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거의 전 생애를 바쳐 특정 주제에 천착한다는 건, 때때로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사상의 탐구가 그렇게 이루어졌겠지.
존 롤스 또한, 오로지 '정의'라는 주제를 파고든 '단일 주제의 철학자'라고 하니, 그의 업적은 그만큼의 노고가 쌓인 결과물인 것이다.
황경식 교수가 쓴 <존 롤스 정의론>은 존 롤스가 생애를 바쳐 연구하여 정립한 정의론을 불과 155쪽에 압축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간명하게 이론의 핵심을 전달한다.
롤스는 자유주의를 대원칙으로 삼는다. 이때 롤스가 가장 경계한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공리주의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빼앗는 노예제조차 허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롤스는 오히려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는' 개인의 자유를 천명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원칙인데, 제2원칙으로서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의 원칙'이란, '최소 수혜자 최대 이득', '공정한 기회 균등'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공정함을 시정하기 위한 방침으로, 현대 복지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거나 지향되고 있는 가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롤스의 이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개인이 가진 천부적 재능과 같이, 통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되는 불평등에 대해서까지 그것이 '정당한 근거가 없다'고 보아 정의를 위해 조정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정의론>의 핵심은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이 우리가 직접 생산한 것이 아닌, 우리에게 우연히 그리고 운명적으로 주어진- 그래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 점이 노직과 같은 소유권적 정의론자와 차별화되는 분기점이 된다. 롤스에 따르면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은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정당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이며, 정의는 그러한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방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롤스는 분배적 정의란 우리의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를 마치 공유 자산이나 집단 자산으로 간주하는 관점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가 곧바로 공유 자산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일 수 있겠지만 이를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 121쪽
찾아보니 존 롤스는 저명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안정적인 학업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이, '무지의 베일'(출신 배경, 가족 관계, 사회적 지위, 재산 상태 등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전혀 모르는 상태를 가정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을 쓰고 각자의 운명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불운한 계층의 일원이 될 각오 아래 선택한 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으로서 정당화된다(48쪽)고 하면서 '최소 수혜자 최대 이득'과 같은 주장을 펼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타산적 합리성rationality'에 의거하지 않고 '도덕적 합리성reasonableness'에 의거해서 행동한 학자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평생의 연구과제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 소명인 걸까?
한때 '~~에 미쳐라' 시리즈가 쏟아져 나와 개그짤로 돌 만큼 현대의 우리는 무엇에 미치기가 쉽지 않다. 유해한 것에 중독되지 않으면 다행일 뿐... 수많은 영상물, 게임물, 유혹적인 유흥의 방해를 모두 뚫고 나아가야만 무언가에 미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마당에 소명이라니? 대부분은 이게 맞을까 저게 맞나 갈지자로 걷다가 똑바로 걸으라는 압박에 못 이겨 적당한 길을 선택하고 내내 두리번 거릴 뿐이 아닌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소명>을 보며 예수가 자신을 가리킨 것처럼 느꼈다는 야닉 에넬은 그의 저서 <고독한 카라바조>에서 카라바조의 그림 일부에서 시작되어 그를 이끌어 간 열렬한 탐닉의 과정을 기록했다.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이나 충격을 받는 일이야 있을 수 있겠으나 그림 속 여자에 대한 집요한 열망은 독특할 정도였는데(솔직히 좀 변태같았다), 무언가에 미치도록 빠져드는 것, 그것을 일생의 소명으로 느끼는 것은 부러웠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
존 롤스의 정의론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개인의 성격이나 관심사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정의는 그것들이 형성되는 방식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제도는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쳐 현재의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까지도 대체로 규정해준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 것이며 현실적으로 가용한 수단과 기대를 고려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 경제 체제는 기존 욕구나 포부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욕구와 포부를 형성하는 방식이요 모태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롤스는 개인의 지능이나 능력을 고정된 자연적 혜택으로만 볼 수 없으며 사회의 기본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물론 불가피한 유전적 요소가 있기는 하나 능력과 재능은 사회적 조건과 관련짓지 않고서는 그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실현된 능력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선택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조차도 무한한 가능성 중 일부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131쪽
여기서 떠오른 것은 <계급횡단자들 혹 비-재생산>을 읽으며 알게 된 '재생산'의 개념이다. 나는 재생산, 하면 임신과 출산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재생산은 계급의 재생산, 말하자면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재생산을 말한다. 롤스가 지적한 사회 제도의 영향력은 정확히 계급의 재생산의 원인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천부적 재능'에 대해서도 정당 근거가 없다고 보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조차 사회의 기본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데, 축구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축구가 인기 많은 스포츠인 환경에서 재능을 키울 만한 뒷받침이 있지 않고서는 그 재능은 빛을 발할 수 없다. 영웅은 시대를 타고나야 하는 법.
계급횡단자로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이 바로 아니 에르노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가정으로 대표되는 계급과 자신이 성장하여 얻어낸 계급 사이의 격차를 다룬 작품을 많이 썼는데, 어쩌면 그것이 아니 에르노의 소명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갈라진 틈 사이를 헤매는 사람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체성.
한국에도 많은 '개천용'들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사회 전체적으로 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실제 계급 간 격차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뛰어넘기 어려운 크레바스가 되어가겠지. 개천용이 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갈수록, 계급횡단자들에 대한 주목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스토리가 무엇인가? 잘 나가던 사람의 몰락 아닌가? 그러나 계급의 골이 깊어갈수록, '넘사벽'의 체념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금수저의 몰락을 바라기보다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 흙수저가 '감히' 금수저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그의 몰락을 내심 바라지 않겠는가. 계급횡단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동경과 시기의 대상으로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갈 것이다.
존 롤스는 '시기심'이 제거된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을 '무지의 베일'과 함께 정의의 원칙을 숙고하는 조건으로 삼고 있는데,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 시기심 없음!- 은 무지의 베일보다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의 오랜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처럼 정의로운 정의론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일까 생각하면...
다시, 소명으로 돌아간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소명이었던 카라바조처럼 어둠을 마구 파헤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태어난 이상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싶은 마음도 있다. 라캉의 'the Thing'(마리 루티의 책에서는 '큰사물'이라고 번역됨)도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끝내 닿지 못하더라도 그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걸음 자체가 뿌듯한 인생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