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매뉴얼 - 남자의 패션: 기본부터 완성까지
태인영 지음, 안웅철 사진 / 안나푸르나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셔츠 매뉴얼>(안나푸르나, 2015). 작년 여름에 반디 서점에서 들었다 놨다 했던 책이다. 가격에 비해 두깨가 하도 얇아(189쪽)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했다가 잊힌 책이다. 근데 저번주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빌려 보았다.

 

 아, 근데 이거 구매해서 읽었으면 심하게 자책할 뻔 했다. 책이 부실해도 이만저만 부실한 게 아니라는 거. 15,800원이면 다른 책을 사서 보는 게 10배 낫다. 이 책은 매우 부실하다.

 

도대체 저자가 왜 이런 책을 냈는지 심히 의구심이 들 정도다. 저자는 외국어 고교 출신(불어 전공)에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는 정외과를 전공하고나서 94년부터 방송 진행과 방송 출연을 해 오고 있단다. 국제 행사 전문 MC, 국제협상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세계를 누비고 있다고.

 

그냥 세계를 누비면서 협상 전문가로서의 이력이나 넓힐 일이지, 이런 책은 왜 냈나 싶다. 남성 패션, 그것도 '기본에서 완성'까지 안내해 준다는 사람이 책을 쓰면서 공부한자 하지 않고 자기 느낌대로만 내용을 채우면 뭐 하자는 건지. 남성 패션이 그렇게도 만만한 모양이다.

 

저자는 패션관련 업계에 있어본 적도 없고, 패션 관련 전공을 하지도 않았다. 미술 전공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나와 국제협상 이력을 가진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남성 패션에 관해서 전문가는 아닌 거다. 이력에서 한 눈에 드러난다.(책 날개에 이력이 나와 있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전문가의 입장에서 남성 패션을 코칭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외한이 이런 책을 쓰려면 적어도 공부를 해야한다. 그래야 기본은 간다. 더군다나 여자는 남성복을 입어 본 적도 없고 입어 볼 계획도 없지 않나.

 

어디서 보고 들은 건 많아가지고 이렇게 입어라 저렇게 입어라 하는데, 내가 볼 땐 아마추어의 어설픈 지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남자에게 자기가 입히고 싶은 옷을 입히려고 습작한 스타일 연습장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남성복의 기본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비즈니스 웨어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조언하는 코디는 모래사장에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 책 어디에도 비즈니스 웨어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왜냐, 타이틀이 <셔츠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셔츠는 남성 비즈니스 웨어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든 사람은 누구나 기대한다. 이 책이 캐주얼 웨어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비즈니스 웨어에 대한 안내서가 되리란 것을.

 

더군다나, 타이틀이 <셔츠 매뉴얼>이다. 그러면 적어도 책의 2/3는 셔츠 관련 내용으로 채우고 수트 코디와 엑세서리는 부차적으로 언급해야 책의 균형이 맞다. 헌데, 이 책은 셔츠에 관련된 내용이 50페이지도 안 된다. 189페이지 중에서 말이다.

 

나머지는 타이, 팬츠, 수트, 코트, 캐주얼, 악세사리에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도 그냥 느낌의 나열이다.) 그냥 남성 패션에 대한 토탈 안내서 인듯한데, 왜 타이틀을 저따위로 붙였는지 모르겠다.

 

셔츠에 관한 내용도 별로 전문적이지 않다. 셔츠 카라만 해도 10여 가지가 넘고, 커프스 종류도 7가지가 넘는데, 이 책에서는 달랑 카라 3개와 커프스 2개만 언급했다.

 

셔츠 각 부분의 명칭도 없고, 하이엔드 셔츠와 기성 셔츠의 차이점도 없다. 목 둘레와 팔길이가 맞지 않아 고민이 많은 남자들에게 맞춤 셔츠와 기성 셔츠의 차이점과 특장점을 비교해 주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정보, 물론 없다. 그냥 여성 잡지책에 나오는 수준에다 자기 기호를 더하여 내용을 구성한 게 전부다.

 

남성 클래식 스타일에서 수트 라펠의 넓이와 셔츠 카라의 조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트를 입은 인상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얼굴이 큰 사람과 마른 사람에 따라 조합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중요한 정보가 빠져있다.

 

그런데, 이런 건 애교로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중요한 건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저자가 비즈니스 웨어의 본질이 뭔지 모른다는 거다.  이는 코디로 제시한 스타일 사진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보면 화사하고 밝고 예쁘다. 데이트 룩이면 금상 첨화인 스타일이다. 매우 트렌디하고 패셔너블하다.

 

다시 강조하건대 비즈니스 웨어는 패셔너블한 옷이 아니다. 유행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기에 펑크 룩과 같은 안티-패션에 가까운 스타일이다.  그 이유는 수트가 전투복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 자체가 보수적이고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남자들의 군복 이미지를 떠올리면 쉽다!)

 

그래서 비즈니스 웨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색상을 추천해야 한다. 절대로 핑크색 셔츠나 노란색 치노 팬츠를 권하면 안 된다. 비즈니스 전장에 나가는 사람에게 데이트 룩을 추천한다는 건 TPO에 맞지 않는 스타일이다.

 

뭐, 요즘은 비즈니스 캐주얼이 대세라 이런 차림새가 대세인줄 아는 모양인데, 이도 기본을 무시하면 안 된다. 전통적인 클래식 복장의 기본(트렌드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준수하면서 약간의 포인트를 주는 선에서 그쳐야지, 트렌드를 따르는 것이 남성복의 대세인양 호도하지 말자.

 

이 책은 여기에 그쳤으면 저자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렇거니 하고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서술 내용의 부실함은 책의 함량 미달로 이어져 저자를 불신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책의 내용을 잠깐만 소개해 보겠다. 영국산 원단을 설명한 내용이다.

 

 

"영국산 원단은 힘있고 뻣뻣하지만 체형을 보완해 주고 내구성과 원형 보존 등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양복을 맞춘다면 영국산 원단에 도전해 봅시다. 처음에는 불편하다고 느끼다가도 몸을 바로 잡는 느낌을 받으면 그 마력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p105)

 

여자 스타일리스트들이 남성 스타일을 안내하는 책에서도 종종 보는 내용이다. 남자가 전투복으로써 양복을 맞출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살피는 것이 원단이다. 영국산 원단이면 원단 브랜드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런 걸 취급하지 않는다. 그냥 '영국산 원단'이면 끝이다.

 

영국산 원단이 힘있고 뻣뻣한 것은 차고 습한 영국의 기후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따뜻하고 내구성이 강한 원단을 생산한다. 대표적으로 허더스필드 클로쓰와 찰스 클레이튼 그리고 도멜 회사에서 생산되는 무게 250~350그램 정도의 원단이 내구성과 원형 보존 등 장점을 두루 갖춘 좋은 원단이다.

 

하지만 단점은 이 원단이 겨울용으로만 적합하다는 거다. 가을과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입을 수 없다. 이럴 때에는 이테리 원단인 에르메네 질도 제냐나 우리나라 제일모직의 슐레인 급 원단으로 양복을 맞춰야 한다.

 

양복에서 가장 중요한 원단에 대한 정보가 쏙 빠진 내용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더군나다 그것이 맞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공허한 내용은 계속된다.

 

책에 설명되어 있는 3가지 수트 스타일에 대한 내용이다. 브리티쉬 스타일과 프렌치 스타일을 설명한 부분을 보자.

 

브리티쉬 스타일

"전형적인 군복에서 모티프를 따온 수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몸을 반듯하게 세워주는 느낌의 딱딱함과 불편해 보이리만큼 꽂꽂한 등선을 자랑합니다. 그냥 딱딱한 갑옷이에요. 불편해 보이지만 단단한 가슴과 바른 자세로 자신감을 부각시키는 스타일이죠. 수탉이 울기 전에 가슴을 부풀리는 상상해 보세요. 깃이 넓고 재킷 좌우를 깊게 겹치고 두 줄로 버튼을 나란히 단 더블 브레스트 수트도 떠오릅니다."

 

프렌치 스타일

긴 설명 안 하겠습니다. 지리적으로 영국과 이탈리아 중간쯤에 있는 만큼, 스타일도 중간쯤이라고 해 두죠. (p107)

 

수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어깨와 허리 그리고 포켓과 벤트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저자가 남자의 수트에 대해 문외함임을 나타낸다. 수탉 운운 하는 지점에서는 헛웃음이 절로 난다. 많은 설명을 한답시고 했지만 브리티쉬 스타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주고 있지 않다.

 

브리티쉬 스타일의 특징을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4가지만 언급하면 된다. '군복을 연상시키는 각진 어깨', 타이트하게 피트되어 긴장감이 느껴지는 허리', '체인지 포켓과 슬랫 포켓', '사이드 벤트' 정도면 끝.

 

프렌치 스타일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그냥 빵 터졌다. 모르면 공부라도 하고 책을 쓰던가. 사진 이미지를 서술한 부분을 잘 보면 알겠지만, 절반 이상이 주관적인 느낌의 나열이다. 참으로 함량 미달이다.

 

할 말이 더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는 게 좋을 듯싶다. 너무 길어지고 이 정도만 언급해도 이 책에 대한 촌평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타일에 고민이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볼까 우려하여 좀 장황하게 썼다. 뭐, 자유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느니 차라리 <맨즈웨어 도그>(RHK, 2015)를 추천드린다. 캐주얼에서 전투복까지 이미지만으로도 어떻게 입을 지 충분한 가이드가 된다.

 

<셔츠 매뉴얼>은 지금까지 내가 본 남성 스타일 안내서 중에서 최악으로 꼽는 몇 권의 책 속에 속한다. 절대 사서 보시지 마시라! 별 하나라도 준 건 안웅철 사진 작가의 멋진 사진 이미지 때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수 - 전2권 세트 - 다가오는 전쟁
김진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 김진명, 이원호, 김종성 작가들의 작품은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다. 이들이 출간한 책은 수십종에 이르며, 발행부수도 상당하다. 대중소설, 더 좁히면 이른바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이들 중 김진명은 단연 톱이다. (아, 이 평가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의 어머니의 평이기도하다. 어머니가 무척 김진명 작가를 좋아하여 그의 책을 도서관에서 모두 대출할 정도이니..)

 

그도 그럴 것이, 김진명 소설 중 상당 수는 영화화 됐다.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는 그래서 김진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오래다. 그가 얼마나 대중에게 어필하는 작가인지는 구립 도서관 서가에만 가 봐도 알 수 있다. 가는 도서관 마다 비치되어 있는 작가의 소설들은 하도 많이 봐서인지 거의 다 너덜너덜 한 수준이다.

 

내 어머니가 광적으로 좋아하고, 대중이 지극히 사모해 마지 않는 김 작가의 소설을 나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더랬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정말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작품 더 보았지만, 움베르토 에코에 환장하면서부터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더니 밀란 쿤데라를 만나고 칼비노 류의 세계문학 작품들을 만나면서 그의 작품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김진명 작가를 외면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언젠가 김 작가가 인터뷰를 한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다. 그 때 그가 말하길, 자기의 작품은 완벽한 문헌 고증과 철저한 사실 조사를 바탕으로 심혈을 기울여 탄생한 작품이기에 가치가 있다는 논조였다. 더군다나 표절은 있을 수도 없다고 일갈했다. 이 인터뷰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고 이휘소 박사의 유고로부터 작품을 쓴 OO작품을 표절했다는 당시 언론 기사들에 대한 작가의 항변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여러 정황상 나는 김 작가가 표절을 했다고 확신을 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런 확신을 갖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 사건이후 나는 김진명 작가를 멀리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세계명작을 읽으면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우리나라 사학계가 발칵 뒤집힌 후 논쟁이 잠잠해 질 때 <살수>가 출간돼었다. 20005년 출간 당시 <살수>의 책 광고는 대대적이었는데, 인터넷 서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김 작가의 책을 소개했다.

 

김진명의 신작 장편소설. 고구려 역사는 물론이요, 한민족 역사 이래 최고의 영웅이면서도 남아 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영웅 을지문덕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근거하여 복원시키고, 거대한 수나라에 맞서 싸운 고구려인의 웅혼한 정기와 지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의한 중국 정부 차원의 한반도 역사 왜곡에 대해 당당히 맞서고 있다.빼앗긴 역사속의 고독한 영웅 을지문덕과 난국을 헤쳐나가는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이 살아숨쉬는 대역작!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005년 6월 29일자 신문에서도 '고구려는 중국 고대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보도를 하여 다시 한번 중국의 역사 왜곡은 현재진행형임을 인지시켰다. 김진명의 장편소설 '살수'는 고구려 역사는 물론이요, 한민족 역사 이래 최고의 영웅이면서도 남아 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영웅 을지문덕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근거하여 복원시키고, 거대한 수나라에 맞서 싸운 고구려인의 웅혼한 정기와 지략을 보여줌으로써, ‘동북공정’에 의한 중국 정부 차원의 한반도 역사 왜곡에 대해 당당히 맞선다.

[네이버 책소개]

 

역시, 김진명 작가의 위상에 걸맞는 대단한 격찬이다. 요즘 보니 김 작가의 신간인 <고구려>가 1권부터 5권까지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보건대 김진명의 고구려사에 대한 애착(대하 소설로서의)은 <살수>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고구려>에 대한 인기로 이전 작인 <살수>가 덩달아 잘 나간다는 전언. 그래서인지 도서관에 새 판본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독자들이 지속적으로 읽고 있는 듯하다. 알라딘에서도 역시 리뷰가 많다. 오~ 근데 역시 찬사 일색이다. 어떤 면에서 찬사를 보내는지 몇 개만 거들떠 보자.(알라딘 리뷰를 작성하신 분들에게 미리 사전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퍼 온 것에 사과를 드린다~ 퍼온 분의 아뒤는 생략)

 

OO님

비록 문과이긴 하지만 국사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을지문덕이 엄청난 전술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상황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 한권의 책이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소설인데도 실제처럼 여겨지는 이 책은 지루하지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동북공정으로 북한을 집어삼키고 우리나라의 역사인 고구려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중국에 대항하여 이 책은 이나라를 짊어지고 갈 청소년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이다. 김진명이라는 작가에 반해버려서 ....

 

&&님

작가의 이름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작품!

 

@@님

저자의 소설을읽게되면 마치타임머신을 타고 있는것 같다. 첫장을 열고서 마지막 책을 덮을때까지 아무것도 할수 없고책위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나는 과거에 있었고, 책을 덮는 순간현실로 돌아와 있다. 물론작가와 독자도 궁합이 맞아야겠지만 김진명의 소설은 적극 추천하고 싶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몰랐던 역사를 알수도 있고, 내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에 자부심이 생기기도 한다.

 

##님

김진명작가의 중국을 겨냥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하여 현재의 우리나라의 중국에대한 감정을 제대로 반영하여 보여준 작품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꼬면서 우리나라의 조상 고구려의 멋진 기상과 기개를 멋지게 잘 표현하여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꼬는 멋진 글이다.

 

**님

과연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읽었더니 너무너무 재미났다..  마치 삼국지 분위기로 흘러 들어가공... 중국풍이 좀 심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너무 감동에 벅차올랐다..

 

 

흠....그만하자. 충분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읽어보니, 이 작품은 함량미달의 작품이었다. 작품을 쓸 때 풍부한 사실 자료를 확보하지 않으면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는 그에게 이 작품은 자료가 부실해도 너무 부실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아 챘는지 뒤늦게 작가의 말에 '자료 부실'운운하며 슬며시 끼워넣었다. 내가 읽었던 건 초판인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네이버 책소개]처럼 '웅장한 고구려의  기상'이 살아숨쉬는 대작이 절대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위대한?) '<삼국지> 대신 이 책 <살수>를 읽는게 우선'이냐.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그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동북공정에 대한 그 어떤 대책도, 또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그 어떤 웅대한 스펙터클도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한 졸작이기에.

 

을지문덕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를 뿐더러(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그가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일말의 단서조차도 없다.

 

완전히 3류 무협지처럼 한 청년이 홀연히 등장하여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는 수퍼맨질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래놓고 일반독자들에게 을지문덕도 모르면서 무슨 역사운운하냐며 따진다.

 

어처구니가 없다. 적어도 그렇게 말하려면 상상력을 동원해 어린시절의 비범함을 부각시키면서 성장 과정을 개연성있게 전개시키든지, 아니면 을지문덕이 정계와 군계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어느 정도 보여주든지 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통째로 빠져 있다. 무늬만 역사소설이지 3류 무협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작품이다.

 

소설은 급조된 느낌이다. 사건의 개연성도 플롯의 전개도 3류 인터넷 소설처럼 조악하기 그지 없다. 스토리는 탄탄하냐? 수 문제와 양제의 고구려 침공을 을지문덕 혼자 원맨쇼로 막아냈다는게 전부다.

 

여기서 웃기는 건 을지문덕이 수113만 대군을 아주 우습게 돌려보냈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제갈공명을 넘어 슈퍼맨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건 김용의 그 유명한 무협적 과장을 아주 우습게 넘어 서고 있다.

 

고구려 역사를 통째로 먹으려는 중국에 대한 대응으로 역사소설을 썼다는 그에게, 미안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데 내놓기에는 너무도 허접하다. 솔직히 창피하기까지 하다.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간간히 열혈적 역사의식을 보여주지만 <시경> '학현편'을 인용한게 전부다. 관련학과를 나오거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너무 똥폼잡고 허풍을 떠는게 아닌가 싶다.

 

<살수>어디에도 을지문덕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곳은 없다. 다~ 고교 국사교과서에 있는 수준이다. 교과서와 다른 점은 그가 혼자 수의 대군을 아주 우습게 물리쳤다는 가공할만한 무용담을 담은 페이지 수밖에 없다.

 

진짜 을지문덕이 그렇게 싸웠을까? 그가 전투하는 장면은 무협소설의 과정과 진배없다. 그가 어떤 전술을 갖고 어떻게 병사들을 진두지휘했으며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고뇌는 어떠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건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몇 권의 소설을 읽어 보면 대번 비교가 가능하다.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역사소설들을 읽어보면,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어떻게 병사들을 운용하여 전쟁에서 연전 연승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비범함을 알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비록 을지문덕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면 상상력으로 충분히 개연성 있게 매꿀 수 있어야 역량있는 작가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디 왕이 전시에 한낯 장수에 불과한 을지문덕에게 고개를 숙여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가? 당시 고구려 왕의 품격이 그 정도밖에 안되었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어떤 사료를 보고 집필했는지 의아스럽다. 아, 소설이라고? 그럼 몰랐던 부분을 그럴싸하게 알려주든가.

 

무엇보다 심각한 건, '진짜 수가 113만 대군을 파견했을까?'라는 문제이다. 솔직히 도서관에서 관련 논문이나 사료를 조금만 들춰보더라도 그 당시 113만 이란 숫자는 침공의 과장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역사학계의 다수설이다. (당시 인구 대비로 그 숫자가 동원될 수 없단다) 그런데 당연한 듯 써내려간 김진명의 그 똥폼은 무엇인지. 언제나 작품 내기 전에 사실적 고찰을 완벽히 한다고 언제나 당당했던 그 기질은 '아집'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아주~ 실망스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여-수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없거니와 그 당시 전쟁에 대한 나름의 시각도 없다. 역사소설을 빙자한 삼류무협소설밖에 안되는 졸작이라 평하고 싶다.

 

 

 

[덧붙임]

요즈음 한국 사회는 역사 인식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대학 입시에서 한국사 필수 선택 문제와 교학사본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 그리고 국사편찬위원장의 자질 문제가 그렇다. 그래서 김진명의 이 소설도 많이 읽히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완전 함량미달이다. 본작은 을지문덕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지식도 알려주지 않거니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그 어떤 대안도 고구려 역사에서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열렬적 민족의식에 불타 오버하는 일갈만 있을 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0-22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10-22 17:52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

2013-10-25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말도 안되는, 그리고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미쳐버리지 않고는 타이틀로 내 걸 수 없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사르트르, 방곤 역, 1999). 이 빌어먹을 책은 실존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변명이다.(실존이 휴머니즘과 양립할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책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측에서 그리고 여타 문학가와 사상가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은 실존철학을, 자신만의 거만한(?) 언어로 복잡하고도 현학적이게 강연한 그 대본이 바로 이 책이다. (간결한 팜플릿이라는 느낌은 거의 못받았다. 역시 번역의 문제인가..)

  1981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50쪽 분량의 본문과 사르트르의 실존철학 강연에 반대하는 피에르 나빌르 교수와의 <토론>, 그리고 1952년 프랑스 <현대>지에 게재된 사르트르와 까뮈의 알고싶지 않은 둘 만의 싸움을 비화한 <반항과 혁명>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거기다가 뭘 말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현학적인 이 논쟁을 확대시킨 장송은 지금까지 알고싶어하는 사람들만의 관심을 끌어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 둘의 싸움에 제 3자가 끼어들어 교통정리하는 모양새가 여간 보기 불편한게 아니었다. (아, 그 본질은 무슨 말인지 정황파악이 안되서 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의 도덕관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비 꼬아서 논증하고 있다. (시튜아시옹과 기투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읽고 있으면 한 없는 미로를 걷게 된다. 실존주의의 본질을 매우 난해하고 불투명하게 논하면서(번역이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자유와 책임의 문제까지 건드려, 실존을 해야 자유로운것인지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태가 실존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적어도 나에게는) 실존주의 보급을 목적으로 했다는 이 해설서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헌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빌어먹을 헛소리를 늘어놓고 투덜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번역을 한 방곤이라는 역자때문이다. 글을 읽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비문 투성이에다가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문체는 원작을 망쳐놓은 느낌이다. 이 사람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지 심히 의아했다.

그리고 제발 전공자가 번역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존주의 제 1 원칙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를 이 사람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써놓고 있다. 물론 다른 판본에서도 보인다. 실존과 존재의 개념적 차이를 알면 이러한 실수(?)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뉘앙스 차이라고 보기에는 개념적 차이가 너무 크다. 

 이러한 개념적 어휘 선택은 책 전체에서 넘쳐난다. 그래서 행간을 멈추어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모든 페이지가 다 그모양이다. 제발 개념을 탑재하고 번역해 주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번역만 제대로 됐다면 아마도 실존주의 보급을 목적으로 사르트르의 본래의 취지는 성취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전모임 주제도서라서 읽기 했는데, 하여간 읽느라 열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한마디로 대실망이었다. 근데, 이게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되어가고 있어 심히 의아스럽다. 

욕심많은 칸과 등신같은 인조가 답답한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는....그냥 무참하게 읽은 작품이다. 역사소설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결코 역사소설일수 없고, 그렇다고 역사에세이도 아닌, 한마디로 이도저도 아닌 글이 되버렸다는.. 

아름다운 문체로 살아 생동해야할 캐리터를 죽여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역사교과서에 길어야 한 페이지 분량 정도 인것을 한 권으로 보여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서날쇠로 대변되는 민중의식의 싹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약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문체하면 떠오르는 작가 중 한사람이 김훈이다. 김훈이라는 브랜드는 언제나 간결한 문체의 미학과 함께 간다. 그런데, 이 소설은 김훈 브랜드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읽어보면 김훈 브랜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가 지향하는 스타카토식 글쓰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게 과연 김훈식 글쓰기인지 의아스러웠다.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서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산맥으로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렷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9페이지) 

책의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 나온 이 묘사가 이 책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이 아름다운 문장들...무생물을 생물에 비유하는 이러한 비유는 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한다. 급기야 중간을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런 문체가 살아 움직여야할 캐릭터의 역동성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김훈의 문체에 갇힌 캐리터들은 한 없이 평면적이었고 답답했다.

파주를 막아낼 수 있다면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서울을 버려야 할 일이 없을 터이지만, 그 말이 옳은지 아닌지를 물을 수 없는 까닭은 적들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죽을 무기를 쥔 군사들은 반드시 죽을 싸움에 나아가 적의 말발굽 아래서 죽고, 신하는 임금의 몸을 막아서서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낲았다. 하지만 적들은 아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18-19페이지)

보기 드물게 긴 문장이다. 스타카토식으로 짧은 문체를 구사하는 김훈의 문체와는 좀 멀어 보인다. 내용은 마지막 문장인 적들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급박하다는 거. 그 상황을 이렇게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김훈의 장황한 문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고의 압권은 35-36페이지에 나열되어 있다.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이라고하나~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우밎ㄱ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중간생략)..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려 한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한 문장으로 내리 썼다. 이런 만연체의 문장은 한 문장을 길게 써야 미덕이라는 판사들의 글쓰기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김훈의 소설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것두 스타카토식의 문장을 구사하는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는 작가에게서 볼 수 있다는 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만연체 문장은 소설 곳곳에 넘쳐난다. 캐릭터가 문체에 갇힌 소설은 무참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실망을 달랠 길이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ㅇㅇ 2020-04-1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참 편협하게 읽으시네요 무조건 짧고 간결해야 미학이라는 개... 평생 독서하실일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여자
김미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빨리 읽히는 소설이다. 저번주 전경린에 홀려있었는데...주말을 또 사랑 타령하는 소설에 또 날려버렸다....근데, 재미있는걸 어떡하랴...
사랑에 대한 김미진의 생각을 보자...그 얼마나 전경린과 구별되는지...


<모차르트가 살아있다면>이후 두 번째 접하는 김미진의 장편소설. 모차르트 이후 단편에서 조차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작품을 실로 오랜만에 만나 본다. 7년 만인가....그런데, 모차르트 보단 약간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주제의 진부함이 컸다. 물론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다. 3류 통속소설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불륜..자전거를 타는 여인이라는 제목에서도 그 상징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물론 불륜도 사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내내 오래 전에 끝난 드라마 <푸른 안개>가 생각났다. 사회에서 성공했다라고 평가받는 한 중년의 남자가 한 20대 여자에게 영혼을 울리는 사랑을 느껴 가정과 직장을 모두 팽개치고 그 감정을 간직한다는 이야기...그녀는 떠나버리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가 되었다는...그 문제의 드라마 <푸른 안개>...사랑을 모르고 앞만 보고 왔던 한 남자 앞에 나타난 사랑에 그는 무너졌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모르고 오로지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하고 그럭저럭 살아온 이 소설의 주인공 미목.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산 사나이 하훈으로 인해 그녀는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다. 몸의 세포 배열까지...모든 것이 푸른 안개의 주인공 이경영과 똑같다. 뒤늦게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는 사람들의 비극적 결말....<푸른안개>가 그랬고 영화 <데미지>와 <실락원>이 그랬으며 숱한 불륜의 통속소설들이 그랬다. 모두 사회의 지탄을 받는 화냥년 이었으며 가정을 버리는 철면피 가장 이었다.

불륜....모든 도덕을 무너뜨리고 서로 갈구하는 이 감정도 사랑이라 불리울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그 열정을 우리는 당당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순간의 사랑이 모든 것을 파멸시켜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마음에 담을 수 있는가? 이따위 물음들을 던져본다. 드라마 <푸른 안개>가 종결되었을 때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경영을 비난했다. 그럴 수는 없다라고....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바로 그 불륜을 사랑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도 한 단계 승화시키고 있다. 서로의 숭고한 죽음으로....(하훈은 로체의 정상에서 시신조차 없이 하나의 편지만을 달랑 남기고 죽었다)

김미진은 말한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심리학자와 병리학자들은 인간의 신비를 낱낱이 해부했고, 인간의 사랑을 맥박 수와 디엔에이와 케미컬 언 밸런스로 도표화했어요. 인간을 알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에 대한 신비감, 존엄성 같은 것은 다 깨져 버렸죠. 그러나 극단적 회의주의로 바라볼 필요가 앖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사랑은 오묘한 섭리예요. 과학이나 통계로 추론할 수 는 있지만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에요.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거예요.”(하훈)  

“사랑을 사고 파는 사람들, 사랑이라는 감정에 몇 번 멍들고 아예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 사랑에 불능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귀띔해 주고 싶어요. 이 세상 어딘가에는 사랑이라는 절대공간이 존재하고 있어요. 기술 문명의 급류 속에서 아직도 인간이 가장 우수한 종족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랑 때문이죠. 사랑은 구정물 같은 욕망의 충돌이 아니라, 혈관속을 질주하는 운명이에요. 그 운명 속에 갇혔어요.”(미목)

이 둘의 대화를 통해 김미진은 단언한다. 불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사랑이 그것을 증명했다고...비극으로 완성되야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과연 그런가? 그러면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 만을 바라본 남편 영준은 무엇인가?
나는 불륜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미목이 남편 영준을 죽인 거에 이르러서는 이건 잘못된 관계라는 걸 확신했다.

비극으로 완성한 불륜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영준의 입장에서 봤을땐 그건 결코 사랑일 수 없다. 미목과 하훈의 관계는 그야말로 천생연분. 나중에 진정한 짝을 만났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한쪽을 파멸시키고 당사자도 행복한 시간을 지속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둘 만의 사랑을 불륜, 불장난 등 여러 경멸 스런 어휘로 부르곤 한다. 어느모로 보나 하훈과 미목의 사랑은 세상이 환영하지 않는 그들만의 주관적인 감정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 부르는가? 남녀의 독점적 관계속에서 피어난 독점적인 소유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 같다. 소설속 어디에도 단점을 수용하고 배려하는 포용력은 없다. 오직 열정에 끌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게 전부다. 살인적인 그리움은 있을지언정 용서하는 포용과 헌신 배려와 같은 건 없다.  

열정이 없어진 순간부터가 나는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열정은 모든 눈을 가려버리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단언컨대 영원하지 않다. 하훈은 영원할 거라 단언하면서 죽어버렸지만... 

열정과 젊음이 사라진 후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건 넌센스다. 사랑은 인간이 실존해 있을때만 누릴 수 있는 인간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죽을때까지 알아가는 과정이 또한 사랑이다. 불륜으로 맺어진 두 남녀가 죽어 더 아름답다는 망발을 어떻게 소설가가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