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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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20쪽


노년에 이른 퇴직한 철도공무원이 남긴 자전적 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평범한 인생>이라는 제목, 그리고 죽은 철도공무원이 남긴 글을 읽게 된 젊은 의사와 포펠이라는 노인의 대화를 읽으며 나는 막연히 <스토너>를 연상했다. 일전에 ㅈㅈㄴ님이 이 책에 대해 남긴 '죽고 싶지만 차페크는 읽고 싶어'(https://blog.aladin.co.kr/socker/13189342)라는 글에 댓글로 "스토너랑 비슷한가요?"라고 물었을 때는 아직 <스토너>를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읽었다! 그리고 그때 ㅈㅈㄴ님이 "어떤 면에서는 스토너 생각도 좀 나네요"라고 애매하게 답변하신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다. 전반부는 비슷한 느낌일 수 있지만 후반부가 전혀 달랐던 것!


한 사람의 인생, 대략 70년 정도로 친 세월을 글로 정리한다는 것,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가지들을 쳐내야 한다. 그의 한평생을 설명할 만한 중심 줄거리를 세워 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잔가지들은 적당히 쳐내거나 살짝만 보여주거나 다소 왜곡하는 방식으로. 이 책의 화자가 스스로 설정한 중심 줄거리는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따라 정리된 이야기가 전반부에서 진행된다. 자신의 정리에 만족하여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 그가 마구 쳐내고 생략한 그 잔가지들의 목소리가, 그를 향해 외쳐댄다. 이봐, 나는 어때? 너는 이런 행동도 했잖아? 사실 그건 그게 아니잖아? 


마음 속 목소리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때로는 전면에 나서고 때로는 숨기도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나타났던 수많은 자아들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큰 충격으로 인해 숨겨져 있던 인격이 드러난다는 전개(<아이덴티티>, <킬미 힐미>)와 무관하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feat. 가시나무) 괴롭고 남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는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나아간다. '나'가 인식한 자아들은 전반부에서 언급되었던 많은 주변 인물들의 반영임을 깨닫게 된다. 즉,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우연'과 '습관'이 작용하였을 뿐이니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인물의 삶이든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는 것. 이러한 깨달음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연대의 바탕이 된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이 세상은 얼마나 늘어나는가! 세상이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고, 이렇게 찬란한 곳인지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 239,240쪽 


'우리'에 대한 이토록 찬란한 외침이 또 있을까? 관용, 포용, 연대 이런 말들이 공허해지는 이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세상이 이렇게 넓어지고 찬란해짐을 외치는 이 소설이 더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평범한 인생>은 읽은 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독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나온 길에서 '가지 않은 길'이나 갔다 돌아온 길, 안 간 척 지워버린 길들을 떠올려보게 될 것이다. 내 곁의 타인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지도.  



(+) 카렐 차페크에 대해 특히 높이 평가하고 싶은 한 가지는, '나'의 아내의 삶, 일하는 남편에게 의지하여 그의 생활을 완벽하게 뒷바라지 함으로써 의미를 얻는 그런 삶에 대해 깊은 통찰과 이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미 남편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했고 얽매이려 하지 않았어. 아내가 자신을 독점하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졌지. 다행히도 아내는 사려 깊은 여자였기 때문에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담담하게 처신했어. 그 후 <아내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익숙해졌고, 자신과 타협을 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굴종시키고 남편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 거야.

그녀 스스로 원했던 일이야!

그래,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나? 이혼을 하거나, 결혼한 사람들 간에 그러듯 은밀하면서도 광적으로 서로 미워하거나, 아니면 <남편의> 게임 룰을 인정하여 그가 주인이고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말고. 서로를 결속시켜 주던 것이 사라지자, 그녀는 남편의 것으로 남편을 붙잡으려 했지. 그의 안락과 습관과 욕구들로 말이야. 그러자 단지 남편만이 존재하게 된 거야. 그의 가정과 부부 생활은 오로지 그의 편안과 영달을 위해서만 존재했지. -145쪽


남성 작가가 가정주부에 관해 이렇게 날카롭게 지적하다니. 너무 좋은데? 

절반 좀 넘게 읽은 <호르두발>도 카렐 차페크의 이런 통찰이 느껴진다. 이 책의 주된 화자인 호르두발은 7년 동안 미국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그를 보고 몹시 당황해하며 거리를 두고, 머슴일을 하는 젊은 남자는 뭐지..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얼마든지 선정적으로, 열받게, 아내를 몹쓸 인간으로 몰아붙이고 호르두발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로 만들 수 있을 터다. 그러나 차페크의 섬세한 글을 읽다 보면 어느 누구를 단적으로 심판할 수 없게 된다. 호르두발이 불쌍한 건 사실이지만, 7년이나 집을 비우고 5년이나 연락이 없던 남편인데, 그사이 젊은 아내도 나름의 삶을 살아야 했을 것 아닌가? 그런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 <호르두발> 처음엔 하도 호르두발 머릿속 생각이 많이 나와서 지루했는데 점점 흥미로워지더니 2부에서 이야~ 사건 터졌는데 뒤가 궁금하다. 주말에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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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9-07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ㅈㅈㄴ 누군지 모르겠지만 참 똑똑한 사람이군요.

은오 2023-09-07 16:29   좋아요 1 | URL
ㅈㅈㄴ 그분 누군지모르겠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저랑 결혼하실거같군요 ㅋㅋ 느낌이 오네요

독서괭 2023-09-07 16: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분 대체 어디의 누구래요? ㅋㅋㅋ

잠자냥 2023-09-07 16:47   좋아요 1 | URL
괭 마음속의 ㅈㅈㄴ

독서괭 2023-09-07 16:53   좋아요 2 | URL
은오님, 요즘 잠자냥님이 저도 꼬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쩌죠? 저는 오로지 학문적 관심에서 잠사모 회장을 맡고 있을 뿐인데..

은오 2023-09-08 18:26   좋아요 1 | URL
😮‍💨😮‍💨😮‍💨😮‍💨😮‍💨.... 어쩌다 이렇게 이사람 저사람 다 꼬시는분을 사랑하게 돼서....

청아 2023-09-07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읽고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지구 멸망을 구하고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거창한 영웅들...그런데 현실은 평범함의 연속이 아닌가?하고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요. 저도 이 책 꼭 읽어보고 싶어요!^^

독서괭 2023-09-07 16:47   좋아요 1 | URL
오 <잘라라~>도 요런 느낌??^^ 미미님, 이 책 좋아하실 것 같아요. 꼭 읽어보셔요^^

은오 2023-09-07 16: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근데 딱 마지막 부분만 마음에 안들었어요.... 수많은 자아를 인식하고 그게 갑자기 인류애로 넘어가는게 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감하기 어려웠다ㅋㅋㅋㅋㅋ
그냥 내 안의 자아들로 끝냈으면 저한텐 더 완벽한 작품이었을듯
좋았던 점은 노동과 질서의 아름다움(뒤에가선 억척이가 그건 합리화였을뿐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평범이한텐 사실이었던것) 그리고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고뇌와 후회 다른 선택지들에대한 아쉬움을 수많은 자아가 싸우고 잠깐씩 이끌고 하는 과정으로 표현한게 아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구나 하면서 진짜 무릎퍽퍽치면서 감탄 ㅋㅋㅋ 😭👏👏
그리고 밑줄치고싶은 문장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제가 명언충(?) 작가들 좋아하는데 차페크가 딱 그랬어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9-07 16:32   좋아요 2 | URL
차페크 형제 자체가 인류애 품은 형제들이라... 어쩔 수 없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9-07 16:46   좋아요 2 | URL
차페크가 작가 형제가 있었군요! 아.. 원래 인류애가 넘치는구나 ㅋㅋㅋㅋㅋ 근데 이런거 알려주시는 잠자냥님 너무멋있어서 힘드네요ㅜ

잠자냥 2023-09-07 16:48   좋아요 3 | URL
형이랑 같이 창작한 작품 많아요. 형은 특히 그림 잘 그림요~
아 그만 잘난척해야지. 힘들다고하니.......

독서괭 2023-09-07 16: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마지막에서 모두가 내 형제!하고 하느님 찾길래 좀 오바 아닌가 하긴 했습니다만 ㅋㅋㅋ 그래도 곱씹을수록 좋더라고요.
노동과 질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호르두발>에서 더 자세히 나오는 듯해요.
저도 문장 참 좋더라고요. 명언충 ㅋㅋㅋㅋㅋ 어디 인용하기 좋지요 ㅋㅋ
차페크 형제 있는 거 뒤에 작가설명에 나왔던 것 같은데.. 은오님 뒤는 건너뛰신 거 들킴 ㅋㅋㅋ

페넬로페 2023-09-07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거의 펑범한 사람들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니 타인이 다 같은 사람이란 표현이 공감되네요.

독서괭 2023-09-07 16:52   좋아요 1 | URL
네, 페넬로페님. 지금의 나는 여러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고 다른 우연에 의해 내 속의 다른 자아가 치고 나왔다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이런 의미에서 여러 인생을 이해할 밑바탕을 깔아주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09-07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저도 읽어볼 생각인데 괭 님 리뷰를 읽으니까 더욱더!!!!^^

독서괭 2023-09-08 11:38   좋아요 1 | URL
흐흐 책나무님 감상도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3-09-08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었고 별점도 잘 준거 같은데

독서괭님 리뷰를 봐도 기억이 잘 안나네요 ㅜㅜ
독서괭님 과 ㅈㅈㄴ님이 극찬하셨으니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3-09-08 11:3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지난번에 새파랑님은 읽다가 멘붕왔다고 하셨어요. 멘붕으로 다 잊음?!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9-08 11:38   좋아요 1 | URL
넹?? 어째서 멘붕이??😱

새파랑 2023-09-08 11:47   좋아요 1 | URL
ㅈㅈㄴ님은 천재신거 같아요 ㅋ 어찌 다 기억하시는지 ㅋ 대박!
후반부가 좀 충격적이었던거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3-09-08 12:26   좋아요 2 | URL
푸핳하 멘붕이 너무 인상 깊었나보죠!
무슨 천재씩이나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9-08 13:21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을 플러팅하시는 거 보니 새파랑님도 잠사모 가입하셔야겠는데요(회원 모집중) ㅋㅋ
멘붕 오셨다면 굳이 다시 읽으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자세한 멘붕 사유가 궁금하긴 합니다만..ㅎㅎ
(여기까지 쓰고 새파랑님 글을 찾아보고 왔는데) 평범한 인생 2021년 12월 읽은 책 중에 탑3로 꼽으셨는데요..? 리뷰도 자세히 써놓으셨으니 리뷰 복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ㅋㅋ

새파랑 2023-09-08 13:2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은 너무 인기가 많으셔서 전 팬클럽은 안들겠습니다 ㅋ
좋은 의미의 멘붕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잠자냥 2023-09-08 14:16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인기는요, 잠사모 회원 둘밖에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회장 괭
회원 은오
&
정체를 알 수 없는데 먹을 때만 오는 이상한 분 다락방


독서괭 2023-09-08 14:36   좋아요 1 | URL
아닌데요. 은오님은 명예회원이고(장래 지위변동을 꿈꾸며) 다락방님은 우수회원이고요, 그외 잠사모 발족과 동시에 자동가입되신 우수회원님들 몇분 계십니다. 명단은 비공개이니 신청하시면 문자로 보내드립니다. 신청서 필수 기재사항: 휴대전화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