면서 심지어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뭐든 그냥 편하게 되는 게 없는 모양이다.

작은 특권 하나라도 지키려면 말이다.

중세라는 1000년의 긴 시간을 역사적 사건과 문화를 버물려 흥미롭게 설명한 좋은 책이다.


<오류>

231p

다만 그녀(엘레오노르 다키텐)는 이 결혼에서 딸 하나를 얻었다.

-> 아키텐 여공작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에서 딸 둘을 얻었다.

232p

둘 사이에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아키텐) 아들 5명과 딸 2명이 태어났다.

-> 아들 5명과 딸 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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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로 읽는 세계사 - 중세 유럽의 의문사부터 김정남 암살 사건까지, 은밀하고 잔혹한 역사의 뒷골목 현대지성 테마 세계사 5
엘리너 허먼 지음, 솝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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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흥미롭게 읽었다.

서양사는 아무래도 한국사에 비해서는 잘 모르는 분야라 야사에 불과한 음모론인지 정말로 정사에서 인정을 하는 설인지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주장을 펴는 것 같다.

저자가 전문 학자가 아니라서 걱정한 것에 비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독서 시간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조선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다.

아마도 우리는 해부가 불가능한 탓에 정확한 사인 분석이 어려운 까닭도 있을 것 같다.

서양은 어떻게 체액설을 버리고 현대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늘 궁금했는데 아마도 이런 시신 해부가 가능했던 문화 탓도 있을 것 같다.

동양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시신 해부가, 정확한 사인 분석을 위해 무려 왕족들에게도 시행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비단 죽을 당시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유명인들의 시신 해부가 이뤄지고 있고 그런 과학적 추론 결과가 이 책에 실려 있기 때문에 흥미롭고 신뢰가 간다.

우리 실록처럼 이런 저런 증상 기록만 가지고는 왜 죽었는지에 대한 추론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우리도 왕릉에 역대 왕과 왕비 시신이 잘 보전되어 있으니 역사학의 발전을 위해 시신 해부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역사적 추론이 풍부해질까 상상해 본다.

적어도 독살론은 힘을 잃을 것 같다.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갑작스런 왕의 죽음 후에는 독살설이 난무했다.

미신과 종교가 지배하던 때이고 권력의 향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죽음이니 이런저런 음모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중금속을 화장품이나 약으로 이용했고, 치료를 목적으로 쓰던 중금속 때문에 중독이 돼서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비소, 납, 수은 중독 등이 대표적이다.

중금속의 위험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독살설이 퍼질 수 밖에 없었던 듯 싶다.


<오류>

98p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19년에 자신을 낳은지 보름 만에 사망한 모친, 마들렌 드 라투르 도베르뉴와 같은 병으로 숨졌다. 모두 산욕열 때문이었다.

->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19년에 태어나 158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산욕열과 아무 상관이 없다.

132p

왕(샤를 7세)을 열 살 때부터 키워온 계모 욜랑드는 그에게 현명한 조언을 했다.

-> 욜랑드는 계모가 아니라 장모이다. 샤를 7세의 어머니 바이에른의 이자보는 남편 샤를 6세보다 오래 살았다.

147p

1399년에 사망한 '곤트의 존'은 헨리 4세의 아버지이자 리처드 3세의 증조부이다.

-> 리처드 3세의 증조부가 아니라 종증조부이다.

154p

(잔 달브레는) 열아홉 살에 앙리 2세의 사촌이자 방돔 공작인 서른 살의 앙투안 드 브루봉과 결혼했다.

-> 앙투안 드 부르봉은 앙리 2세와 혈연 관계가 없다.

293p

궤양은 암으로 발전했다. 연구 결과 위궤양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6~9퍼센트는 악성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 위궤양은 위암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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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만든 50개 주 이야기 - 이름에 숨겨진 매혹적인 역사를 읽다
김동섭 지음 / 미래의창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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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오래 된 책 <언어를 통해 본 문화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인데 이번 신간은 생각보다 꽤 재밌다.

표지 디자인도 관심을 끌게끔 산뜻하게 잘 만들었고 내용도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역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역사를 좋아해서 책에서 자주 봐서인지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반면, 미국의 각 주는 뉴욕 같은 유명한 도시를 빼놓고는 마치 남미나 아프리카 어디 지역처럼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책 읽으면서 구글 지도 펴 놓고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읽다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의 전체적인 개념이 잡히는 것 같다.

결국은 앞선 문명을 가진 구대륙인들이 총과 세균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건너와 문명 발달이 뒤처진 원주민들을 내쫓고 건설한 게 바로 아메리카 국가들인가 보다.

남미 독립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잉카와 아즈텍 문명이 무너지는 과정이 너무 순식간이라 황당했는데도 북미는 그나마 국가 형태도 아니고 부족민 수준의 단계였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파괴된 것 같다.

그래도 미국의 여러 지명들에 인디언 부족들의 언어가 남아 있다는 게 약간의 위로가 될까.

프랑스의 흔적은 캐나다 퀘벡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 중부의 거대한 땅에 뉴프랑스를 세웠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폴레옹이 헐값에 이 거대한 땅을 넘겼다고 하니, 알래스카를 넘긴 러시아나, 맨해튼을 단돈 24달러에 넘겼다는 인디언이나 요즘 관점으로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메리카에 현재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은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착취와 약탈이겠지만, 유럽인들의 개척 정신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배를 타고 그 먼 대양으로 무역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비록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아메리카의 온갖 미지의 땅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미국의 지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45p

애초에 프랑스는 캐나다처럼 먼 곳에 식민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중산층이었던 청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북미로 이주했지만, 프랑스는 프랑스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신교도들(위그노)의 해외 이주를 허가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정착한 뉴잉글랜드는 영국과 흡사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영국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교회 신자보다 신교도들이 많았고 세습 귀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에 뉴프랑스는 본국인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새였다. 뉴프랑스의 수도 퀘벡에는 궁정과 살롱이 생겼고 가문으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됐다.

 뉴프랑스의 인구가 뉴잉글랜드보다 적었던 이유는 두 나라 사람들의 이주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식민지를 발전시키려면 인구수가 늘어야 하는데, 프랑스인들은 캐나다 식민지에 이주를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주민과 협상을 통해 모피 거래를 하는 것이 그들의 주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정부가 이주자들에게 토지를 양도하여 그들을 정착시키려는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 이주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모피 무역의 경쟁도 심해져서 수익성이 낮아질 거라는 생각도 인구 증가를 저해했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두 번째 차이는 종교관이다. 프랑스는 뉴프랑스에 퀘백, 트루아리비에르, 몬트리올을 차례로 건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본래 선교를 위해 식민지의 교두보로 건설한 도시들이다. '야만인'이라고 불렸던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가톨릭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반면에 뉴잉글랜드의 영국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원주민들을 개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원주민들이 식민지 개척에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이는 두 나라의 식민지 확장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배타적인 신념을 가진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 더 빠르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82p

미국은 골드러시로 1849년부터 1860년 사이에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채굴했다. 이는 1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채굴한 금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엄청난 금의 생산은 하늘이 미국에 내려준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미국은 유럽의 열강들에 가졌던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금 덕분에 미국은 30년간의 디플레이션을 완전히 극복했고, 경제가 급격히 성장했다. 역사상 미국처럼 적절한 식에 필요한 천연자원과 영토를 선물받은 나라는 없었다.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도를 근간으로 달러를 발행했지만, 실제로 그 근간을 이루는 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금광이 이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줬다.

291p

미국은 행운을 거머쥔 것도 부족하여 보너스까지 덤으로 받은 것처럼 보인다. 북미 대륙에서 이른바 '겨울 왕국'은 캐나다에게 양보하고, 엄청난 노른자위 땅을 다 차지한 미국의 운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알래스카라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다.


<오류>

48p

영국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제임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해야만 했다.

-> 제임스 2세는 앤 여왕의 아버지이고, 왕위를 요구한 이는 앤의 이복형제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이다.

123p

조지 2세의 아버지 조지 1세가 제임스 1세의 증손자였기 때문에 그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 제임스 1세의 딸이 조지 1세의 외할머니이므로 외증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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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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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책 판형도 한 손에 들고 읽기 좋고 무엇보다 주제의 범위를 좁혀 상세하게 분석하는 집필 방식이 마음에 든다.

저자의 전작,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과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을 흥미롭게 읽어 이 책도 기대가 많았는데 역시나 재밌다.

서울대 교수라고 하면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정말로 훌륭한 교수들은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밌게 강의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다른 것도 아닌 유명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소재로 등장해 관심이 생겼다.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니라 판첸 라마로부터 불상을 받아들고 온 사신 박명원으로 인한 논란을 함께 다루면서 꼼꼼하게 열하일기의 내용을 따져보는 부분이 좀 지루하면서도 역시 맥락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신국에서 예물 개념으로 준 불상 하나를 놓고 이렇게까지 온 조정이 시끄럽고 같이 간 박지원이 열심히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서 책에 기록까지 했을 정도로 시끄러웠던 걸 보면 예송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경직된 분위기가 충분히 이해된다.

요즘처럼 실리외교 이런 개념이 아니고 책에서 예시를 든 것처럼 마치 목사가 불상에 경배를 한 것과도 같은, 주자학자가 감히 승려에게 고개를 숙이고 불상을 선물받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상국으로 떠받드는 청나라 황제의 면전에서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 그토록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놀랍다.

과연 명나라 황제였어도 이런 반응이었을까 궁금하다.

황제마저도 판첸 라마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 앞이었기 때문에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이런 내용을 내 눈으로 봤다는 식의 열하일기 서술은, 사실은 전해 들은 것임을 저자가 밝힌다.

역시 역사학자답다.

할아버지 영조만 해도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그들이 망하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자기 생전에 오랑캐 운수 100년이라는 말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대보단이라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로 그 울분을 대신했을 터인데, 25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정조는 이제 준가르까지 점령한 건륭제의 천하를 실제적으로 인정하고 특별히 칠순 잔치에 축하 사절을 보내게 된다.

맨 마지막에 오늘날 우리가 일제 식민지를 겪었음에도 곧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지내는 것처럼 당시 조선인들도 왕이 굴복한 병자호란이 치욕을 겪었지만 다시 사절을 파견하고 관계를 존속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말에 수긍이 간다.

대보단에 제사를 지내는 존주의리와 청에 사신을 파견하는 대청외교는 모순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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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 태조에서 순종까지, 왕의 사망 일기
정승호.김수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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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아주 흥미롭고 좋은데 역시나 컨텐츠가 부족하다.

비교적 괜찮은 책들을 잘 고르는데, 이번에는 실패다.

저자 약력을 안 본 게 실책인 듯.

의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이라 사료에 나온 질병 관련 기사와 일반적인 의학 상식을 1:1로 매칭하니 깊이있는 분석이 나올 수가 없는 것 같다.

사실 사료 부족으로 왕들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이집트 미이라처럼 시신을 직접 조사한다면야 모를까 현대의학 체계와도 전혀 다른 당시 질병 기록, 더군다나 양도 매우 부족한데 무슨 결론이 날 수 있을까.

단순히 왕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개연성을 추론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만의 독특한 평가를 덧붙여 더 공감이 어려웠다.

이를테면 태종과 세종, 세조로 이어지는 왕들이 왕위 찬탈을 했기 때문에 매우 야비하고 잔인하며 정상적이지 않다는 식의 평가?

태종과 세조는 정변을 일으켰으니 혹시 유교적 포폄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긴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까지 야비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또 태조가 아들에게 쫓겨나지 않았다면 영락제의 반란으로 어수선했던 중원을 공격해 천자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홧병이 났다는데 정말 이런 가정법도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새로 세운 나라의 국명까지 황제께서 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냈던 이성계가 중원의 황제를 꿈꾸다니?

저자는 어쩌다 이런 논리적 비약을 갖게 된 건지 궁금하다.

역사 속 인물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도 안 되는 거지만, 반대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요즘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것도 잘못된 역사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의 건국자들이 갖고 있던 사대주의 정책을 요즘 개념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 정도로 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시각이다.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조선의 왕들이 종기 때문에 고생하고 죽기까지 했다는 점에 관심이 생긴다.

위생 상태가 안 좋은 시절이고 항생제가 없으니 감염으로 인한 죽음이 흔하긴 했겠으나, 면역력이 정상인 젊은 사람이 단순히 피부 감염 정도로 죽지는 않을텐데 기저 질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왕이 모든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이니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긴 했겠지만 스트레스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무려 67세까지 살았고 역시 나라를 잃은 고종도 68세까지 살았으며 아들에게 쫓겨난 태조도 74세로 천수를 누렸다.

수명은 확실히 유전적 요인이 큰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201p

인조는 죽기 전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저주를 걸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성리학은 질병의 원인을 저주나 사기에서 찾는 행태를 배격하고 사람의 마음에서 찾는다. 치료도 마음의 근본을 돌아보는 수양론에 무게를 둔다. 1633년 예조참의 이준은 인조의 저주 타령에 강력한 제동을 걸면서 왕의 병이 국상을 치를 때 과로한 탓이며 이것을 치료하려면 의원들의 처방과 성리학적 수행을 제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220p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에 어려움을 겪자 현종은 자책하면서 "차라리 죽어버려 이런 말을 안 들었으면 한다"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한다. 

(최고 권력을 누리는 것은 좋았겠지만 왕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집중되어 있으니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 같다. 오죽하면 저런 말을 했을까!)

253p

영조는 숙종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도 많았다. 게다가 신하들에게 대놓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심지어 종묘보다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을 먼저 가서는 안 된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이대로 빠져죽겠다고 울기도 했다. 그래서 찬 음식이나 찬 약을 먹어 그렇다는 자가 진단과 달리 영조 역시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에 시달렸다.


<오류>

134p

야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종과 폐비 신씨는 상당한 미남과 미녀였으므로 연산군도 남다른 용모를 가졌을 것이다.

-> 폐비 신씨가 아니라 윤씨이다.

183p

공빈 김씨가 죽었을 때 광해군은 겨우 두 돌을 넘긴 상태였다. 선조는 매우 슬퍼하며 한동안 후궁들을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보다 33세나 어린 인목왕후 김씨를 총애하고 공빈 김씨에 대한 애착을 접으면서 광해군의 처지는 천애 고아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 후 광해군은 장성해 한성판윤 유자신의 딸과 혼인했다.

->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총애를 받은 이는 인빈 김씨이고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세자 책봉을 받고 자식까지 낳은 후에 간택이 됐다.

195p

정원군은 11세이던 1590년에 두 살 많은 인헌왕후 구씨와 결혼해 16세 때 인종을 얻었다.

-> 인종이 아니라 인조를 얻었다.

220p

조선 왕 중에서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은 현종, 단종, 경종, 순종 4명뿐이었다. 단종은 너무 어려서~

-> 단종은 왕비 정순왕후를 간택할 때 삼간택에 들었던 두 명의 여인도 후궁으로 같이 들였다.

250p

딸 7명 중에서도 영조보다 오래 산 딸은 3명이었다.

-> 영조의 딸은 살아서 봉작을 받은 이만 해도 8명이다.

260p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제거한 세력은 자신의 외가인 남양 홍씨 홍인한과

-> 남양 홍씨가 아니라 풍산 홍씨이다.

271p

순조는 왕실의 큰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5년 동안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다가

-> 순조는 11세 때 즉위하여 4년 간 수렴 청정을 받았고 15세 때부터 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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