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관한 101가지 질문 - 피카소에서 백남준까지
주자나 파르치 지음, 홍은정 옮김 / 경당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1


순전히 표지 때문에 고른 책이 있다. 주자나 파르치의 <현대미술에 관한 101가지 질문>(경당, 2012)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 독일 뮌헨에서 미술사가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 1952년 생이고 박사이다. 청소년을 위한 미술사 안내서인 <미술의 집>으로 독일에서 문학상을 수상하고, 렘프란트, 파울 클레, 구스타프 클림프 등의 책을 통해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프리랜서 작가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저자다. 물론 알라딘에도 이 책밖에 번역된 저작물이 없다. 그렇지만 책 표지에 오스카어 슐레머의 <바우하우스 계단>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걸 보니 눈길이 확 끌렸다. 현대미술가들 중에서 덜 알려졌지만, 독일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의 회화 작품을 표지로 전면 내세운 책이다 보니 궁금해서 구매를 안할 수가 없었다. 슐레머는 조각가이자 안무가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에. (물론 평면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의 대표적 평면 작품인 <바우하우스 계단>은 현재에도 <바우하우스>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오스카 슐레머는 인체 구성과 해부를 여럿 그렸는데(데생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를 바탕으로 유화 작품도 꽤 제작했다. 그 중에서 <바우하우스 계단>이 가장 회화적이고 유명하다.


오스카어 슐레머, <바우하우스 계단>, 1932, 뉴욕현대미술관

 


2


현대미술에 관한 책들을 일단 빠르게 꾸준히 모은 다음 야금야금 읽는 중이다. 그 가운데 표지에 혹해서 읽은 책. 101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현대미술을 보다 쉽게 알리려는 목적 아래 집필된 현대미술 입문서다. 현대미술을 안내하는 입문서 치고는 도판도 흑백이고 배판도 좀 작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은 책이다.

 

물론 내용은 괜찮다. 여기 등장하는 예술가가 무려 240인이다. 367페이지의 작은 책(A5 정도) 치고는 무척 많은 현대미술가들을 수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책 뒤의 부록으로 이들을 색인화하여 소사전을 제공하고 있으니 정보량에서도 알찬 책이다. 문제는 도판에 있다. 흑백이라도 소개해 주면 감사한데 도판 없이 설명만 간략하게 있어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느낌이 강하다.

 

장단점이 뚜렷한 책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읽을만하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너무 좋기 때문. 물론 101가지 물음에 저자가 짧게 대답하는 형식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보니, 체계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101가지의 개별적 물음을 통해 진지하게 더 생각하고 주제를 심화하여 공부해 나갈 수 있다. 질문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몇 가지만 살펴보자.

 

4. 현재의 모든 경향을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7. 지금 우리가 동시대의 미술, 현재의 미술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까요?

11. 현대적인 교회미술도 존재할까요?

21. 미술가 단체는 어떤 의미를 갖나요?

27. 앤디 워홀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요?

31. 20세기 최고의 미술가는 누구일까요?

32. 추상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34. 추상, 비구상, 구체라는 용어들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37. 현대미술에서 재료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45. 미술은 현대의 미디어에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49. 현대미술에서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50.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는 연극과 시각예술이 결합한 것인가요?

60. 공예와 디자인은 어떻게 다른가요?

63. 밀라노의 디자인과 동시대 미술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74. 현대건축과 세계화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82. 언제부터 여성이 미술가로서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나요?

97. 미술가에게 교육이 필요할까요?

99. 현대미술에는 사용 설명서가 필요한가요?

 

질문 하나하나가 거의 책 한 권 수준으로 답해야 할 주제들이다. 하지만 대답은 너무 간략하다. 예컨대 45번인 ‘미술은 현대의 미디어에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란 물음에 대한 답은 달랑 반쪽 분량이다. 이 책에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제일 짧다. 헌데 짧아도 될 듯싶다. 휴대폰으로 검색하면 세부적인 내용이 풍부하게 검색된다.

 

“오늘날의 미술은 다양한 미디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느 매체에서나 미술이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같은 미술과 미디어의 밀접한 관계는 독일 카를스루에에 세워진 ‘예술미디어센터(ZKM)’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요. 그것에서는 다양한 연구와 강연이 진행될 뿐만 아니라 박물관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p145)

 

45번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이 짧은 대답의 핵심 키워드는 KZM이다. 예술미디어센터를 처음 들어봐도 괜찮다. 휴대폰으로 검색하면 정보가 쭉 뜰 정도로 공히 알려진 정보이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디어로 바라본 인간과 세계>라는 전시가 있었다. 국현미가 독일 KZM과 공동 기획한 교류전이다. 이 정보만 검색해도 미술과 미디어의 관계를 풍부하게 살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미술가 한스 하케를 다룬 80번 질문,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설치한 한스 하케의 <국민에게>는 왜 논쟁거리가 되었나요?”에서 저자는 한스 하케를 3페이지 정도를 할애해 설명해 주고 있다. 작품 이미지도 없어 하케가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 감을 잡을 수 없지만, 역시 휴대폰으로 검색하면 한스 하케에 대한 정보가 이미지와 함께 주르륵 나온다.


보통 미술 애호가라고 하더라도 한스 하케를 모르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이 책을 통해 그 키워드를 탐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빈약한 설명은 검색을 통해 폭넓게 공부할 수 있기에 책을 사전 형식으로 활용하면 아주 좋다. 한스 하케의 <국민에게>라는 작업물도 사진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한스 하케, <국민에게> 


3


특이하게 본 책에만 소개된 미술 작품(미술가)이 있다. 구글 검색으로도 작품을 찾을 수 없다. 물론 챗 GPT로는 인명 정보는 찾을 수 있지만, 작품 이미지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예컨대 빌리 볼프. 동독 사회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1970년 빌리 볼프가 제작한 <레닌>은 최초의 러시아 팝아트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본 책에만 이미지가 수록되어 있다. (검색으로 찾을 수 없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중요 작가들이 이 책에 100명 이상 수록되어 있다. 알바르 알토, 크리스 오필리, 다니엘 스포에리, 알렉산더 키놀트, 제프 월, 빌리 지테, 다니 카라반, 아르눌프 라이너, 프란츠 폰 렌바흐, 알베르트 렝거-파치, 더글라스 고든 등. 아마 처음 듣는 작가들이 많을 듯한데, 비디오 아트 예술가, 건축가, 설치미술가 등이 많기 때문.

 

그래도 검색을 통해 이런 현대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독서 방법일 듯하다. 저자의 빈약한 설명은 검색을 통해 어느 정도 매울 수 있기에 책의 활용도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겠다 싶다. 부록으로 실린 <유럽의 주요 현대미술 전시장> 정보는 끝내준다. 여행 가서 둘러볼 좋은 정보이지 않을까. 여러모로 다채롭게 읽을 수 있는 동시대 미술 안내서라 아니할 수 없다. (끝)

 

[덧]

본 책은 동시대 미술 인명 및 서지 가이드로 집필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독일권 동시대 미술가를 이렇게 풍부하게 알려주는 책도 드물기에. 검색해서 심도있게 공부할 수 있는 툴을 제공하는 책이라 생각하면 빈약한 설명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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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3-1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현대미술 저도 좀 어려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절판이네요. 아직 중고로는 있지만.

yamoo 2026-03-12 09:32   좋아요 1 | URL
이 책은 현대미술 책이라기 보다는 동시대미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현대미술에 대한 대부분의 책은 인상주의부터 다룹니다만...이 책은 클래식 모던부터 다룹니다. 클래식 모던은 후기 인상주의자들부터 1980년대 작가들까지 다루고 있는데 핵심은 요제프 보이스처럼 설치 및 퍼포먼스 작가들이 많아요. 건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절판이라는 사실을 몰랐네요. 말씀마따나 중고로 쉽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요. 처음 들어보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검색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검색용으로 책을 활용해도 좋은 그런 책입니다..ㅎㅎ

페넬로페 2026-03-1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우하우스 계단> 그림 좋네요.
책도 그렇지만 화가와 그림도 너무 많아요^^

yamoo 2026-03-12 09:35   좋아요 1 | URL
저도 좋아하는 그림입니다!ㅎㅎ 슐레머는 저런 형식의 유화그림을 꽤 그렸는데 색감과 형태가 아주 좋아서 매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맞아요. 화가와 그림은 정말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지금도 세계 어느 지역 어느 갤러리에서 작가와 작품들이 태어나고 있으니까요..ㅎㅎ 하지만 현대미술에 관한 책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듯해요. 마르크스 저작물 관련 책들보다 적은 듯합니다..ㅎㅎ

카스피 2026-03-12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미술의 경우 바우하우스 정도면 그래도 감상이 가능한데 너무 추상적인 작품들은 당최 작가가 무스 의도로 그렸는지 해설을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위 책은 현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 같아요.

yamoo 2026-03-12 17:18   좋아요 0 | URL
특히 설치나 퍼포먼스가 그렇죠. 모더니즘 회화도 그렇구요..^^

맞아요. 요 책은 길라잡이로 활용하면 아주 좋을 그런 책입니다!ㅎㅎ
 

최근에 6호 그림이 팔렸다. 이전 포스팅에서 팔린 그림을 올려 보았다. 당시 내 그림을 구매하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이 놀라웠다. 그림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감사하다고. 내 그림 가격이 저렴한 건 갤러리 관장님도 인정한 부분이라, 올해부터는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다.


어쨌든, 내 그림을 판 돈으로  아주 큰 그림을 낙찰받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화! 이런 정도의 풍경화를 아트페어나 갤러리에서 구입하려면 최소 천 만원 정도가 소요될 듯하다. 엄청난 실력자의 풍경화는 갤러리에서 그만한 가격을 설정하겠지.


일단 어떤 그림을 구매했기에 이런 호들갑인지 구매한 그림을 올려볻다.


[유성, 강변의 가을 정취, 115.5cm×80cm, 캔버스에 유채, 2015]


50호에 가까운 그림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구도의 풍경화. 작가는 북한 공훈예술가. 1963년 출생이니 30년 이상 그림을 그린 중견 북한 화가이다. 공훈예술가이니 말해서 뭣하랴. 우리나라로 치면 미술관에서 관리하는 작가쯤 된다. 


북한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의 그림은 정말 좋다. 우리나라 굵직한 근대미술가가 그린 풍경화와 비견될 정도로  좋은 그림들이다. 근데 정말 저렴하게 우리 시장에 유통되고 있다. 온라인 경매에 간혹 올라오는데, 내 취향의 그림이 올라오면 바로 구매하는 편이다. 이 그림은 내 그림 팔아 구매한 최초의 그림이다! 6호 그림을 보내고 50호 그림을 데려왔으니 이런 횡재도 없을 듯싶다.


이전에도 내 페이퍼에 언급했다시피 북한화가의 사실화는 나름의 희소한 가치가 있다. 60년대 화풍을 현재까지 지속하며 지켜온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기 때문. 어찌보면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헌데 2010년 즈음, 네널란드에서 북한 화가 전시회가 열였을 때 모든 그림이 순식간에 완판됐다고 한다. 50호 유화 그림이면 수천만원에 거래됐다나. 그 이유가 그 촌스러움에 있다고. 세계 어떤 화가도 저런 구식(?)으로 그리지 않기에.


북한의 그림은 조선화라고 해서 장지에 채색을 한 작품이 대다수다. 유화는 그 수량이 적고 30호 이상의 유화는 그 수가 매우 적다고 한다. 통일이 되면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데, 그건 현재 잘 모르겠고, 내가 좋아하는 풍경화라 소장해서 즐겨 보고 있다. 북한 그림은 현재 이상할 정도로 저렴하게 거래되고 있다. 30년 이상 그려온 대가들인데 우리나라 신진작가들의 갤러리 그림보다 훨씬 저렴하니, 구매 안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원화는 상상을 초월하게 비싼대 말이다. 


어쨌거나 이 그림 낙찰받기 전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경쟁이 붙고 시작가가 올라가면 포기 모드라. 헌데 운좋게도 내게 왔다! 액자가 없어 액자를 해야 하지만 액자 비용 포함해도 거져나 다름없다. 얼른 액자해서 방에 걸어놔야 겠다. (끝)


[덧]

최근 변월룡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더욱 북한 그림을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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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28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속적으로 그림이 팔리셨다니 이제 야무님을 화백님 이라고 불러야 될 듯 싶어요.그림판매 축하드립니다^^

yamoo 2026-03-03 16:15   좋아요 0 | URL
저도 놀라고 있습니다만...아직까진 응원의 차원으로 보입니다. 화백이라니...어림도 없어요. 10년차도 미술계에서는 햇병아리입니다.^^;;

그레이스 2026-02-28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대화가들 중 월북작가들 그림은 좋아합니요. 변월룡 그림도 좋았구요. 소마에서 전시회 할때 접하고 책으로도 접하면서 그들의 그림을 찾아보게 되었죠. 덕수궁에서 중국화가들 그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 그림을 발견하기도 했구요. 북한 그림이 인기가 있다니...유렵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낙찰받으셨다는 그림 멋있네요. 색채나 구도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말할수 있지만... 훈련되고 뛰어난 기교로 나름 생각을 담아 공들여 그린 그림이란 느낌을 받아요. 실물은 더 멋지겠죠? 암튼 축하드립니다. 그림만 잘 그리시는게 아니라 보는 안목도 높으신듯 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알아야 산다> 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yamoo 2026-03-03 16:21   좋아요 1 | URL
그래서 변월용 화사를 다룬 책도 구매하려고 합니다. 현재 2권 나와 있더라구요..ㅎㅎ
그레이스님도 위 그림 좋게보셨군요! 사실화..곧 풍경화나 정물화가 북한화가들이 자신의취향에 맞게 자유로울 수 있는 범주입니다. 제약받지 않는 주제에서 자신의 화풍이 나오죠. 저는 저런 그림을 좋아합니다!^^

알아야 산다..라는 책이 궁금하네요. 사서 봐야겠어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ㅎㅎ

그레이스 2026-03-03 16:43   좋아요 0 | URL
앗
사서 보실 책인가 싶긴 해요
그림경매 관련 책인데,,,, 그 단계는 넘으신듯 합니다.

잉크냄새 2026-02-28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 판매 축하드립니다.
북한 미술이 촌스럽고 구식으로 평가받나 보군요. 위 그림만 놓고 보면 전 참 좋아 보입니다.ㅎㅎ

yamoo 2026-03-03 16: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저두 저 그림이 참 좋습니다! 누가 뭐라 그래두..^^;;

2026-03-02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04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회화 중에 정물화가 있다. 꽃, 화병, 주전자, 병, 과일 등을 그린 그림. 세잔의 사과 그림은 너무도 유명하다. 정물화로 유명세를 떨치기는 좀처럼 힘든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자승 화백이 정물화로 인기가 많고 유명하다.

 

근데 정물화는 왜 그리는 걸까?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에서 보았을 때 정물화는 현대적이지 않은 주제다. 개인적으로도 궁금했다. 화가들은 도대체 정물화를 왜 그리는 걸까?

 

공부를 좀 해 보니, 사물과 공간에 대한 기본기를 익히기에 정물화 만한 주제도 없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그걸 보는 화가의 관계도 잘 드러내 주기에. 작가에 따라서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고.

 

구성이나 구도를 잡는 것 또한 작가의 능력이라 이런 걸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여기에 작가의 화풍과 개성이 더해지면 정물화라도 엄청난 매력을 뽑낼 수 있다. 세잔의 사과 그림처럼 말이다.

 

최근에 정물화의 매력에 빠져 몇 자 적어 본다. 정물화는 화가에 따라 진짜 천차만별이다. 단순하기에 화가의 개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좋은 작품을 감상하면 기분이 매우 좋다.

 

정물화는 회화 중에서 매우 정적인 화면이라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화가만의 특색이 잘 드러난 작품을 보면 감동도 느낄 수 있는 장르다. 최근에 발견한 나만의 느낌이다. ㅎㅎ

 

개인적으로 도상봉 작가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화풍 변화도 없었고 그림 자체가 좀 밋밋하고 작가의 서사가 없어 그냥 그랬다. 헌데 정물화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도상봉은 일생을 두고 지속적으로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렸다. 도자기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지 도자기 그림도 많이 남겼다. 특히 백자에 꽂힌 꽃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처음엔 잘 그린 그림으로만 생각했다. 정물화를 쭉 감상하다 보니 도상봉만의 개성이 보였다. 다른 어떤 화가도 도상봉처럼 그리지 않았다.




회화에서 정물은 극히 제한된 사물의 배치이다. 하지만 요구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것이 회화라면 언제나 짜임새 있는 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회화에서 구도와 구성이 가장 극명하게 요구되는 주제다.

 

이는 화면의 밀도에서 드러난다. 좋은 정물화는 안정적인 구도에서 사물의 밀도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대상들 간의 관계가 드러나며 일상적인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헌데 도상봉의 정물화에는 이런 밀도감을 느낄 수 없다. 짜임새 있는 구도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공간의 균질함이 차지하고 있다. 도상봉의 정물화를 보면 한결같다.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가 부드럽게 퍼져가는 느낌이 강하다.

 

위 <국화>에서 보듯이 국화가 꽂혀 있는 화병이 불안정하게 크다. 저런 식으로 구도를 잡는 작가는 거의 없다. 헌데 도상봉은 저런 구도로 많은 정물화를 남겼다. 매우 특이해서 오래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 걸까. 평론가 오광수는 <21인의 한국 현대미술가를 찾아서>(시공사, 2003)에서 도상봉의 정물화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만년의 화면들이 짙은 관조의 세계로 돋보이는 것은 고른 숨결처럼 잔잔하게 덮어가는 색조와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부드러운 톤의 다독거려진 터치와 색조의 포화 때문이다.”

 

오광수는 도상봉의 정물화 기법을 ‘포만의 효과’라고 명명했다. 이를 통해 도상봉은 관조의 세계를 성취했다는데, 이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대상을 기이하게 강조했지만 부드럽고 풍만한 색조의 퍼짐을 통해 대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확실히 그만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도상봉의 <국화>는 구자승의 정물화와는 또 다른 면을 보여 주기에 좋았지만 변월룡의 작품을 보면서 정물화의 경지를 새롭게 느껴볼 수 있었다. 남한에서는 잊힌, 북한에서는 제거된 화가.

 

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이 고려인 화가 작품을 보면서 나는 단순한 정물화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지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림 한 점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가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려 있는 <진달래>를 보고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과감한 구도를 택해서 정물화를 그렸는지. 전체를 덮고 있는 화사한 진달래 꽃은 봄의 계절감을 만끽하게 한다.

 

옆 쪽 문지방으로 보여지는 먼 산의 풍경과 떨어져 있는 진달래 잎은 원경과 근경의 조화를 통해 '풍경적 정물'이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방에 떨어져 있는 나무 숟가락(파이프?)과 흩어진 꽃들, 낮은 위치에 있는 화병 등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가운데 있는 흐드러진 진달래로 인해 화면은 정돈된다.

 

밀도감 보다는 대상들의 관계를 통해 '자연의 시간'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능력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구도의 자연스러움은 대상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공간을 새롭게 창출한다.

 

하나의 화면에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오후의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니!. 정물화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변월룡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더 궁금해진다. 내가 본 정물화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 아닐까 한다.

 

밋밋하고 식상하다고 생각했던 정물화. 구자승 화백의 정물화가 규범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도상봉과 변월룡의 정물화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또 어떤 정물화가 내게 큰 감동을 줄지 다른 작가의 정물화를 찾아 나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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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2-2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상봉 화가의 그림 좋아하는데…^^
오광수 평론가의 평에 공감해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yamoo 2026-03-09 11:19   좋아요 0 | URL
도상봉 화가의 작품들을 보면 60년대 활동했던 화가들에 비해 임팩트 있는 그림이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김환기, 박고석, 손상기, 장우성, 유영국 등과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색을 끝까지 밀고나간 그 지속성은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엣지나인님~~^^

stella.K 2026-02-25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까 스맛폰으로 볼 때와 노트북에서 볼 때랑 좀 다르네요.
저는 노트북에서 보면 화면이 커서 더 좋을 줄 알았거든요.
소박하고 정감있어 보이는데요? 60년대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ㅎㅎ
요즘도 그림 그리시죠?^^

yamoo 2026-02-26 09:32   좋아요 1 | URL
대체로 도상봉의 대표작들은 60넌대 그렸기 때문이에요..ㅎㅎ
근데 당시 정물화를 그린 대부분의 작가들은 도상봉처럼 대상을 캔버스 꽉차게 그리지 않았어요. 비례를 해치는 구도인데...도상봉은 죄다 저런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렸다는...^^;;

요즘도 그려요~~ㅎ 올해 역시 개인전이 잡혀 있기에..^^;;

Forgettable. 2026-02-25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과천 국현미에 갔다가 본 것 같은 그림이군요. 기억을 되살려보니 진짜 이렇게도 한국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놨다니 하며 감탄했는데요. 이 글을 읽고 보니 오히려 이국의
시선이 담겨 있기에 더더욱 한국의 미를 잘 드러난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yamoo 2026-02-26 09:36   좋아요 0 | URL
변월룡의 많은 작품들을 보고 싶은데....이미 회고전은 지났고...앞으로 다시 기획될 전시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 아쉽네요. 모스크바 미술관에 남아 있는 변월룡의 그림도 무척 궁금합니다. 검색하면 몇 점의 이미지가 뜨는데...그걸 보면 변월룡의라는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놀랍니다. 변월룡을 발굴한 미술사가에게 상을 줘야 할 듯싶어요~~ㅎㅎ

페넬로페 2026-02-27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달래 정물화 넘 좋아요.
봄의 기운이 넘쳐 캡쳐해 제 카톡 프사에 넣었어요 ㅎㅎ
그림을 너무 못 그리는 저는 학교 다닐 때 정말 정물화 그리기가 싫더라고요.

yamoo 2026-02-28 10:51   좋아요 1 | URL
저 진달래 그림...정물화 중에서 제 원탑인 그림이 됐습니다..^^

저두 학창시절 그림을 너무 못 그려 잘 그리는 학우들 되게 부러워 했고, 그림을 못그려 미술시간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특히 정물화 그리기...아그리파 그리는데 종이 찢어버린 게 몇장인지 셀 수도 없어요..ㅎㅎ
 

18일과 20일 그리고 22일 독토의 연속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독토가 몰리다보니, 이미 읽었던 책이고 이미 이전에 진행했던 책이라도 오래됐기 때문에 약간의 읽는 수고는 들여야 했다. 그러니 좀 빡센 느낌.


특히 18일과 22일 모임은 모두 기대치가 높았기에 그게 좀 부담이 되었다. 어쨌거나 잘 마무리 돼서 참 홀가분하다. 뭔가 프로젝트를 해치운 느낌.








근데 어제 모임에서 한 분이 역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모임 뒤풀이까지 남아있던 4분에 대한 사주를 봐 주었다. 물론 재미로. 요즘은 인터넷에 자기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입력하면 사주가 뜬다.


그 해석은 각자이지만, 사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자세한 풀이를 보려면 결재를 해야한다. 처음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 알았는데, 내 사주 설명을 들으려면 시일월주의 천간 배열은 필수다. 


누구나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추출되는 천간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2026년은운수가 대통한 한 해라고 한다..ㅎㅎ


병-병-병. 이 연속된 태양이 아주 좋다고. 편재의 신은 금전 운수란다.

생의 후반에 금전 운이 있다고.


식신은 표현의 재능인데, 이로부터 금전운수가 48년까지 지속된다고 한다.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은 운수란다.ㅎㅎ 병오년에 3병이 찬란하게 타오른다니..ㅎㅎ


헐~ 그래서 그런지 18일 모임에서 모임 회원 중 한 분이 내 그림을 한 점 구매하셨다. 지난 달에 개인전 도록을 한 부 달라고 해서 드렸더니, 한 점을 골라 갖다달라고. 22일 인도했다. 결과치로 보니 올 해 운수가 대통할 듯싶다..ㅎㅎ


회원 중 한 분이 택한 그림이다. 6호. 아비투스. 구상 그림이 있는 개인전 그림은 이로써 1점 빼고 다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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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2-23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에 금요일 저녁 8시 제가 만든 세계 문학 모임, 토요일 아침 10시 서울 노원구 독서 모임, 대구로 돌아와서 일요일 오후 철학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아무나 하기 힘든 독서 모임 트리플크라운(?)를 했다는 사실에 뿌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yamoo 2026-02-24 10:13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해 봤는데,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들어 그냥 회원으로 참석하는 편입니다. 그것도 그림그리면서 참석 자체가 힘들어졌어요. 근데 어느 순간 독토 참석하고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오고가는 얘기...뭐하시는 분이냐...그래서 화가로 데뷔했고 관장님이 전에 말했듯이 도록을 명함처럼 가지고 다니라 해서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보여줬더니....이 분들 중 일부가 미술책 독토를 좀 해달라고 해서 어찌 하다보니 하게됐습니다. 그렇게 3개를 하게 됐는데...한 번 할때마다 반응이 좋아 놀랐는데...문제는 이분들의 기대치가 점점 높아져서 제가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는...^^;; 그래도 끝나면 뿌듯합니다..ㅎㅎ

얄리얄리 2026-02-24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yamoo님. 줄 서 봅니다.^^;;;;

yamoo 2026-02-24 10:17   좋아요 0 | URL
얄리얄리 님...ㅎㅎ 줄서는 분에게는 확실한 기회가!!^^;;
 
살아남은 그림들 -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조상인 지음 / 눌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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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는 슬프지만, 살아남은 그림은 위대하다. 화가는 갔지만 그림은 살아남아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화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책이 있다. <살아남은 그림들>(눌와, 2020). 기자 출신 미술평론가 조상인이 쓴 ‘한국 근현대미술가론’ 즘 되는 책이다. (부제가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비슷한 책은 많다. 이미 1세대 미술평론가들이 <한국의 근현대미술가들>이라는 책을 꽤 많이 냈다. 최근에 읽은 정하윤의 <커튼콜 한국현대미술>도 비슷한 책이다. 보통 평론가가 10명에서 30명 정도 작가를 선정해서 그림과 작가의 생애를 나열식(연대순)으로 쓴 책들이라 보면 된다.

 

본 책도 비슷하다. 한국 작가론에 관계된 책을 읽다 보면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헌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제목이 <살아남은 그림들>이다. 미술사를 공부해 보니 그림이 살아 남기 정말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림이 100년 넘게 보전되고 관리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리다가 작가가 죽으면, 그 그림은 어떻게 될까? 작업실이 크고 집이 부자이면 대체로 그 그림은 가족이 소유하며 보존하게 된다. 집이 없는 가난한 화가라면? 그림은 모두 없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죽어서 그림이 남아 있지 않으면 잊혀진 존재가 된다.

 

비운의 화가 나혜석은 남아 있는 작품들이 거의 없다. 월북한 화가들은 말해서 뭘할까. 그래서 살아남은 그림은 명작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림이 남아 있어야 보여지고 연구될 수 있기 때문. 월북작가(1953년 포로교환 때 북을 택함) 이쾌대는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1988년 해금 조치가 된 후 1991년에야 겨우 이름이 알려졌다.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72×60cm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 전이 열렸을 때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가 열려 잊혔던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p47)

 

1991년과 2015년 전시를 채운 이쾌대의 그림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53년 월북한 작가들은 모두 한국 공안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쾌대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인 유갑봉 여사는 53년까지 남편이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다락방에 꽁꽁 감췄다. 아들도 몰랐단다.

 

”여사는 혹여라도 남편의 그림을 뺏앗길까 누구에게도 다락방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방고지>를 포함한 일련의 그림들은 모조리 그 다락방에서 나왔다.“ (p51) 우리가 각종 책과 전이에서 이쾌대의 자화상과 엄청난 대작 그림들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유갑봉 여사가 이쾌대 작가의 그림을 지켰기에 가능했다.

 

화가 곽인식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이우환 작가는 알아도 곽인식 작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왜냐하면 곽인식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활동하던 작가였기 때문(일본 물파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가가 곽인식. 물파주의의 철학적 기조를 형성한 이가 이우환이다). 그런 그가 1982년 갤러리 현대에서의 개인전을 발판으로 귀국했다.

 

1985년 한국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곽인식은 198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그림들은 어떻게 됐을까? 2019년 ‘탄생 100주년 기념-곽인식전’은 화가의 아들 곽경직이 아버지의 유작들을 지킬 수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재료가 다양하고 보관이 쉽지 않은 100여 점이 전시됐고 뒤이어 고향인 대구미술관으로 순회전이 이어졌다. (p341)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배운성’전은 배운성이 파리에서 전쟁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못한 그림들로 채워진 전시였다.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이 유학생 시절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뭉치째 나온 배운성의 그림 48점을 발견하고 구매했기 때문이다. 눈도 밝았고 운도 따랐다는 게 전언이다.

 

이렇듯 화가들은 갔지만 그림들은 살아남아 한국 현대미술의 보고(寶庫)가 됐다. 이 책에 소개된 37명의 화가들은 한국 근현대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모두 미술사적으로 ‘최초’라는 업적을 쌓았고, 미술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걸출한 화가들이다.

 

그럼에도 모르는 화가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변월룡(1916~1990).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덕수궁관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가 국내 최초의 회고전이었다.“ (p196) 변월용은 남한이 몰랐고 북한이 지워버린 화가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의 국적은 소련.

 

변월룡, <진달래>, 1954, 캔버스에 유채, 78×59cm


죽을 때까지 한국적 향수를 간직했던 변월룡은 평생 그림에 한글로 서명을 적더니 비석에도 한글로 이름을 새겼다. 한국 미술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화가를 발굴한 사람이 미술평론가 김영대이다. 국립 러시아미술관 복도에 걸린 그림에서 한국인의 피를 느꼈다고. 그렇게 변월룡은 김영대 평론가의 노력으로 한국 현대미술사로 편입되었다.

 

<살아남은 그림들>은 소주제를 잡아 작가들을 분류하고 연대순으로 나열한 작가론이다. 2년 이상 신문에 연재한 ‘조상인의 예(藝)’가 수정 증보되어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 그래서 그런지 화가와 그림 소개가 전형성을 띠고 있다. 대표작 그림에 저자의 그림평과 해석, 작가 소개 그리고 작품의 영향 및 의의 등 서술 형식을 보인다.  단점이자 장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 

 

도판 그림도 좀 아쉽지만 내용이 충실하고 작가들의 몰랐던 관계도 알 수 있어 모쪼록 유익한 책이다. 이쾌대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이가 물방울 작가 김창렬이었고, 이 이력 때문에 김창렬은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더욱이 김창렬은 소학교 시절 딱 1번을 제외하고 1등을 놓친적이 없다고.

 

최영림은 월남하는 도중에 이중섭에게 신세를 졌고, 이중섭은 부산에서 박고석에게 신세를 졌다. 도상봉은 원래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정치적 실력을 다질 예정이었지만 교양수업으로 듣던 서양미술사에 빠져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변관식은 서화미술회에서 스승인 안중식을 만났고 이당 김은호와 동문이 되었다. 이응노는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무보수로 허드렛일을 해주면 주변을 멤돌았다고. 문하생이 된 이응노는 대나무에 탁월하고 죽순처럼 빠르게 배운다 하여 스승 김규진에게 죽사라는 호를 받았다. 1933년부터 ‘고암’이라는 호를 쓰기 전까지 그는 죽사였다. (p304)

 

화가와 그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의 앞가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가 청전 이상범이었다. (p236) “당신의 이름을 내게 주세요. 그러면 평생 그 이름으로, 그 이름을 위해서 살겠어요.” 이렇게 말한 여자의 이름은 변동림이고, 받은 이름이 ‘향안’. 아호를 내 준 이가 김환기다. (p102)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총 155점. 도판 전문 용지가 아니라 인쇄가 좀 아쉽지만 37인의 대표작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저자 조상인이 본 그림의 느낌과 내가 그보고 느낀 지점이 무엇인지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책을 읽는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내게 제일 좋은 그림이 뭔지 나름 생각해 보는 사치는 보너스. 나는 변월용의 <진달래>가 잊히지 않는다. (끝)

 


[덧]

1. 37인 중에서 저자 조상인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작가는 유영국. 무려 16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은 9~14페이지 정도.

2.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회화

 -배운성의 <가족도>. 당시의 옷차림과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아 지정. p88

 -김환의의 <론도>. 실험적인 추상미술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등록.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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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08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것이 아니고 오래 가는 자가 강한 것이다.˝ 짝패의 이범수 대사가 그림에도 딱 들어맞네요.^^

yamoo 2026-02-09 07:05   좋아요 0 | URL
그림이 참 그렇습니다. 평론가나 미술사가에게 발굴되고 재조명 되지 않으면 그냥 없는 그림이나 마찬가지더라구요. 화가의 그림이 화가가 죽으면 없어진다는 게 대개의 정설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록이 중요하다는군요. 그림이 없어지더라도 도록은 남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도록은 작가에게 최후 보루나 마찬가지 인듯합니다.
어쨌거나 100년이 넘게 그림이 남아있다는 건 그만큼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가 되겠죠.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래서 귀한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