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군인 - 가장 슬픈 이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5
포드 매덕스 포드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도대체 이 소설이 왜 유명하고 필독서가 됐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소설 이야기는 쌔고 쌨다. 부제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라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훌륭한 군인>(문예출판사, 2013)을 완독하고 난 직후의 내 생생한 감정이다.)

 

자녀가 없는 두 커플이 만나 9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래서 그것이 소설의 소재라면 거의가 커플의 한 쪽 여자와 다른 쪽 커플의 한 쪽 남자가 바람이 나거나, 아니면 쌍쌍이 바람이 나거나. 뭐 그 중의 하나다.

 

줄리언 반즈의 작품 중에서도 두 커플이 바람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서도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여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한 소재 중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타이틀이 훌륭한 군인’. 커플 간 불륜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고, 책 표지에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20세기 최소의 소설이며 영어로 쓰인 최고의 프랑스 소설이라 찬사 받은 작품!"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읽기 시작했다.

 

, 그런대로 읽을 만은 했다. 근데 주제가 너무 맥빠지는 얘기고 식상한 얘기라 책을 덮고 이 소설의 의의와 가치를 곱씹어 봤다. 결론은 옛날에나 통용되는 문학성이라는 거. 그리고 더 중요한 작가의 숨기지 않는 오리엔탈리즘에 냉소를 금치못했다.

 

저자인 포드 매덕스 포드는 1870년대 사람이다. 영국의 작가이자 비평가. 그는 대영제국의 그러니까 빅토리아 후기 시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상류층 문화와 종교생활이 어떻게 데카당스적 라이프스타일로 수렴되는지 캐릭터에 생생히 녹아있다.

 

사실 이 부분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 원동력이었다. 식상하고 뻔한 내용을 아주 훌륭하게 포장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그 시대상을 인물들에 수렴해서 보여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작가적 능력이다. 문학성을 담보하는 지표 중 하나랄까.

 

그래서 이 작품을 번역한 손영미는 빅토리아조 후기에서 1차 대전까지의 사회상을 화려하고 정교한 표면 아래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소설이다. 또한 한 번 읽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장면들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베가시킨다.”라고 상찬했다.

 

번역자만 그런 게 아니고 영미 쪽 평론들도 대체로 찬사 일색이다. 그리고 권위있는 문학지나 대학에서 필독서로 지정되어 있다. 진부한 내용의 소설이 이만한 가치를 받을 만한지 의구심이 정도로 필독서 리스트는 찬란하기 그지없다. 아래 추천 목록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어 소설 100

<옵서버>지 선정, 가장 위대한 소설 100

영국 가디언지 선정, 필독 소설 1000

하버드 대학 필독서 100

미국 대학위원회 SAT 추천 도서

피트 박스울, 죽기 전에 읽어야할 1001권의 책

랜덤하우스 선정 20세기 영문소설 100

칼리지 보드 추천 고등학생 필독도서 100

 

무려 하버드 대 필독서 100선에 선정되어 있는 것도 모자라 칼리지 보드 추천 그교생 필독서 100선에 포함되어 있다. 이 식상하고 진부한 불륜 이야기가 말이다. 아무리 그 시대상을 작품에 생생히 반영했다하더라도 그 중심 주제가 불륜인데 고교생 필독서라니 이건 너무하다싶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이리도 높게 평가한 건 영미쪽 시선이 많이 반영된 듯하다. 제국주의를 지나 냉전체제를 이어오며 영미 상류층에 이보다 더 판타스틱한 문학적 데카당스는 없을 듯해서다. 이 시절(187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맹위를 떨쳤으니,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던 때였다.

 

그래서 이 작품의 화자 존 다우얼(억만장자쯤 되는)은 사랑 없이 돈으로 마음에 든 여자를 산 다음 영국으로 이주한다. 거기서(정확히는 독일 온천) 비슷한 부류의 에쉬버넘 부부를 만나 9년 동안 친분을 쌓는데, 이 친분의 세월이 슬픈 이야기라는 거다.

 

슬픈 이야기의 요체는 이렇다. 다우얼의 아내 플로렌스가 자신을 속이고 에드워드와 붙어먹었다는 사실을, 에드워드가 죽은 후 그의 아내 레오노라에게 그 진실의 전모를 전해 듣는 것이다. 이걸 다우얼의 입을 빌려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내용.

 

이 작품은 외형상 전형적인 불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작가 포드 매덕스 포드는 그 자신과 그가 포함된 계층의 아비투스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인물에 구현해 놓았다. 이 소설이 최악인 이유는 포드의 그 유감없이 발휘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작중에서 에드워드 에쉬버넘은 훌륭한 군인으로 그려진다. 키가 크고 금발에 잘생겼으며, 동정심이 많고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대대로 내려오는 부와 권력의 상징인 에쉬버넘 가문의 기둥이다. 여자들이 안 좋아 할 수 없는 요소를 다 갖고 있다.

 

그는 손만 뻗으면 여자들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난봉꾼이 되는 건 아마도 필연적이었을 거다.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여자들에게 그는 항상 휘둘렸다. 잘생기고 튼튼한 육체에 비해 감상적이고 소심한 성격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먹잇감이 됐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순수한(?) 여자들 대부분은 그가 인도에서 주둔했던 때에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이다. 자기 부관의 아내를 사랑했고, 그곳에서 20살도 안 된 메이시 메이단을 만나 사랑하여 영국으로 데려와 자살하게 만들고, 더욱이 에쉬버넘 부부의 양녀로 삼은 낸시까지 사랑하게 된다.

 

에드워드의 정부였던 플로렌스를 제외하고 에쉬버넘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들은 모두 인도 여자들이거나 하녀들이었다. 그리고 그 성적 대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녀들이 죽었을 때 에드워드의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메이시 메이단이 죽은 이유도 그가 플로렌스에게 그녀는 자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말을 들어서였다.

 

보통 제국주의를 풍자한 만평 중 일부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힘있는 군인으로 표현하고 식민지 나라를 여성으로 그려 놓는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보다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 바로 에쉬버넘 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이다. 그를 통해 작가는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소설을 읽고 딱 이 이미지가 떠 올랐다. 물론 태평양 전쟁기에 일본제국주의 만평이지만, 인도에서 에드워드는 메이시와 낸시를 저런식으로 대했을 거 같아서..ㅎㅎ))

 

이 소설이 최악인 이유는 작가의 오리엔탈적 인식에 더해 그 윤리적 인식의 박약함에 있다. 아무리 타이틀을 반어적으로 사용했더라도 전편을 흐르는 에드워드 삶의 궤적을 동경하는 듯한 화자 다우얼의 인식을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존 다우얼은 에드워드 에쉬버넘과 9년 간 친분을 쌓으면서 그의 난봉꾼적 기질을 그가 돈이 많고 감상적이어서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 치부한다. 자기라도 에쉬버넘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서슴없이 결론내린다. 자기 부인하고 바람난 사람에 대한 평가치곤 매우 관대하다.

 

다우얼이 에쉬버넘 부부를 만나 레오노라에게 플로렌스의 악행(?)과 에드워드의 바람기와 낭비벽을 전해들어도 다우얼은 에드워드를 비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감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약점으로 단정짓는다. 다우얼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도 여전하다.

 

물론 여과 없이 이러한 불륜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며 훌륭한 군인이라는 반어법을 사용하여 당시 시대상을 고발하는 비판적 작품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있다(대부분의 평단이 이런 시각이지 않을까)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매덕스 포드라는 사람이 가진 계층적 아비투스를 도저히 좋게 봐 줄 수 없다.

 

이와 같은 작품을 청소년 필독 권장도서로 추천한다는 게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가 그만큼 오리엔탈리즘에 부지불식간에 길들여져서 그런듯하다. 이보다 좋은 작품들은 널리고 널렸다. 모두가 상찬해 마지않는 작품이지만 나는 별로였다. 단언컨대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을만한데 아직까지 이런 평이 없다는 게 신기할 뿐!()

 

 

[]

1. 며칠 전 쿳시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읽고 보니, J.M. 쿳시가 포드 매덕스 포드를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다고. 그래서 그런지 쿳시도 페미니즘 계열에서 좀 비판을 받는 듯하다.

2. 포드 매덕스 포드는 서구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달랑 <훌륭한 군인> 하나만 번역된 듯하다. 그 어떤 다른 작품도 발견하기 어렵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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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8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독서 100선, 을 오래전부터 불신했어요. 이걸 정하는 사람들이 완독하지 않고 정했을 거라고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책을 필독서로 선정해서 말이죠. 그다음부턴 내가 읽고 좋았던 것만 남에게 추천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악행과 불륜이 들어가면 저는 재밌던데... ㅋ 님의 리뷰를 읽어 봐도 재밌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점수는 짜게 주셨지만요...ㅋㅋ

yamoo 2023-05-19 09:37   좋아요 1 | URL
저도 필독서 100선 별로 신뢰하진 않습니다만..
타임지 선정 100선, 하버드 필독서 100선..뭐, 이런 추천리스트는 독서 활동 실체를 떠나 세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비밀독서단 선정 책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양서에 비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죠. 유진 오닐의 밤의로의 긴 여로가 뭐가 그리 대단한지 지금도 도통 모르겠습니다. 물론 톨스토이의 부활같은 책들은 정말 충분히 그 위대함에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만...그렇지 않은 책들 때문에 불신이 쌓인다는..^^;;

악행과 불륜...프롯이 재미있고 드라마틱하게 짜인 소설이라면 확실히 재밌다고 느낍니다. 가독성도 뛰어나고...근데 포드의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읽어보셔야 알 거에요~~그런 면에서 페크님은 이 책을 한 번은 일독하셔야할 듯합니다..ㅎㅎ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 - 본업도 있고, 부캐도 있고 자기만의 방
최재원 지음, 김현주 그림 / 휴머니스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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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N잡러가 대세인가 보다. 한승현의 <이번 생은 N잡러>(매경,2021)의 성공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을 해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그런가 보다. 쉽게 생각해도 인기 유튜버만 되어도 직장을 다닐 필요없이 유투브 제작에만 몰빵해도 수천만원의 수익이 생기니 말이다.


그래서 비슷한 부류의 책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한승현의 책보다 나은 책은 못봤다. 거의가 내용없는 자기 커리어 쌓기로 내놓은 책들인거 같아서다. 특히 최재원의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휴머니스트, 2020)는 이런 부류의 책들 중 최악이었다.


왜냐? 이 책은 사이드 프로젝트의 실천 방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반은 '준비'에 할당되어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는 식이다. 중고교생 대상이라면 뭐 그럴 수 있다. 근데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인 생업전선에서 마음 가짐에 대한 장황한 서술은 그냥 지면 채우기용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물론 주된 업을 가진 사람이 부업, 즉 사이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N잡러를 꿈꾸는 사람들은 실제 주된 업 외에 부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게 수입으로 연결되지 않아서가 문데다. 그래서 부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이미 '준비'는 끝난 상태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타겟을 아무 준비 없는 평범한 직장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로 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은 있을지언정 전혀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주위에 널렸다). 물론 찾아 보기는 한다. 그런 사람을 위해 '준비'의 중요성을 역설하려면 책의 1/5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의 청소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자계서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주구장창 나열한다. 책의 반이 그런식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이건 습관의 문제이고 개인 의지의 영역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언급과 그 사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준비를 하면 실천방안이 나와야하는데, 그 실천 방안이 잘 와 닿지 않는다. 이 책의 3장은(stage3)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나오는 단계인데, 목차를 보자.

나보다 상황을 믿자 : 시간

나보다 상황을 믿자 : 공간

나보다 상황을 믿자 : 사람

기록X기록


이건 뭐, 실천을 하는데 시간, 공간, 사람을 믿자니 믿음이 가지 않는 콘테츠다. 이런 류의 책은 실천 방안을 알려주는 것이 핵심인데, 그 핵심이 뭔가를 믿는 거다. '상황을 믿자 : 시간'의 절이 시작되는 90 페이지를 보면 이 책의 성격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막상 사이드 포르젝트를 시작했으나, 금세 불꽃이 꺼지려 합니다. 의지가 매우 굳은 사람들은 시작과 동시에 계획대로 모모을 움직일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자기 비난에 빠지진 말아요. 대신 꼭 지키고 싶은 약속이나 해내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사람보다 상황을 믿어보세요. 


나를 더 강하게 묶어둘 상황을 위해 '지그재그 몰입' 방식을 추천합니다. 지그재그 몰입은 본업을 할 땐 본업을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땐 사이드 프로젝트에만 완전히 집중하는 방식이에요. 하루 중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일주일 이면 일주일 (중략) 사이드 프로젝트에만 집중할 시간을 만듭니다. (p90)



지금 위에 인용한 부분과 같은 내용들이 거의 모든 페이지를 점령하고 있다. '지그재그 몰입' 방식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부업을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하고 있는 방식이다. 중요한건 어느 비중으로 하느냐가 중요한데, 이 책에는 이런 구체적인 얘기가 빠져있다. 


기록의 중요성도 하나마나한 얘기다. 내가 수익을 내기 위해서 다른 부업을 시작한다면 기획을 하고 예산을 구상하며 내 시간 투자를 얼마나 하고 어떻게 내 산물을 팔려고 하는지 꼼꼼히 기록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런 걸 구체적으로 잘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산출물만 있고 이걸 수익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거다.


보통 'N잡러'를 위한 이런 류의 책은 기획에서 수익창출까지 자기가 어떻게 기록했는지 알려주는 게 들어 있어야한다. 그래야 구매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 있는 책은 구매할 가치가 전혀 없다. 자게서 본연의 역할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행 관련 일을 좋아해서 게스트룸에서 외국인과 수다를 떨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나보다. 그래서 지인의 조언을 따라 유튜브 채널을 열어 수익을 올리게 됐나보다. 그래서 본업 외에 수익을 창출한 기회를 얻어 이런 책도 썼나본데, 도대체 왜 유튜브를 통한 수익창출의 방법이 없는지 의아하다. '기록'을 강조한 장에서 이미 언급됐어야 했는데 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한승현의 책보다도 먼저 출간된 책인데, 저자가 구체적인 사례나 방법이 전무한 책을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내놓은 용기가 정말 가상하다. 자기가 부업을 통해 수익을 낸 방법이 쏙 빠진 책은 믿음이 가지 않는 책이다. 더욱이 하나마나 한 소리로 페이지를 채우는 내용은 함량 미달 그 자체다. 이런 책이 휴머니스트라는 지명도 있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게 신기할 뿐.



[덧]

1. 나도 내 그림으로 뭔가를 해 보기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이런 류의 책을 주섬 주섬 사서 읽는다.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의 책들은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최재원의 책도 그래서 읽게 됐다.

2. 한승현의 <이번 생은 N잡러>를 보고 난 후에 몇 권의 책을 사서 보았는데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는 그 와중에 본 책이다. 한승현의 책과 비교해 보니 너무 함량미달인 책이라 구매하지 말라는 의미로 여기 리뷰로 남겨 놓는다. 이 외에 몇 권의 책이 더 있는데 다른 책들도 대동소이했다. 한승현처럼 구체적으로 뭔가를 제시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부업이 필요하고 부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싶으신 분들은 한승현의 책을 보시라. 최재원의 책은 절대 사지 마시라. 그냥 시간 낭비 돈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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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8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23-03-20 09:31   좋아요 0 | URL
그림도 있고 페이지 수도 많고...그런데 내용이 없고...하나마나한 얘기를 반이 넘는 분량으로 채우고 있는 책은 정말 독자를 우롱하는 책인듯합니다.

이런 류의 책, 그니까 내용없는 책들이 많은데 비판적 리뷰가 알라딘에 별로 없는게 참으로 거시기합니다~^^::
 
신의 아이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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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런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책을 완독하고 생각을 거듭하며 곱씹어 봤지만 결론은 하나다. 작가를 가리고 블라인드로 독자의 반응을 물으면, 단번에 매우 안 좋은 소설이라는 평을 들을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체로 코맥 매카시 소설은 읽을수록 당황스럽다. 치명적인 문장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는 있지만, 다 읽고 나면 도무지 주제의식을 찾을 수 없다. 항상 물음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는 바가 뭘까?


매카시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 출발은 <로드>였다. 그래도 로드는 가독성 하나는 끝내줬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좋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물음표는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희석시키는 뭔가가 컸다.


'그 뭔가'는 콕 집어서 표현할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작가가 캐릭터를 통해 구축하는 분위기랄 수 있다.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심리적 긴장감과 공포감을 조장하는 사건은 시적인 문장과 만나 매카시 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매카시가 만들어내는 묘사는 소설이 구축할 수 있는 미학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아니 하나가 더 있긴 하다. 그가 창조해 내는 캐릭터. 코맥 매카시는 캐릭터를 설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범죄성을 부여하는 데 따라올 작가가 없다. 매우 사악한 주인공들을 매우 덤덤하게 잘도 그린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을 읽어가면서 미궁에 빠져들지만 강력한 캐릭터와 그 치명적인 문장들로 인해 끝까지 읽게된다. 이 작가가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읽고 나서 아우라 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물론 내 얘기다.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카운슬러> 등을 보고 코맥 매카시를 계속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든 책이 <신의 아이>다. <카운슬러>가 꽤 좋았기에 이 작품 역시 괜찮으면 나머지 주저 3권을 모조리 읽을 계획이었다.


헌데, 책을 덮고 나니 매카시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내가 읽었던 매카시 작품 모두 딱 부러진 작가의 주제의식이 없었다. 매카시는 작품에서 범죄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걸로 끝이다.


평론가들은 성경적 상징을 들먹이며 매카시의 작품들을 찬양하기 바쁜데, 매카시라는 작가를 제거하고 작품만 판단한다면 결코 좋은 평가를 못 얻을 거라 확신한다. 블라인드 평가를 내린다면 작가적 후광효과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작품을 읽고 남는 건, 캐릭터와 치명적인 문장밖에 없다. 좋은 소설 작품은 일단 재미있는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확고한 주제의식, 더군다나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드러낸다면 명작이라 칭할만하다.


물론 전통적인 소설기법을 파괴하고, '아,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하는 작품도 있다. 대표적인 작가가 파스칼 키냐르와 조르주 페렉 정도. 꽤 매력적인 작가들이다. 전형적인 소설기법을 탈피했다고 하더라도 주제의식의 선명하거나 이야기가 신선하면 그게 바로 멋진 작품이다.


그런데 <신의 아이>는 살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레스터 밸러드이다. 27세의 부랑아. 그가 하는 일이란 숲속을 배회하면서 음식을 훔치고 라이플 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전부다. 


여자를 죽여 시간을 하고, 아무 이유없이 사람에게 총을 쏘아 죽인다. 진짜 아무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체들을 인적없는 산의 동굴에 고히 모셔둔다. 살인의 흔적과 의심의 흔적을 을 싹 없애버린다.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잘도한다.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살면서 그가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동기와 정당성은 없다. 결코 없다. 처음 시작할 때 그 지역 부동산 관계자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나는 밸러드가 그들에게 땅의 이름으로 복수를 하는 내용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 전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레스터 밸러드의 기이한 성격과 범죄 행위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밸러드의 범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뭘까? 원죄의식? 자본주의에 대한 폭력적 항거? 미국 사회의 만연된 범죄행위? 무얼갖다 붙여도 납득할 수 있는 주제의식은 없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답은 오로지 하나다. 그냥 캐릭터 습작하기. 이 소설은 매카시의 3번째 장편소설이란다. 40세에 발표된 작품.  그래서 그런지 <로드>보다 문장의 아우라가 떨어진다.


뭐, 주제의식이 박약해도 이야기만 좋으면 읽는 맛이라도 난다. 헌데 이야기는 없고 캐릭터만 있으며, 개연성 없는 시간(시체와 성교), 살인, 절도로 점철되는 사건들이 그냥 나열되는 수준이라면 좋은 소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소설의 주된 목적이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라면 <신의 아이>는 완벽히 실패한 작품이다. 벨러드가 '신의 아이'로서 우리와 같은 부류라는 개소리는 하지 말자. 밸러드를 통해 교훈을 줄 수 있는 주제의식은 단언컨대 없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을 총평하자. 캐릭터만 부각된 작품은 이야기와 감동을 압살한다!



[덧]

1. 이 작품의 역자는 정영목이다. 꽤 많은 영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이 사람이 진짜 통번역 대학원에서 번역을 가르치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심하게 든다. 읽다가 페이지를 다시 읽는 우를 매번 겪게 되는데, 이게 독자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자가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게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아주 단적인 예를 적시해 둔다.


그날 밤 내내 그는 소유물을 날랐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그가 산패하고 곰팡이가 핀 마지막 시체를 구덩이 벽을 통해 끄려 내렸을 때는 동쪽에서 울고 있는 하늘의 옅은 회색 띠에 날빛이 이미 구멍을 냈다.  (p192)


동쪽에서 울고 있는 게 하늘인가 회색 띠인가? 문장이 길어지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을수록 문장의 애매성은 높아진다. 시체를 형용하는 '산패하고 곰팡이간 핀'은 애교수준이다. 물론 코맥 매카시의 문장이 악명높기로 소문났고, 길게 쓰는 그의 문장 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님을 알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런 문장들을 문학에서 보는 건 창피한 일이다.


2. 정영목은 이 소설에서 아주 희귀한 단어를 골라서 잘도 번역했다. 도무지 일상에서 그리고 문어에서 전혀 쓰지 않는 단어들을 아주 잘도 찾아 번역했는데, 이런 단어 역시 가독성을 막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도 '산패'가 그런단어다. 헌데 이 책에는 아주 어려운 단어들이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3. 코맥 매카시가 미국 현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임은 틀림없다. 그의 국경3부작을 읽지도 않은 채 주제의식이 없다, 안 좋은 소설이다..라는 개인적 감상을 떠벌리는 것이 같잖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나는 고백한다>와 같은 소설과 비교하면 소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 상대적으로 너무 부족해 보인다. 물론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고, 소설이 꼭 주제의식을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가 밸러드를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여 매우 실망했다. 요즘 읽은 작품들이 재미면에서 그리고 그걸 주제로 드러내는 방식에서 매우 탁월했기에 <신의 아이>의 단점(주제를 구현하는 방식과 재미)이 더 도드라졌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읽을 사람들은 뭐 개의치 않겠지. 이런 리뷰는 개소리라고 욕하고 열심히 매카시의 작품을 읽으시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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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01-02 2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의 작품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는데, 영화는 두 편이나 봤네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마 3번 정도 본 영화이고,
[카운슬러]는 오래전에 보긴 했는데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네요.
소설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긴 합니다.
이 책 말고 영화로 봤던 저 두 개를 나중에 구해봐야겠어요.

번역의 문제는 정말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남죠.
제 주위에 번역자가 많아서 더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예전에 편집했던 번역서의 번역자는 정말 너무 엉망인 초고로 저를 질리게 만들었구요.
그 책은 제가 다시 원서를 찾아보면서 글을 새로 쓰느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했어요.

yamoo 2023-01-04 07:14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를 두 편 보고 원작을 찾아 읽은 다음 국경3부작을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그의 첫 희곡작품인 <카운슬러>가 꽤 만족스러웠기에 <신의 아이>를 보고 더 볼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든 책이었습니다. 이 작가의 박약한 주제의식 때문에 읽고 나서 불만스러운 부분이 좀 있는지라 그것이 뭔지 확실히 알아야 겠기에...

물론 소설에서 주제의식을 꼭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부류가 있지만, 저는 그런 소설이 좋은 건지는 잘 몰르겠습니다. 뭐든지 작가가 작품으로부터 전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기에 작품에 주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거로 생각되어 읽을 가치를 못느낍니다. 특히 소설은 더 그래요. 근데 매카시의 작품들은 다 괜찮은데, 작가가 작품들을 통해 뭘 말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인물의 기행과 범죄사실을 계속 나열만하는 게 좋은 소설인지 심각히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결론은 아니라는 거고요...그래서 내 소설 성향이 어떤지 확실히 알게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ㅎㅎ

stella.K 2023-01-03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악마적인 소설은 못 읽을 것 같네요.
이제 똑똑한 독자들은 많아져서 누가 좋은 번역잔지 아닌지
다 압니다. 자꾸 야무님처럼 집요하게 지적해야 번역자들도 정신 차리고
번역을 잘 해 주겠죠. 자기네들도 옛날에 번역한 책 못 봐주겠다고
죽겠다고 난리칠텐데. 어따대고 독자더러 읽으라는 소린지. ㅉ

yamoo 2023-01-04 07:17   좋아요 1 | URL
악마적인 소설이라...뭐, 그렇게 악마적인 내용은 많이 없어요. 매카시는 죽이는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인물의 악행이 동기 없이 나열되는 이유를 찾지 못해 불만인 거구요..ㅎ

전체적인 번역은 슥슥 읽을 수 없는 정도 입니다. 매우 생소한 단어들을 번역어로 택해서 이 단어가 뭘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읽기를 방해할 정도에요. 분명히 더 쉬운 명사로 대체해도 될텐데...

영화로 작품화된 두 작품 정도 읽어보시고 판단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물감 2023-01-10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드 하나 읽었지만 저도 잘 모르겠는 작가입니다. 로드도 별 두갠가 줬을거에요. 왜들 그리 난리인건지 이해는 안가요...

yamoo 2023-01-11 12:00   좋아요 1 | URL
<로드>는 그나마 <신의 아이>보단 나아요. 치명적인 문장들로 인해 가독성은 꽤 좋아요. 근데, 읽고 나면 주제가 뭔지 몰겠어요. 그냥 끊임없이 길을 걷다 사건을 만나는 게 다에요...저도 왜 세익스피어와 견주는 지 도통 몰겠습니다!ㅎㅎ

2023-10-26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핏빛 자오선> 추천드립니다. 저는 정말정말 감탄하면서 읽었어요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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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한 달 내내 잡고 있었다. 토론 주제 도서라서 팽개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기에 매우 곤혼스러웠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됐기 때문이다. 처음 일독했을 때, ‘헛소리의 성찬으로 가득 찬 정치이론서’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각 장을 3번씩 읽으니 어느 정도 논점이 잡혔는데,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봐도 역시나였다. 책의 결점이 매우 도드라졌다. 마지막에 대항제국을 말하면서, 운동의 바람직한 모델로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용두사미의 백미랄까.

 

 

헌데 이 책이 좋다고 하고, 심지어 ‘재밌다’고까지 하는 분들을 여럿 보았다. 알라딘 리뷰도 좋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번역도 좋지 않은데(비문이 넘친다) 말이다. 아래는 이 책이 왜 별루인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비판이다. 엉성한 비판일 수 있지만, <제국>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적 리뷰가 별로 없는 것 같아 리뷰로 남겨놓기로 한다.

 

 

1. 내재성(주체성 및 자발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 결여

 

 

네그리와 하트는 현재의 정치적 구성을 ‘제국’이라 명명하면서,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주권의 이행과 생산의 이행으로 나눠서 고찰하고 있다. 이 이행에서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대중’이다. 이들이 말하는 ‘대중’은 19세기 제국주의를 거쳐 자본주의 시대에서 말하는 대중이 아니다. 제국을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된다.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의 지형으로 바꾸어 놓는 동인이 바로 대중의 존재이다.

 

 

현재 미국의 대중은 이전 시대의 대중과 구분되는 가장 특별한 지점이 있다. 네그리는 이를 내재성으로 보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푸코와 들뢰즈의 개념을 전유하면서 내재성을 생체 정치와 연결하여 논의를 심화시킨다. 훈육 통치, 전 지구적 통제, 제국 주권, 세계 공간, 가상성 등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면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내재성(스피노자의 개념으로부터 도출)에 대한 개념에 있다.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내재성에 대한 개념 풀이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어떠한 것도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 속에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내재성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내재성은 초월성과 대립한다.”

 

 

이 개념을 좀 더 쉽게 바꾸어 보면 이럴 것이다. 기준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헌데 이것의 핵심은 주체의 자유에 있다. 내재성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내재성에 기초한 자발적 행위는 자유로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헌데 네그리는 개체를 특징짓는 이 내재성의 개념을 집단으로 확대하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자율’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유럽의 근대성으로부터 제국 주권을 도출해 내고, ‘대중의 역능에 기초한 저항운동’을 논의하면서도 ‘집단의 내재성’의 근간이 되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고찰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이 책의 맹점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네그리는 제1부 3장 [업적의 존재론적 드라마(p83)]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p100)]에서 정치적 담론을 존재론적 근거로 분석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논의는 이후 ‘내재성’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존재와 실존을 논하면서도 이를 내재성의 개념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결함이다.

 

 

헌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다. 책을 재독 삼독 하다 보니, (아마도 이는 매우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네그리가 ‘초월성’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내재성’을 아주 소박하게 상정하면서 초래된 문제인듯하다.

 

 

2. 지나친 이분법적 도식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저자들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주권의 이행과 생산의 이행으로 나눈다. 이런 도식은 이 책의 기획의도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 책의 근간으로 사용한다고 말해 놓았기 때문. 마르크스가 사회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나눠 분석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사회의 상부구조인 정치(주권)와 하부구조인 생산의 영역을 분리해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크스가 기획했던 정치(상부구조)와 경제(하부구조)가 탈현대라고 부르는 현재에는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섞여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부구조라는 것이 노동의 생산 양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현재 현대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중추적 쟁점으로 ‘경제’ 분야에 포섭된지 오래다.] 정치와 경제는 한 나라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정도로 상호 침투하고 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기 보다는, 상하부 구조가 뒤섞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는 게 적절할 듯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분석 방법이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제2부 ‘주권의 이행’과 제3부 ‘생산의 이행’이 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의 논의를 읽고 3부로 넘어가면 제국주의의 한계와 훈육 통치의 논의가 이어진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당연히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의 이행이 생산의 이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염두에 두고 읽어 갈 것이다. 헌데 아무리 읽어도 그 관계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없다. 참으로 불친절하다 못해 논리적 치밀함이 떨어지는 엉성한 책이 아닐 수 없다.

 

 

3. 국민국가는 죽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적 상황에서 국민국가는 종말을 고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따른 결론이다. 세계는 결코 미국을 중심으로 외부화가 없어지는 ‘제국’이 아니다. 브랙시트 사태만 보더라도 각 국가는 아직까지 국민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암암리에 내재해 있다. 세계경제가 빠르게 통합되고 블록화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지향하는 나라들이 많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사태나 남북이 대치된 우리나라의 상황만 떠올려 봐도 충분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제국>에서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은 나라다. 우선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민족주의가 회자되는 나라다. 우리나라의 시간은 일제대의 망령에서 아직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화두가 되는 나라,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여전히 이념적 대립이 심각한 나라, 1953년의 상흔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나라, 이런 국가가 한국이다. 이 나라는 아직도 강력한 국민국가의 나라이다.

 

 

이런 국민국가의 강력한 지표중 하나가 북한의 핵을 둘러싼 6자회담이다. 6자 회담은 북한의 핵 억제를 위해 미국을 위시한 6개 국가가 참여한 국제 회담이다. 회담에 참여한 국가마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자 회담은 국가의 이익이 전면에 드러나는 국제외교의 장이기 때문이다. 제국적 상황의 갈등이라고 보기엔 ‘국민국가’의 존재감이 너무도 뚜렷하다. 책의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제국은 외부를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제시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강조하기 위한 흐름일 뿐 실제의 세계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매우 반갑게도 나의 이런 비판을 조금 더 세련되게 잘 지적한 책이 있어 그 부분을 첨부한다. 이 글을 보고 구미가 당기시는 분들은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가라티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같은 지점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적이다.

 

 

엘렌 M. 위드는 네그리와 하트를 비판하며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글로벌한 자본주의에 있어서 국민국가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정치적 형태는 글로벌한 국가가 아니라 복수 국가의 글로벌한 시스템이다. 지구 규모로까지 팽창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권력과 국가의 영토 내에서 이런 권력을 뒷받침하는 경제 외적인 힘 사이에는 복잡하고 모순된 관계가 구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관계로부터 새로운 제국주의의 고유한 모습이 탄생했던 것이다.” (P400)

 

 

4. 휘황찬란한 개념의 향연

 

 

저자들은 제국의 개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일차적으로 이론적 접근을 요구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천명한다. 그래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비롯해 푸코와 들뢰즈의 개념을 상당히 전유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을 ‘제국’으로 재설정하기 위해 책 전체에 걸쳐 ‘정치 이론화’에 매진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이론화를 위해 상징과 비유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논증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 넘친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에 대한 논증이 전혀 없다. 독자층이 안다는 전제하에 철학적 이론을 비유와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문학적 개념화를 시도한다. 그래서 무소불휘한 개념의 잔치 속을 헤매다 보면 논점이 흐려져 선언의 정당성이 떨어져 보인다.

 

 

네그리와 하트가 이 책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도식화하고 있는 개념들을 거들떠보자. 정말이지 휘황찬란하다. ‘생체성’, ‘가상성’, ‘생체 권력 및 생체 정치’, ‘매끄러운 세계’, ‘전지구적인 홈패임’, ‘산노동’, 선험적 장치, ‘주권 기계’, ‘잡종적 구성’, ‘배열 장치’, ‘착취의 무-장소’, ‘훈육 사회’, ‘비물질적 노동’, ‘구성의 스펙터클’, ‘자본의 공리계’, ‘업적/기계’, ‘재전유권’ 등은 모두 이론을 위한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전혀 ‘현실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지 않기에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이를 보면 네그리와 하트는 베르그손이 비판했던 관념연합론자들의 사고와 비슷한 면이 많은 듯하다.) 아래 인용문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점들이다. (도처에 산재해 있지만 분량 상 아주 일부만 인용한다.)

 

 

“부패는 언어적 소통 감각의 도착 속에서 나타난다.” (p495)

→ 언어적 소통 감각의 도착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얼까? 부패가 그런 속에서 나타난다니, 현실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앞부분에 약간 부연되긴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사건 추이들이 자신들의 시간성을 가속화할 때, 제국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사건 추이들에 개입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워진다.” (p101)

→ ‘사건 추이들의 시간성을 가속화한다’는 말이 도대체 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더군다나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사건 추이들’에 개입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니. 예측할 수 없으니 당연히 개입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거다.

 

 

"인본주의적인 주체성 원리에 의해 개방되었던 잠재성의 영역은 초월적인 규칙 및 질서의 부과에 의해 선척적으로 제한된다." (p124)

→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의 상징성과 비유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해가 불가능한 진술이라는 거.

 

 

“오늘날 역사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역사성만이 존재한다.” (p471)

→ 도대체 ‘역사성’이 역사와 어떻게 다른 개념인지 전혀 설명이 없다.

 

 

책 461 쪽에는 “소통적 에테르”란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을 보면 소통이 에테르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헌데, 이후 내용을 보면 저자들은 에테르를 소통으로 통용하고 있다. ‘에테르’가 무얼 의미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물론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이론화’를 위한 도구상자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기여하고 싶은 것은 제국을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제국 안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위한 일반적인 틀과 개념들의 도구상자이다.(p21)” 그래서 현실의 시간을 담아내는 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실의 정치와 사회를 학제적으로 분석하려는 야심찬 의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론을 위한 이론에 그친 점이 매우 아쉬운 지점이다.

 

 

[덧]

1. 사실, 알 수 없는 개념적 표현이 너무 많아 아주 일부분만 언급해 봤다. 이런 상징과 비유들이 엄청난 비문들과 섞이니 읽기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번역가가 사용하는 개념의 조어나 문장이 한국어의 문법을 완전히 초월해 있다. 그러다 보니 환상적인 보그-병신체의 괴작이 탄생한 듯하다.

2.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책의 타겟은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이 아닌지. 세계체제론은 낡았고, 이를 대체할 이론적 구상으로 ‘제국’을 설정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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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31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이 인용한 책의 문장만 봐도 내용이 어려워 보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야겠어요. ^^;;

yamoo 2017-06-08 20:22   좋아요 0 | URL
개정판이 나오기 매우 힘들거 같아요. 이 책은 딱 읽을만한 수준의 데드라인을 충족시켜주는 책이라 개정되어도 별반 차이점이 없을 거 같아요. 단지, 각주만 자세히 달아줬으면 좋겠습니다~

oren 2017-05-3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저자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yamoo 님 말씀마따나 ‘극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임엔 틀림없는 듯합니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저는 ‘극도의 철학‘을 언급한 몽테뉴의 말이 떠오릅니다. 물론 ‘뉘앙스‘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요.

* * *

극도의 철학

과녁 너머로 활을 쏘는 자는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는 자와 똑같이 실패한다. 눈은 캄캄한 속으로 내려가는 때나 너무 밝은 빛 속에 나가는 때나 똑같이 혼란을 느낀다. 플라톤에 나오는 칼리클레스는 극도의 철학은 해롭다고 하며, 이익이 있는 정도를 넘어서 거기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철학을 절도 있게 대하면 유쾌하고 유익하지만, 마침내는 사람을 황당하고 악덕스럽게 만들고, 일반의 종교와 법률을 경멸하고, 사람들과의 교섭을 회피하며, 인간적인 해학을 적대시하고, 모든 정치적 사건의 처리나 남을 도와주는 일이나, 자기를 지키는 일도 불가능하게 되며, 빰을 얻어맞아도 대항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철학이 과도하고 지나치게 풍부하면 우리의 타고난 자유를 속박하며,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오히려 자연이 우리에게 그어 준 좋고 탄탄한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yamoo 2017-06-08 20:26   좋아요 1 | URL
한국어 문법을 아주 우습게 초월하고 있어, 문맥을 이해하기 매우 힘듭니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도 애매하고 이해하기 힘든데, 그걸 아주 이상한 문장으로 바꾸어 번역했으니 읽기 힘들지요. 인용해주신 극도의 철학과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제국>은 읽지 않는 게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stella.K 2017-05-31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야무님 보면 느끼는 거지만 참 존경스러워요. 저는 이런 책 리뷰 못하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쓰면 남는 게 있잖아요.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 어쩔 수 없이 리뷰를 해야 하는데 이벤트 도서라. 그림 많고 글 별로 없는 책이라 편하게 읽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남는 게 없어요. 뭘 갖고 리뷰를 해야할지 대략난감 입니다.ㅠ

yamoo 2017-06-08 20:29   좋아요 0 | URL
만약 리뷰도서로 이 책을 받았으면 참으로 난감해 했을 거라 사료됩니다. 1번 읽고는 이해하기 매우 힘들거든요~ 이런 책은 읽지 않고 리뷰를 쓰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더 로드>가 매우 리뷰쓰기 힘들었습니다. 만약 리뷰써야 하는 도서로 받았다면 대략 난감해 했을 겁니다. 읽기는 편하게 읽고 매우 의미싱장하게 읽었습니다만...스텔라 님께서 느끼시는 그 지점을 저는 <더 로드>를 읽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읽었어도 리뷰를 못셨지요.ㅎ
 
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1

 

 

지난 주 토요일,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 든 책이 <해변빌라>. 독특한 제목에 끌린 것이 사실이다. 분량 작은 책을 찾고 있었기에 걸려들었을 수도 있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었으니. 읽은 후에 참으로 이상한 책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그 흔한 갈등도 없는 밋밋한 내용에 많은 실망을 하고 말았다. 10여 년 전 읽었던 <엄마의 집>에 실망하여 더 이상 한국 문학 작품을 읽지 않게 된 기억이 새록새록 났기에.

 

 

더 이상 전경린 작가 작품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작가가 그리는 작품들 속 인물들이 하나 같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을 안고 있는 여성들로 그려지고, 그녀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언제나 위험하다. 처음에는 무도덕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작가에 매력을 느꼈지만, 언제나 결핍을 매우려는 사랑 타령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전경린 작가와 더불어 나의 한국 문학 읽기는 끝나버렸다.

 

 

물론 전경린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가독성은 있다.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문체는 꽤 치명적이니까. 그래서 꽤 많은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었더랬다. 이 소설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이상하게도 별 내용이 없기에,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좀처럼 읽지 않는 ‘작가의 말’ 부분을 읽어야 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해와 착각과 환상과 거짓과 허구와 진실의 충돌 사이에서, 타인의 이야기든 나의 이야기든 싫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야기의 허무 위에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급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223p)

 

 

하! 정황만 있을 뿐, 갈등도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니! 하지만 “허무 위에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저 말로부터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을 처음 읽고 든 생각이 ‘부유(浮游)하는 인물들의 허무’였기에. 재독, 삼독 하면서 밑줄들은 늘어갔다. 하지만 이에 더해 작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내 생각의 편린도 같이 늘어가기만 했다.

 

 

2

 

 

“세포는 수생식물처럼 물 위에 떠 있단다. 생명은 유동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멈추어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죽음에 너무나 익숙하고 동시에 재생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도 불안정한 것이다.” (p 25)

 

 

생물교사인 이사경이 즐겨 쓴 말인데, 어린 유지의 몸은 이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이 반응했을 정도로 이 말은 유지의 무의식 속에 각인됐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윤유지였다가 하루아침에 손유지가 된 그녀는, 이 충격으로 학창시절 줄곧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성장한 유지는 연인 오휘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휘 어머니의 훼방으로 헤어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이사경의 집에서 백주희의 손자인 아기를 돌보며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생활한다.

 

 

이사경과 친분이 있는 편 사장. 바닷가 폐해수욕장에서 ‘해변의 가능성’이라는 카페를 운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매력적인 해영을 연인으로 두고 있지만,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편 사장은 산 위의 알코올중독치료센터에서 내려온 진수를 거두어 카페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와 해영은 눈이 맞아 편 사장의 돈을 갖고 도망간다. 편 사장은 마음이 아프지만, 돈으로 해영을 붙들어 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이렇듯 바닷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더 멀어지지도 않은 채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유지와 고모부, 이사경과 유지, 유지와 이린, 이사경과 백주희 등은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다. 소설의 커플들은 이 관계보다 못하다. 유지와 오휘, 편 사장과 해영, 진수와 상희(알코올중독치료 센터 커플) 모두는 사랑에 실패한다. 패잔병처럼 바닷가 주위를 떠돌 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부유하는 관계를 보면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많이 우울했다. 요즘 우리들은 수많은 모임과 일적으로 엮인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흉금을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없어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우리 각자는 부유하는 삶으로 더욱 고독하게 된 듯하다.

 

 

결국 쓸쓸히 홀로 죽는 고독사가 우리들 삶의 종착역일까. 그래서 소설 속 유지가 떠올리는 노부인(이사경 어머니)의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 상대를 못 만나면 남자는 바람처럼 들판을 떠돌다가 덧없이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거다. 여자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흩어지는 거지……” (p 90)

 

 

3

 

 

작가 전경린은 단언하는 것 같다. 제 남자를 알아보고, 제 여자를 알아볼 줄 아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들은 모두 부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소설 속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라면, 결국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삶의 수면 위를 빙빙 돌며 (……) 자신마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듯 초월적으로 떠 있(p 205)”게 된다고.

 

 

참으로 진부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종착역은 일부 예견되어 있다. 각자 부유하는 삶을 살다가 쓸쓸히 고독사 하는 것. 이를 막는 유일한 한 가지가 남녀의 사랑이라니, 어찌 진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노부인의 말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래, 늙고 실연을 당해도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는 슬쩍 마지막에 복사가게 노인과 신상희 그리고 유지와 연조의 관계를 설정해 놓은 듯하다. 늙었다고, 실연당했었다고 사랑할 능력을 잃은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실망스럽다. 참신하지 않아서다. ‘전경린식 사랑타령’의 새로운 버전처럼 느껴지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해영에 실연당한 편 사장의 입을 빌어 전경린이 전하는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돈다.

 

 

“그러면서 왜 사랑을 (계속) 하느냐고요?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왜 하고 또 하느냐고요? 허영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외에 무엇이 있지요? 먹는 것, 입는 것, 꿈도 없는 수면, 걷기, 살랑이는 바람, 햇살, 온갖 향기, 미소, 하지만 타인의 살갖을 파고드는 사랑보다 더 강렬한 행복감은 없어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난 중독자이지요. 하지만 그 동작이야말로 삶에서 최고가 아닌가요? 그 외엔 아무리 미화해도 일과 온갖 관계와 생활이란, 그저 인생의 노동일 뿐이니까요.” (p 187)

 

 

그녀의 작가 의식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사랑이외의 모든 것은 ‘인생의 노동일 뿐’이라고 여전히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헬조선의) 현실을 도외시한 감상적 사랑타령으로 인생의 가치를 말한다는 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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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 님, 그동안 너무 격조하셨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

yamoo 2017-05-08 14:34   좋아요 0 | URL
네..좀 격조했습니다.^^; 탁구를 열나게 치느라 서재질을 거의 못했네요.ㅎ 덕분에 건강은 좋아졌습니다만 점차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 탁구를 그만 두기로 했슴돠~ㅎㅎ 무탈했다 봐야죠^^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oren 2017-05-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이 앞서네요, yamoo 님이 이렇게 나타나시다니~

yamoo 2017-05-08 14:35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고 기쁘군요! 격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탁구도 그만뒀으니 종종 출몰하겠습니다.ㅎㅎ

cyrus 2017-05-0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

yamoo 2017-05-08 14:37   좋아요 0 | URL
저두 오랜만이어요. 탁구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네욤.ㅎㅎ
사이러스 님은 여전히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종종 출몰하겠슴다~^^

stella.K 2017-05-0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리뷰를 쓰시다니...!
저완 아직 인연이 없는 작가이긴 하지만 전경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문체의 독특함, 치명적인 뭐 그런 걸 제일로 치긴 하던데
어떤 작가든 전작을 하다보면 비슷한 구조나 패턴을 보이긴 하죠.
저는 읽지 않은 고전이 너무 많아 앞으로 전경린을 읽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암튼 오랜만입니다. 뭐하며 지내십니까?^^

yamoo 2017-05-08 14:43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스텔라님^^
탁구치며 지냈어요. 탁구만치니시간가는줄 모르고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
그래서 다시 컴백했어욤^^

전경린 작가를 읽지 않으셨다면 ‘검은설탕이 녹는 동안‘ 한 권 읽어보세요.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스텔라 님에게 강추드려요~^^

수다맨 2017-06-10 0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0년대를 풍미했던 몇몇 여성 작가들(전경린, 신경숙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자의식만 충만한,‘문장 세공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중독성 강한 문장을 짓는 솜씨는 우수한데 그 이상의 역량과 재능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저만한 작가들에게 상을 안겨주고 문학적 거목으로 만들어준 그 당시(그리고 오늘)의 비평계도 문제가 얼마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amoo 2017-06-11 21:25   좋아요 0 | URL
‘문장 세공사‘라는 멋진 표현을 배웁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의 저자들 작품들을 보면 ˝중독성 강한 문장을 짓는 솜씨는 우수한데 그 이상의 역량과 재능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문학은 비평계가 문제의 7할 이상은 제공했다고 여겨집니다. 어제와 오늘 바사니의 <금테안경>을 읽었는데...제가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자명하더라구요. 필립 로스의 <에프리맨> 같은 책을 읽다가 김애란 작가의 책을 잡으면 그냥 던져버리게 됩니다. 시간은 짧고 좋은 책을 읽은 시간은 더더욱 짧으니까요.

좋은 댓글로 나눔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