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건 왼쪽, 2004년에 출간된 그리핀북스 판이다. 오른쪽은 시공사에서 나온 2014년판.
어쩐지 왼쪽 이 책 이 두께와 밀도에 비해 책값이 11,000원이라 싸다 싶더라니 출간된 지 20년이구나.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책을 참 오래 묵혀 두었다. 한번 잡으면 금방 읽을 수 있는 것을.
하긴 그런 책이 한두 권이 아니지.
이 책에는 어슐러 르 귄의 단편 17편이 담겨있다.
<샘레이의 목걸이> ... 오 괜찮은데? 이런 컨셉(다른 세계에 다녀오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는)은 우리의 전래동화에도 있듯이 흔한 소재이지만 이걸 우주랑 엮었다.
<파리의 4월> ___ 음...
<명인들> ___ 음......
<어둠상자> ___ 호, 분위기 마음에 듦
<해제의 주문> ___ 관련 장편을 봐야할 것 같음(땅바다 시리즈)
<이름의 법칙> ___ 좀 발랄한 분위기. 여기까지 읽은 작품 중 제일 재밌었음
<겨울의 왕> ___ 멋있다!! <어둠의 왼손> 관련 작품인가 봄.
<멋진 여행> ___ 음....
<아홉 생명> ___ 클론이야기. 흥미로운걸?
<물건들> ___ 흐음...
<머리로의 여행> ___ 머엉....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___ 여기까지 읽은 작품 중 제일 재밌었음 (이름의 법칙 밀려남)
<땅속의 별들> ___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군.
<시야> ___ 흠.
<길의 방향> ___ 흐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___ 아, 감동.
<혁명 전날> ___ 왠지 찡함. 혁명을 주도한 '오도'라는 인물이 여성임.
음, 흠, 머엉이 7편인 거 보니 비중이 상당한데 ㅋㅋㅋㅋ
너무 함축적이어서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그래서 뭐..?' 싶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높이 평가하는 지점은, 한번에 조금씩 밖에 읽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한 단편조차 수없이 끊어 읽었는데도 펼칠 때마다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 판타지나 SF에서 전제되는 설정을 깔고 가기 때문에- 특히 단편에서는 세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으므로 - 그걸 독자가 재빨리 받아들이게 하고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능력이 중요할 텐데, 내가 보기엔 훌륭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윌리엄 제임스의 글에 충격받아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한다.
또는 푸리에, 벨러미, 모리스가 생각했던 낙원을 능가하는 낙원이 우리에게 제공된다면, 그리고 어느 외딴 곳에서 길 잃은 한 영혼만 고통을 당하면 그 낙원에 있는 수백만 명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설사 그런 식으로 제공되는 행복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우리 안에 인다 할지라도 그러한 거래의 열매를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 얻은 행복이 얼마나 추잡한가를 스스로가 명확히 느끼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467쪽에 재인용)
제임스가 쓴 <도덕적 철학자와 도덕적 삶>이라는 글에 나온다는데 이 제목의 책은 없는지 찾을 수 없었고, 국내에 번역된 책이 꽤 있는 학자네? 심리학 저서들이 있고,, 그중 관심 가는 책을 담아 놨다. 어차피 나중에 이걸 왜 담았는지 잊을 테지만...
이래서 내가 구간 타파를 부르짖는 것이다. 관련 도서 궁금할 때 딱 사서 바로 읽는 게 나의 이상적인 독서 생활. 물론 안 읽은 책들 잔뜩 쌓여 있어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지 않으려고요.
아무튼 이런 제임스의 물음에 영감을 얻어 쓴 이 단편에는 정말로 '한 영혼만 고통을 당하고' 그 낙원에 있는 수백만 명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다만 그 전제는 그 영혼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철저해야 하고(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금지됨),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그런데, 그 고통받는 영혼의 존재를 알고서도 진짜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 짤막한 소설은 그 질문을 생생한 이야기에 담아 던져준다.
과학소설 냄새가 더 나는 작품 중에는 <아홉 생명>과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가 좋았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 타인과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르 귄은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서문에 이렇게 썼다. "육체적 행동이 정신적 행동을 가져오지 않는 한, 행동이 인간을 표현하지 않는 한, 나는 모험 이야기를 무척 지루해한다. (...) 나는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흥미를 가진다." (319쪽)
그런 르 귄이 쓴 작품이기 때문에 SF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계급 문제를 다루는 <캘리번과 마녀>를 같이 읽어서 그런지 소설 속 이런 부분도 눈에 띈다.
라이아가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처음으로 팸플릿을 쓰기 전에, 파레오를 떠나기 전에, '자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여섯 살짜리 아이들과 보도 위에서 딱지 앉은 무릎을 꿇고서 롤태기 놀이를 하던 리버 거리에서 멀리 떠나게 되기 이전에, 라이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라이아와 다른 아이들과, 라이아의 부모와 아이들의 부모, 술주정뱅이들과 창녀들과 리버 거리에 사는 모든 사람이 무언가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는 사실을. (506쪽, <혁명 전날> 중)
마녀사냥이 늘어난 것은 '더 나은 부류의 사람들'이 '낮은 계급'에 대한 꾸준한 공포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서였다. '낮은 계급'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기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사악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 255쪽)
어슐러 르 귄의 장편들이 궁금해져서 일단 찾아보았다. 언제 읽을지는 미지수지만.
<어둠의 왼손>(1969년)으로 SF 양대 상인 휴고와 네뷸러를 동시에 휩쓸었다고.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1968년~)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시리즈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땅바다 시리즈가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어스시=땅바다인 모양.
<헤인 연대기>는 전집으로 묶여 나오지 않은 것 같음. 건수하님은 어스시보다 헤인 쪽이 재미있었다고 진술.
(위에 넣은 <어둠의 왼손>도 이 시리즈에 속한다)
<서부 해안 연대기>도 있다. 참 시리즈물 많이 쓰셨네.. 이건 세 권짜리인데 합본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작품이 출간되어 있고, 에세이와 말 시리즈도 있다.
SF 애독자에게는 참 고마운 분일 듯.
내가 시리즈물을 좋아하긴 하는데, 흠... 나중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