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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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권. 이 얇은 책 한 권에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작품 두 편이 담겨 있다. 나는 단편보다 장편을 훨씬 선호하는데, 이 작품들은 - 중단편인가? 소네치카(87페이지), 스페이드의 여왕(46페이지)인데, 뒤에 소개에는 '스페이드의 여왕'만 '단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 그 분량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장편처럼 느껴져서인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짧은 분량 안에 장편 수준의 긴 서사를 녹여냈달까. 


<소네치카>를 읽으면서 아이고 이 답답아 하며 안타까워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벼운 정신병리적 기운마저 도는 독서열"에 빠진 소네치카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책 속 이야기 대신에 상상할 수도 없는 빈곤의 짐, 가난, 추위, 번갈아가며 병이 나는 작은 타냐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에 대한 매일매일의 끝없는 걱정" 속에서 살게 되기까지, 그리고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분노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책을 사랑하는 소네치카의 모습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공감했던 독자를 아연케 한다. 나 또한 하, 이것이 여성 예술가들이 남자 만나고 아이 낳으며 겪게 되는 분열과 소외인가, 싶어 씁쓸했더랬다. 

그러나 작품을 모두 읽고 나니 그녀의 삶을 내가 감히 쯧쯧거리며 평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천 권의 책더미에 고치처럼 둘러싸여 그리스신화의 자욱한 웅얼거림, (...) 하늘의 중심부를 향하는 위대한 러시아인들의 도덕적 절망에 매료된 소네치카의 평온한 영혼"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현실을 피해" "문학의 공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쉬도록" 했던 소네치카는 학교를 졸업하고 도서관의 지하 보관실로 내려가 고치 속 삶을 지속한다. 그러나 로베르트 빅토르비치는 "서양 배 모양으로 부풀어" 있는 코와 "납작한 엉덩이" 등 볼품 없는 외모를 뚫고 "내면에서 진정한 빛"을 발하는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다. 그토록 많은 일을 겪어온 이 남자가 소네치카에게 한눈에 반하는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운명적으로 보인다. 


* 이하 스포일러 주의 -------------------------------------------



그녀는 어떻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문학에 등을 돌리고 일상의 기쁨에 빠져들 수 있었을까? 소네치카는, 소네치카였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문학처럼 탐독했다. 그녀에게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라는 범상치 않은 예술가와 그를 닮은 딸 타냐는 무한히 성장하고 변화하는 책과 같았다. 꿈조차 책처럼 읽었던 소네치카는 이제 "일생 동은 매일의 장면들, 그 냄새와 색채, 특히 남편이 과장되고 진중하게 한 매 순간의 말들을 기억했다." "신이 주신 하루하루가 이웃한 날들과 합쳐지지 않고 그 각각이 소네치카의 기억에 새겨졌다."  

그렇기에 딸의 친구인 야샤, 소네치카가 방을 내어주고 돌보아준 소녀와 남편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오랜만에 책을 펼친다.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그녀의 고향, 영원한 문학은 언제나 훌륭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남편 로베르트가 사망한 후 그가 그린 야샤의 초상화들을 아름답게 전시하는 소네치카의 모습은 진정한 예술의 후원자답다. 그녀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가치를 알았고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그렇게 책의 고치에서 빠져 나왔던 요정 소네치카는 삶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환희를 모두 경험한 후 조용히 책 속으로 되돌아간다. 온전히 혼자인 노년의 소네치카는 사실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떨리는 손에는 책이 놓여 있다." 언제든 그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스포일러 끝 --------------------



<스페이드의 여왕>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여기엔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무르'라는 이름의 노년 여성으로, 그녀는 한 가정의 살아있는 가장 오래된 흔적이자 제어되지 않는 아집의 제왕으로서 집안에 군림한다. 화려하고 떠들썩한 연애, 결혼, 온갖 유명세를 떨치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무르의 입에서 화수분처럼 끝없이 흘러나온다. "이 모든 것의 목격자는 청교도적인 우수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가녀리고 초인적으로 아름답고 연극하는 것처럼 항상 곱게 차려입는 이 여인을 사랑할 수 없음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 깊은 절망을 느끼는, 찌푸린 얼굴의 딸 안나 표도로브나였다." 안나는 의사이고 오래전 남편과 헤어졌는데 엄마 등쌀 때문으로 보인다. 안나의 딸 카탸 역시 남편과 이혼했고, 딸 레노치카와 아들 그리샤(다른 남자의 아들)를 낳았다. 이 집안 삼대의 여성이 남편 없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안나의 남편이 불쑥 찾아와 집안 사람들을 사로잡고, 아이들은 무르 몰래 그(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그리스로 놀러 갈 계획을 짜는데.. 과연 이 '스페이드의 여왕'에게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스페이드의 여왕>은 분량이 짧은데 오히려 리뷰 쓰기가 어려운 작품이다. 마음에 든 문장들을 소개하고 마치려고 한다. 

어머니와 딸은 한없이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그들의 친밀함에 장애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서로를 슬프게 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삶은 대부분 다양한 종류의 슬픔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종일관의 침묵이 모녀의 조용한 불평, 서로에 대한 달콤한 위로,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는 고민을 대신했다. (114, 115쪽)

"레노치카는 전속력으로 기말시험의 낭패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 중대한 나날 동안 수업을 때려치우고는 최근에 나타난 할아버지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매혹적인 영국이 조국의 학문에 대한 입맛을 잃게 했기 떄문에 레노치카는 내일 보는 시험에 대해서는 일말의 초조함도 가지지 않았다." (133쪽)  - 이런 재미난 문장들이 종종 나와서 좋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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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1-15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분량이 많아야 서사가 훌륭한 건 아니더라고요. 소네치카 읽으면 다 우리 같다고 생각되는 건 아닐까요?
저도 약간 현실을 무시한 채 책을 읽고 있거든요 ㅎㅎ

독서괭 2023-11-24 17:01   좋아요 1 | URL
답이 너무 늦어졌군요 ㅠㅠ
분량이 많아야 서사가 훌륭한 건 아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ㅎㅎ 저도 책, 특히 소설 읽을 때는 그 세계에 푹 빠져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을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하엘 엔데의 <네버 엔딩 스토리> 같은 책 너무 좋아해요 ㅎㅎ

새파랑 2023-11-16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등장인물들이 다 독특해서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던것 같습니다. 역시 혼돈의 러시아~!!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도 현실에서는 안타깝게 살았던 ‘소네치카‘를 보면서 ‘책 많이 읽어봤자 현실에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ㅋㅋ

잠자냥 2023-11-16 10:39   좋아요 4 | URL
“남편하고 자식 열심히 키워봤자 소용없다” by 술파랑.

새파랑 2023-11-16 11:31   좋아요 3 | URL
헐... 은바오는 키우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독서괭 2023-11-24 17:0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남편하고 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없지만 동물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
전 그래도 노년의 소네치카에게 책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싶더라고요^^

잠자냥 2023-11-24 17:30   좋아요 1 | URL
아니 은바오 키우라는 댓글 이제 보네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1-24 17:37   좋아요 0 | URL
고양이도 키우시는데 판다도 나쁘진 않은거 같습니다...

잠자냥 2023-11-24 17:39   좋아요 1 | URL
대나무값 많이 들 거 같아요…;

새파랑 2023-11-24 17:40   좋아요 1 | URL
책은 나무로 만드니
대나무 값이 비싸다면

밥 대신 책을 먹으라고 하면 됩니다~!!

독서괭 2023-11-24 18: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럼 쫓겨날 듯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3-11-24 1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안 읽어봤지만요. 유수한 우리 알라딘 이웃님들의 리뷰를 모두 섭렵한 바.... 폭풍을 모두 다 겪은 후에 소네치카가 조용히 책 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좀 가슴 아프네요. 우리는 에너지를 아껴야 합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는 그 어떤 감정보다 사람의 에너지를 빨아들이죠. 하지만.... 저는 안 읽은 사람이니까요.... 조용히 책 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전 좋으면서도 참 그랬어요.

제가 최근에 읽은 <Lucy by the sea>에서 윌리엄이랑 루시가 전에 윌리엄이 바람핀 이야기를 나누거든요. 아주 오래 전 일이고, 뭐.......지금은 법적으로는 남남이고요. 루시가 난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그게 뭔지 알거 같으면서도 싫기도 하구요. 암튼 좀 그랬습니다.

얇으면서도 울림을 주는 책이네요. 스포일러 주의.... 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독자를 배려하는 이 따뜻한 마음씨여!!!

얄라알라 2023-11-19 20:40   좋아요 1 | URL
글쵸?

스포일러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독서괭님의 마음쓰심!

독서괭 2023-11-24 17:06   좋아요 0 | URL
단발님, 이 얇은 책의 리뷰를 섭렵하셨다는 것은..ㅋㅋㅋㅋ 줄거리 파악 끝나셨군요! 그래도 직접 읽는 건 다르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루시의 ˝아무렇지도 않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요? 저라면 아무렇지 않다고는 못할 것 같은데.. ㅠㅠ
스포일러를 체크해서 처음에 딱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모바일에서는 안 보이더라고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께 스포일러 뿌릴 수 없으니 ㅋㅋㅋㅋ
얄라님/ 감사합니다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