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웃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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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가 쓴 개를 키웠던 이야기,,,

처음 개를 데려오고 첫 인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철학자와 늑대"를 떠올렸다,

그 철학자가 늑대 새끼를 데려오던 첫날 개와 다른 습성을 가진 늑대에 놀라고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겐지가 데려온 건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는 개이다,

작가의 인상답게 큰 개를 좋아하는 겐지는 세퍼트를 비롯 여러 종류의 큰 개들을 키웠다,

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모르겠다,

워낙에 요즘은 애견인이 많고 개를 자식마냥 물고 빠는 사람들도 많아서 별로 인 경우도 많아서인지 개를 개답게 키우는 겐지가 나쁘진 않았따,

마당이 있는 공간에서 개집을 만들고 개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굳이 집에서는 목줄을 하지 않고 사람과 공간을 분리하는 일 등등은 좋았다,

개에게는 사람처럼이 아니라 개처럼.. 그게 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개의 습성이나 본능을 인정해주는 거 같았다, 인간에게 인품이 있고 인성이 있듯 개에게는 견품이 있고 견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거 같달까 뭐,,

그런데 자꾸 읽어가면 꼬장꼬장한 중년 사내가 개를 쉽게 기르고 쉽게 싫증내는 게 아닌사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소하게 꼬투리를 잡고 까탈스럽게 굴면서 쉽게 남에게 주고 쉽게 죽었다고 말하는 게 불편했다,

개에 비유해서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 견해를 드러내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고 그 사람의 개성이거나  어떤 특성으로 보긴 하지만 본인은 본인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너무 나만 옳다는 입장에서 내가 가진 견고한 틀로만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생각?

그리고 개를 키우면서 점점 그 틀이 더 견고해진달까? 더 집착하게 된달까

처음에 '철학자와 늑대'와 비교한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 철학자는 늑대를 키우면서 인간에 대한 시선이 넓어지고 세상에 대해 안목을 키웠는데.. 겐지씨는 점점 고착되고 좁아지는 것 같다,

음. 어쩌면 나랑 맞지 않은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말 다정한 말을 못하는 무뚝뚝하고 괴팍한 성격이라서... 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조금 불편하다,

겐지씨가 자기가 길렀던 개들을 하나하나 품평하고 불평하고 뒷담화를 하고 그로 인해 무언가를 알았다고 고백도 하지만...

문득 그 개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겐지씨가 어땠어?

주인으로써? 함께 살아온 동료로써?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게 더 궁금해졌다,

 

내가 절대 가까이 하거나 키울 수 없는 다양한 개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는 건 좋았지만,,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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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8-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대부분 이 책에 대해 평이 안 좋네요. 마루야마 견지는 사람이 그런걸 어쩌겠어요? 저는 적어도 거짓은 없다는 점에서 견지가 밉진 않더라구요 ^^

푸른희망 2016-08-09 11:51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밉다기 보다 함께 있으면 조금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실 시이소오님 서재에서 보고 궁금해서 읽었어요.. 이 책은 별로였지만 겐지에 대해선 궁금해졌으니 나쁘다고만 할 순 없네요. 늦었지마나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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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강박증이 있다,

어딘가 외출하기전 집안을 정리하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반질반질하게 살림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있어도 집안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괜히 좀 더 일찍 일어나게 되고 그 날따라 꿈지럭 거리는 가족들이 너무 미워서 미치겠고

먹지도 말고 얼른 얼른 후딱 후딱 모두 나가버렸으면 좋겠고 그렇다,

그 이외에도 뭔가를 해야할 때 내가 생각했던대로 딱딱 맞아지지 않으면 너무너무 화가 났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고 각자가 리듬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한 리듬과 속도가 어긋나면 화가 나고 불안하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 너무 심하게 어긋나면 혼자 불안해서 아예 시작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고쳐야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리듬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라 수 없다는 건 머릿속에서 충분히 충분히 스며들만큼 알지만 늘 그런 상황에 닥치면 화가 났다

누구에게도 표현 못하고 혼자 뚱해있거나 저 멀리 혼자 딴 나라에 가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

 

최정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와 다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는데 그걸 누군가에게 터뜨리기엔 아직 미진하고 너무나 주관적인데다 인물들이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쉽게 터드리도 못한다,

그렇게 내 뜻대로 되어가야한다는 강박과 제대로 되지 않은 불안이 점점 어긋나면서 결국은 터져나오는데 그게 참 찌질하다,

그저 바뀐 구두하나로 타인을 판단해버리거나(구두) 내 발에 박힌 유리조각조차 짜릿함으로 착각하고 (팜비치)

두꺼운 파란책의 하이데거로 내 삶이 바뀌리라 믿는 것 (파란책) 상대의 표정에 따라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해버리는 일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  건강염려에서 윌빙과 삶의 질에 집착해버리는 일 (오가닉 코튼 베이브) 그리고 딸에게 닦친 상황으르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타투)까지 모든 인물들은 꿩처럼 머리만 풀더미 속에 들이밀고 모른 척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거라고 믿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가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끊어진다,

모든 불안의 원인이 어쩌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주보지 못하고 미루어짐작하며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구두를 신고가 그 도우미는 내 삶을 부러워했다고 믿어버리고  발바닥에 유리가 박힌 그 사내는 내 가족이 내 가족이 아닌거 같은 고립감을 애써 모른 척한다, 웰빙과 유기농만이 내 삶을 구원할거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리고  나를 무시했던 그 작가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는 대신  사소한 상대의 반응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하는 행동따위가 회피의 모습이다,

그 회피의 최절정은 타투의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딸에게 생긴 충격적인 사건을  직면하지 못하고  그 직면하지 못함을 자꾸자꾸 이유을 찾는다,

딸아이의 친구들 딸아이의 소지품 게다가 예전에 떠난 아내까지 그러다 그 이유를 타투에서 찾으며 카메라를 들이대며 자기는 타자로 빠져버린다, 이런 뭐만도 못한 놈을 보았나...

어쩌면 파란책에 빠진 그 여자는 자기가 직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장 귀여운 존재인거 같다,

 

불안을 직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모습이 남의 모습만은 아니다,

누군가 나 대신 책임을 질 대상을 찾아내고 싶고 누군가 나타나면 혼자 안도하게 되는 것

그것이 그 사람 탓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눈감아 버리는 순간 모든 최정화의 단막들처럼 이야기는 뚝뚝 잘라먹어버리는 꼴이 된다,

그러나 삶에서 그렇게 잘라먹어버리고 미뤄놓은 부분이 꼭 어떤 모퉁이에서 드러난다,

그걸 마주하거나 혹은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거 같거나,,

 

소설속에서 나는 나의 여러가지 모습을 본다,

누군가 가해자가 있어야 할거 같은 강박

뭔가 내 삶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강박

계획대로 되어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유없는 분노들

그러나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고 교양있게 행동하는 참 속이 텅텅 비어있는 나까지....

가장 최고는 하나하나 단편을 읽으면서 짐짓 내가 처음 만나는 세상인냥

킬킬거리고 한숨 쉬고 아쉬워하면서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는 내 모습잉다,

그냥 나도 지극히 내성적으로 모른 척 아닌 척 하고 있는 중이다,

 

꼭 딸아이들 행동에서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같은....

막 화내고 싶지만 그게 바로 내 모습이라 화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그 갈팡질팡하면서 혼자 분노 게이지만 올리고 있는.. 딱 그순간이

이 책을 읽는 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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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외출하기 전에 얼굴, 옷차림새를 거울을 보면서 확인하고 나가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곳, 예를 들면 코털이 삐져나왔다거나 머리에 왁스를 발랐는데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여기에 신경 쓰다 보면 십 분 이상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이런 습관 때문에 지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

푸른희망 2016-07-11 15:4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나만 그런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죠
님도 그러시군요^^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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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을 읽고 '삼행인'을 읽은 후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냥 읽어내려갈 게 아니라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어야 할 거 같았고 이렇게 시작이 좋은데 뒤의 작품들이 실망을 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결국 모든 작품이 다 좋았다고 미리 고백한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벽들이나 내가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이 결국은 내가 선택하고  저질렀던 나의 어떤 행동들의 결과일까 아니면 어쩌지 못하는 운명탓일까?

사실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어디든 도망갈 길을 만들어주고 남탓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세상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운명도 잇는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참 싫었다.

그 운명조차 당신이 선택한 거라고 면전에서 박아주지는 못했지만  내 속내는 변명하지 말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물론 세상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와 제도적인 한계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사회 통념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운명이라는 말이 싫었다,

제도 역시 사람의 일이라고 믿었으니까....

 

봄밤을 읽으며 역시 생각했다,

영경과 수환 역시 본인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상황을 만났더라면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거라고 믿었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내몸을 그렇게 망가뜨리는 지경까지 가지 않을 선택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삼인행에서는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어떤 우연도 운명도 결국 그 이전 내가 무심코 했던 선택의 결과지일 뿐이야

정훈과 규와 주란의 여행이 다른 색깔일 수 있고 그 이전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날선 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이미 감추지 않아도 다 드러남에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모'를 읽으며 조금 흔들렸다,

어쩌지 못하는 것

내가 그렇게 선택하도록 내가 마주치도록 하는 내 성격적인 약함에 약간의 운명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같은 상황을 마주친다고 해도 제각각의 선택이 다를진대 내가 그렇게 선택했음은 내 셩격의 문제라고 한다면 내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게 된 상황에  내 선택들의 집합이기도 하지만 어떤 환경 어떤 운명 내가 어쩔 수 없음이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운명에 끌려 살다가 죽기 마지막 몇년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며 자유를 누렸던 이모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 어린 조카 며느리처럼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그리고 그게 운명이든 선택이든 잘 버텨왔다고 해주고 그렇다고 계속 또 버텨야 할 이유도 없다고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 옳은거라고 말해줄 수밖에

나는 제 3자이므로...

 

'카메라'는 운명이라는 것에 관한 한편의 시같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강해서사람의 살은 조금은 일그러뜨렸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오해를 하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낀다

아니 다들 조금씩 오해를 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으나 결국 스스로를 미워한다,

모두가 윤동주처럼 죄책감을 느끼고 늘 참회하며 살 수는 없는데

우리는 나도 모르게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결론을 짓게 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뒤끝이 나를 향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누구도 탓하지 못하고 나를 미워하는 일

결국은 내가 못난 탓이거나 나쁜 탓이라고...

그건 그냥 그렇게 만든 신의 탓이라고 해야함에도 신은 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나만 남을 때가 있다,

카메라는 결국 돌고돌아 주인 손에 왔지만 그 동안 서로가 탓하고 탓했을 시간은 결국 고스란히 남았다. 가끔 아니 대부분 내가 아픈 게 누군가가 아픈게 내 탓이 아니다.

 

"역광'과 '실내화 한켤레'를 읽으며 결국 내 생각으로 돌아왔다,

어떤 운명이든 그 순간 내가 한 선택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커피잔에 소주를 넣어 마셔야 하는  순간도 내가 정하는 것이고

학교 현관앞에서 실내화 한켤레처럼 덩그러니 남아버려야 하는 순간을 견디는 것도 내가 물어보지 못한  혹은 주저하고 말았던 소심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거야? 왜 그러는데?

그런 질문이 내 목구멍으로 쑥 도로 들어가는 순간, 역시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나 상황을 알더라도 속으로 삼킨 건 나였으니까

'층'은 영화같다,

계속 엇갈리는 운명의 남녀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어떤 오해들이 모이고 모여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이 뭐냐고 서로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그냥 모른 척 하다가 점점 벌어지고 순간 미움이 쌓이고 오해가 두꺼워지는 이야기들

커다란 기둥뒤에 각각 서 있는 남녀가 그 기둥을 돌면 바로 연인이 보일텐데 그저 기둥앞에 하염없이 서 있거나 혹시나 하고 돌아보는 순간 상대도 함께 돌아  지구를 도는 달처럼 서로를 어긋나게 하는 그런 처연함이 있었다,

순간의 한마디.. 전체의 흐름을 알려주지 않는 한마디의 쌍소리나 한번의 무심함이 마음에 큰 구멍을 만든다,

역시 물어보면 된다,

무슨 일이 잇어요?

그러나 둘 다 미루어 짐작하고 결정하고 묵혀버린다,

화가 나고 불쾌하지만 드러내지 않게 쿨하게 넘어가거나 먀낭 기다리며 우연을 바란다,

그래 운명을 믿고 우연을 기다리는 그에게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내 결정에 전적으로 믿어버린 그녀에게 뭐라할  수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편들은 제각각의 관계들이 나온다,

사람이란 결국 사회적 동물이라 관계속에서 오해가 생기고 틈이 생긱도 운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해설에서 씌여진 호모 파티엔스 라는 것

고통을 하는 사람.. 혹은 견디는 사람  그 견딤이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스스로 견디기로 결정해버린 사람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그 견딤 역시 우리가 혼자가 아니므로 생기는 게 아닐까 했다.

혼자가 아닌 존재가 혼자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혹은 혼자 일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견뎌야 하는 것이고 그 견딤이 나의 선택인가 운명인가는 늘 아리송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어쩔 수 없었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내 탓은 아니잖아요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더 중요한 진실의 얼굴을, 즉 인생에서는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어떤 파열이 발생하며 그것은 늘 돌이킬 수 없게 된 뒤에야 발견된다는 것,,,

 

옳은 말은 관찰자가 하는 것이지 희생자/ 피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자/ 피해자는 거기 빠져 죽은 사람이 왜 하필 내 자식이어야 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생각할 여력도 아량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단지 저주받아 마땅하나 것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말들이 다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운명이냐 선택이냐에 따라 닥친 고통의 무게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엿같은 구분따위와는 상관없이 아픈건 아픈것이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것이고 소리치고 싶은 건 소리쳐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티켓이 있고 인간적이고  쿨한 우리들은 그저 넘긴다,

그냥 넘긴다고 믿는 그 순간 우리는 견디고 참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것도 그냥 견디는 순간이다,

잊음으로서 견디는 것이고 그냥 넘기면서 견디고 있다,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알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모르는 것은 저 우주의 신비가 아니라 바로 숨쉬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다,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내 선택이라고 견디는 일

그것이 결국 살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술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바이~ 주정뱅이가 아니고 헬로우~ 주정뱅이다,

안녕 주정뱅이

결국 술이구나... 나를 위로하는 건..

쓸쓸한데 실실 웃음이 나오는게 이 한권의 소설집에 내가 취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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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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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타자기를 읽었다면 굳이 읽지않아도....이인칭 시점도 좋았고 1부 내면보고서의 유년기는 흥미롭지만 의미는 있겠지만 긴 영화이야기와 편지들은...글쎄
너무 쉽게 책을 썼다는 생각 그는 에세이보다는 소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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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흰‘을 읽는다,

어제와 그제는 드라마를 울면서 봤다.

두 가지의 매체가 묘하게 어울린다,

드라마에서 희자 이모는 어린 아들을 등에서 잃었다. 열감기를 앓던 아들이 희자 이모 등에서 죽었다.

정아 이모는 배속의 아들을 잃었다. 배가 아프고 힘들었는데 집안일도 멈출 수가 없어서 그렇게 잃었다

소설속에서 화자는 자기 이전의 언니를 생각한다.

여덟달을 채 못 채우고 급하게 나온 그 달떡같은 아기는 딱 한 번 제 엄마와 까만 눈을 맞추고는 그대로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죽지 마라 죽지마라.. 라는 제 어미의 힘없는 소리였음을 그 아기는 알까

희자 이모의 아들은 제 눈이 마지막으로 감긴 곳에 제 어미의 따뜻한 등이었다는 것을 알까

정아 이모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은 자기의 존재가 그렇게 기대되고 기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까

낯선 곳에서 작가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은 제 언니의 기억을 꺼내며 하나씩 하나씩 흰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건 참 한강 다운 일이고 죽은 언니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씻김굿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애도되어야 한다.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비로소 보낼 수 있다.

비단 죽음만이 아니다,

어떤 내 안의 사소한 감정 하나 경험치 하나도 충분히 알고 받아들이고 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찌꺼기가 남지 않게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여서 내 안에 작은 만을 이루지 않게, 그 만으로 물길이 막히지 않게 그렇게 흘려 보내는 행위는 필요하다

작가는 어떤 무언가를 내 보내는 과정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상상일 수도 있는 달떡같은 아기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씻어내고 있는 것이 이 소설 같다

드라마속 두 이모는 그들이 직면한 어떤 죽음도 제대로 애도하지 않았다

그 미완성의 애도는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혈관을 좁게 만들고 마음속에 많은 모퉁이를 만들고 굽이굽이를 만들어서 물길이 약해지고 흐름이 끊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이 나중에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는 그 순간 터져서 , 마구 화내도 되는 사람 앞에서 터져서 다행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흰‘에서 작가는 낯선 곳에서 낯선 생각을 이어나간다.

모두가 죽고 불타버리고 80년이전의 모든 것은 남은게 없는 도시에서 그때의 흔적들과 새로이 생긴 건물들이 이어진 묘하게 서로 섞이지 않은 경계선을 가진 도시에서 작가는 나와 이어진 흔적들을 생각한다

이질감도 있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지만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운명을 생각하고 그렇게 지금은 이물감이 드는 것이 또 다시 시간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알 수 없는 불안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툭 하고 죽음이 나타날 것같고 무언가 막연한 불안감이 확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야기가 불안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하얀것들이 등장하면서 알 수 없는 불안과 조급함을 느낀다.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31)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레이스 커튼

새로 발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각설탕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끄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안항T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몇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았다.

거짓망르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작별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뜰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우리 삶에는 죽음이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은 무자르듯 딱 잘라서 여기까지 라고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연결되었다고 할 수도 없지만 다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무엇

우리 주변에는 어디나 죽음이 있고 내 기억에도 죽음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 마음도 있고 죽음을 기다리는 내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는 나의 방어기제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죽음 내가 가야할 죽음이 내 삶과 늘 함께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이 결국 삶이라면 그 죽음 그들 사이에도 삶은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죽어버린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이어졌더라면 혹시 없었을지 모르는 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에게 예전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죽지마라 제발...

이제 그가 작가에게 들여준다,

죽지말아요...

작별이 있어도 인생은 계속된다.

 

삶이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은 슬픔인 동시에 행복이다,

삶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죽음은 늘 존재한다.

작가는 자기 삶을 이어가며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경계도 희미하다. 다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두려워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하얀것들을 떠올리며 어떤 죽음을 이제는 이 세상에 부재하는 무언가를 애도하는 과정에서 나의 삶을 생각하고 죽음을 셍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을 읽는동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첫장을 편다,

이제 다시 조급해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책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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