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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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을 읽고 '삼행인'을 읽은 후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냥 읽어내려갈 게 아니라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어야 할 거 같았고 이렇게 시작이 좋은데 뒤의 작품들이 실망을 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결국 모든 작품이 다 좋았다고 미리 고백한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벽들이나 내가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이 결국은 내가 선택하고  저질렀던 나의 어떤 행동들의 결과일까 아니면 어쩌지 못하는 운명탓일까?

사실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어디든 도망갈 길을 만들어주고 남탓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세상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운명도 잇는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참 싫었다.

그 운명조차 당신이 선택한 거라고 면전에서 박아주지는 못했지만  내 속내는 변명하지 말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물론 세상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와 제도적인 한계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사회 통념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운명이라는 말이 싫었다,

제도 역시 사람의 일이라고 믿었으니까....

 

봄밤을 읽으며 역시 생각했다,

영경과 수환 역시 본인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상황을 만났더라면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거라고 믿었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내몸을 그렇게 망가뜨리는 지경까지 가지 않을 선택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삼인행에서는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어떤 우연도 운명도 결국 그 이전 내가 무심코 했던 선택의 결과지일 뿐이야

정훈과 규와 주란의 여행이 다른 색깔일 수 있고 그 이전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날선 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이미 감추지 않아도 다 드러남에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모'를 읽으며 조금 흔들렸다,

어쩌지 못하는 것

내가 그렇게 선택하도록 내가 마주치도록 하는 내 성격적인 약함에 약간의 운명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같은 상황을 마주친다고 해도 제각각의 선택이 다를진대 내가 그렇게 선택했음은 내 셩격의 문제라고 한다면 내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게 된 상황에  내 선택들의 집합이기도 하지만 어떤 환경 어떤 운명 내가 어쩔 수 없음이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운명에 끌려 살다가 죽기 마지막 몇년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며 자유를 누렸던 이모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 어린 조카 며느리처럼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그리고 그게 운명이든 선택이든 잘 버텨왔다고 해주고 그렇다고 계속 또 버텨야 할 이유도 없다고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 옳은거라고 말해줄 수밖에

나는 제 3자이므로...

 

'카메라'는 운명이라는 것에 관한 한편의 시같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강해서사람의 살은 조금은 일그러뜨렸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오해를 하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낀다

아니 다들 조금씩 오해를 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으나 결국 스스로를 미워한다,

모두가 윤동주처럼 죄책감을 느끼고 늘 참회하며 살 수는 없는데

우리는 나도 모르게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결론을 짓게 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뒤끝이 나를 향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누구도 탓하지 못하고 나를 미워하는 일

결국은 내가 못난 탓이거나 나쁜 탓이라고...

그건 그냥 그렇게 만든 신의 탓이라고 해야함에도 신은 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나만 남을 때가 있다,

카메라는 결국 돌고돌아 주인 손에 왔지만 그 동안 서로가 탓하고 탓했을 시간은 결국 고스란히 남았다. 가끔 아니 대부분 내가 아픈 게 누군가가 아픈게 내 탓이 아니다.

 

"역광'과 '실내화 한켤레'를 읽으며 결국 내 생각으로 돌아왔다,

어떤 운명이든 그 순간 내가 한 선택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커피잔에 소주를 넣어 마셔야 하는  순간도 내가 정하는 것이고

학교 현관앞에서 실내화 한켤레처럼 덩그러니 남아버려야 하는 순간을 견디는 것도 내가 물어보지 못한  혹은 주저하고 말았던 소심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거야? 왜 그러는데?

그런 질문이 내 목구멍으로 쑥 도로 들어가는 순간, 역시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나 상황을 알더라도 속으로 삼킨 건 나였으니까

'층'은 영화같다,

계속 엇갈리는 운명의 남녀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어떤 오해들이 모이고 모여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이 뭐냐고 서로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그냥 모른 척 하다가 점점 벌어지고 순간 미움이 쌓이고 오해가 두꺼워지는 이야기들

커다란 기둥뒤에 각각 서 있는 남녀가 그 기둥을 돌면 바로 연인이 보일텐데 그저 기둥앞에 하염없이 서 있거나 혹시나 하고 돌아보는 순간 상대도 함께 돌아  지구를 도는 달처럼 서로를 어긋나게 하는 그런 처연함이 있었다,

순간의 한마디.. 전체의 흐름을 알려주지 않는 한마디의 쌍소리나 한번의 무심함이 마음에 큰 구멍을 만든다,

역시 물어보면 된다,

무슨 일이 잇어요?

그러나 둘 다 미루어 짐작하고 결정하고 묵혀버린다,

화가 나고 불쾌하지만 드러내지 않게 쿨하게 넘어가거나 먀낭 기다리며 우연을 바란다,

그래 운명을 믿고 우연을 기다리는 그에게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내 결정에 전적으로 믿어버린 그녀에게 뭐라할  수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편들은 제각각의 관계들이 나온다,

사람이란 결국 사회적 동물이라 관계속에서 오해가 생기고 틈이 생긱도 운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해설에서 씌여진 호모 파티엔스 라는 것

고통을 하는 사람.. 혹은 견디는 사람  그 견딤이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스스로 견디기로 결정해버린 사람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그 견딤 역시 우리가 혼자가 아니므로 생기는 게 아닐까 했다.

혼자가 아닌 존재가 혼자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혹은 혼자 일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견뎌야 하는 것이고 그 견딤이 나의 선택인가 운명인가는 늘 아리송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어쩔 수 없었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내 탓은 아니잖아요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더 중요한 진실의 얼굴을, 즉 인생에서는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어떤 파열이 발생하며 그것은 늘 돌이킬 수 없게 된 뒤에야 발견된다는 것,,,

 

옳은 말은 관찰자가 하는 것이지 희생자/ 피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자/ 피해자는 거기 빠져 죽은 사람이 왜 하필 내 자식이어야 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생각할 여력도 아량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단지 저주받아 마땅하나 것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말들이 다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운명이냐 선택이냐에 따라 닥친 고통의 무게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엿같은 구분따위와는 상관없이 아픈건 아픈것이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것이고 소리치고 싶은 건 소리쳐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티켓이 있고 인간적이고  쿨한 우리들은 그저 넘긴다,

그냥 넘긴다고 믿는 그 순간 우리는 견디고 참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것도 그냥 견디는 순간이다,

잊음으로서 견디는 것이고 그냥 넘기면서 견디고 있다,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알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모르는 것은 저 우주의 신비가 아니라 바로 숨쉬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다,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내 선택이라고 견디는 일

그것이 결국 살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술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바이~ 주정뱅이가 아니고 헬로우~ 주정뱅이다,

안녕 주정뱅이

결국 술이구나... 나를 위로하는 건..

쓸쓸한데 실실 웃음이 나오는게 이 한권의 소설집에 내가 취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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