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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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책 판형도 한 손에 들고 읽기 좋고 무엇보다 주제의 범위를 좁혀 상세하게 분석하는 집필 방식이 마음에 든다.

저자의 전작,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과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을 흥미롭게 읽어 이 책도 기대가 많았는데 역시나 재밌다.

서울대 교수라고 하면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정말로 훌륭한 교수들은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밌게 강의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다른 것도 아닌 유명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소재로 등장해 관심이 생겼다.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니라 판첸 라마로부터 불상을 받아들고 온 사신 박명원으로 인한 논란을 함께 다루면서 꼼꼼하게 열하일기의 내용을 따져보는 부분이 좀 지루하면서도 역시 맥락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신국에서 예물 개념으로 준 불상 하나를 놓고 이렇게까지 온 조정이 시끄럽고 같이 간 박지원이 열심히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서 책에 기록까지 했을 정도로 시끄러웠던 걸 보면 예송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경직된 분위기가 충분히 이해된다.

요즘처럼 실리외교 이런 개념이 아니고 책에서 예시를 든 것처럼 마치 목사가 불상에 경배를 한 것과도 같은, 주자학자가 감히 승려에게 고개를 숙이고 불상을 선물받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상국으로 떠받드는 청나라 황제의 면전에서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 그토록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놀랍다.

과연 명나라 황제였어도 이런 반응이었을까 궁금하다.

황제마저도 판첸 라마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 앞이었기 때문에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이런 내용을 내 눈으로 봤다는 식의 열하일기 서술은, 사실은 전해 들은 것임을 저자가 밝힌다.

역시 역사학자답다.

할아버지 영조만 해도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그들이 망하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자기 생전에 오랑캐 운수 100년이라는 말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대보단이라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로 그 울분을 대신했을 터인데, 25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정조는 이제 준가르까지 점령한 건륭제의 천하를 실제적으로 인정하고 특별히 칠순 잔치에 축하 사절을 보내게 된다.

맨 마지막에 오늘날 우리가 일제 식민지를 겪었음에도 곧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지내는 것처럼 당시 조선인들도 왕이 굴복한 병자호란이 치욕을 겪었지만 다시 사절을 파견하고 관계를 존속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말에 수긍이 간다.

대보단에 제사를 지내는 존주의리와 청에 사신을 파견하는 대청외교는 모순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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