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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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꿈들은 그냥 빛이 바래고 사라지기 마련인가보다. (109쪽)


가재가 노래하는 곳, 저 먼- 어딘가, 야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노년의 생태학자가 처음 써 낸 이 소설은 로맨스물, 서스펜스물, 법정물까지 장르적 재미를 오가면서도 순문학이 추구하는 섬세한 문장과 시적인 서정성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이다. 늪지에서 자란 소녀의 이미지가 한동안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소설은 1969년에 일어난 체이스 앤드루스 사망 현장을 잠시 보여준 후, 1951년으로 돌아간다. 체이스 사망사건의 조사와 '카야'라는 소녀의 1951년부터 1969년에 이를 때까지의 삶의 궤적을 교차편집하는 방식이다. 

 

카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소녀는 고작 6살에 혼자 살아남는 법을 익힌다. 그녀는 백인이지만 "습지 쓰레기"이며, 1950년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흑인에게 동정받는 처지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하나둘 떠난 형제자매들과 엄마, 마침내 아버지까지 떠나버린 습지의 다 무너져가는 판잣집에 홀로 남은 소녀. 이 설정은 그 자체로 공포스럽다. 세상에, 이 소녀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까? 

카야는 오빠 조디에게 배운 지식과 카야를 학교에 보내려고 자꾸 찾아오는 공무원들을 피해 도망다니면서 누군가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 능숙해진다. 생필품이 필요해 거래를 위해 흑인 점핑의 가게에서 점핑과 그의 부인 메이블로부터 뜻하지 않은 도움과 친절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불안불안 하지만 삶에 적응해나가는 카야. 그러나 사람이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13살 무렵의 카야 앞에 나타난 어릴 적 친구 테이트, 테이트가 떠난 후 나타난 체이스. 체이스는 예상 이상으로 나쁜 놈이었고, 테이트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렇게 누워서 엄마는 말했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며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122쪽)



이렇게 멋진 말을 해 놓고, 카야의 인생에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 주지 않은 작가가 원망스럽지만, 만일 여자친구가 뿅하고 나타났다면 개연성이 떨어졌을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인 1950-1960년, 이 작은 마을의 술집에는 남자만 출입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보트를 타고 습지를 탐험한다고? 그건 "습지 쓰레기"에게나 가능했을 것이다. 혼자 보트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테이트. 그리고 카야를 욕망한 체이스 등, 카야를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남자들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카야의 외로움은 더 깊어졌을 테고, 체이스 같은 놈을 만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해서 웃어주었다. 살면서 해본 적 없는 일인데도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했다. (221쪽)



체이스는 결국 카야와 성관계 하는 데 성공하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뒤로는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 카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만나주지 않던 어느 날(1969년), 체이스는 몰래 카야를 기다렸다가 강간을 시도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체이스는 망루 아래 떨어져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다. 보안관들이 샅샅이 수색해보아도 지문도, 발자국도, 아무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작은 단서들을 모으던 보안관들은 카야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계속 도망치던 카야는 결국 수감된 상태로 재판을 받는다. 


이 법정드라마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결말 부분에서 카야가 숨겨 놓은 시와 조개목걸이가 발견되는데, 그렇다면 체이스를 살해한 범인은 카야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재판 내내 별다른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창밖을 바라보고, 어서 습지로 돌아가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줄 날을 기다릴 뿐이다. 재판 결과, 배심원들은 카야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카야가 사건 당일 다른 도시에서 머물렀다는 알리바이가 있는 반면, 이를 뒤집을 증거는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체이스는 죽어 마땅할 놈이었지만, 살인은 살인. 이 사건과 카야의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 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겠지만 말이다.  (229쪽)



카야가 보인 태도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갑자기 잡혀 끌려온 야생동물과 비슷하다. 그녀는 평생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버림받으며 버텨낸 야생의 존재다. 그녀에게는 인간의 법칙보다 자연의 법칙이 자연스럽다. 체이스가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고 신체를 훼손하고 앞으로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는데 - 야생의 생명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위협을 제거하고자 하는 게 당연하다. 

마을은 카야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를 인간의 법정으로 끌고 와 심판하는 것이 합당한가? 카야는 자신에게 가해진 위협에 도움을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카야가 살인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결과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작가 델리언 오언스는 이 책이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두 남자를 곁에 두었다가 상처 입었지만, 카야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그 상처를 치료하고 스스로 일어난다. 어릴 적 나무에서 뛰어내리다가 발바닥에 못이 박힌 상처를, 바닷물에 소독해가며 끝내 이겨냈던 것처럼. 그 과정은 감동적이지만, 인간적인 방식은 아니다. 야생동물은 다치면 적을 피해 다 나을 때까지 숨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마련. 다시 받아들인 테이트에게조차 끝까지 자신의 약점을 숨긴 카야는, 소외된 자의 외로움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습지 생태학 전문가로 훌륭한 업적을 이루지만, 끝끝내 습지를 떠나지 않은 채 극히 제한된 사람들과만 교류한다. 카야의 삶은 인상적이지만, 누구도 그녀처럼 살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임: 카야...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이 비슷한 나이 딸을 둔 이 아줌마의 마음을 찢었다 ㅠㅠ (망할)체이스와의 사건을 겪으며 카야는 엄마가 떠나야만 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만, 차라리 끝끝내 모르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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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8-08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봤는데 정말 아름다운 영상이었어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존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군요.

독서괭 2023-08-08 17:15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은 영화로 보셨군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도 맞는 것 같아요. 영화도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 넷플릭스에 찾아는 놨는데 제 안의 이미지가 깨질까봐 나중에 보려고요^^

페크pek0501 2023-08-09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가 멋집니다. 소설 내용은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이 리뷰에서 느껴지는 산뜻함은 뭐죠?
이 책이 재밌다는 말을 들어서 저도 언젠가 읽어야지, 했어요.
영화를 먼저 봐야 할지,-그러면 소설 몰입이 엄청 잘 되겠지요.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그러면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읽을 수 있겠지요. 일장일단. 고민 들어가 볼게요. ㅋㅋ(아, 읽고 싶은 책은 왜 이리 많은 겁니까?)

독서괭 2023-08-10 13: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크님^^ 리뷰가 산뜻한가요? ㅎㅎ 굉장히 힘든 상황인데, 습지에 동화되어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카야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그려졌어요.
스포일러가 있는데 그건 안 읽으신 거겠죠?^^; 모바일에서는 경고문구가 안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보통 책을 먼저 봅니다. 영화 먼저 보면 이미지가 너무 고정되어 버리더라고요;
읽고 싶은 책 많아서 늘 힘든 우리 알라디너 인생 ㅠㅠ ㅋㅋ

페크pek0501 2023-08-13 12:55   좋아요 1 | URL
저, 이 책을 구매하면서 독서괭 님에게 땡스투, 했답니다. 1프로 적립되실 거예요.ㅋㅋ
그런데 이 책을 언제 읽을지 몰라요. 읽고 있는 책이 많아서 말이죠. 그래서 딸에게 먼저 읽으라고 줬어요.
제가 읽고 나면 책에 밑줄 치고 코멘트 달고 해서 저는 식구들 중 맨나중에 읽기를 좋아합니다. 맨나중에 읽고 제가 갖는 거죠. 하하~~

독서괭 2023-08-14 13:00   좋아요 1 | URL
앗 페크님, 땡투 감사합니다^^
따님도 재미있게 읽으시면 좋겠어요. 맨 나중에 마음껏 줄 치며 읽고 가진다, 그거 너무 좋네요 ㅎㅎ 저도 딸 크면 같이 책 주고 받으며 읽고 싶어요^^

페넬로페 2023-08-09 1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8월에 분발할 필요가 없겠어요.
리뷰 넘 아름다워요.
저는 이 소설 읽으며 그냥 열불이 터져서~~
카야를 도와주는 사람도 결국은 인종차별 받는 흑인부부잖아요.
뒤에 밝혀지는 반전이 넘 맘에 들었어요.
어떤 리뷰 읽으면 그래도 살인은 안되고 살인을 미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그 말이 맞지만 저는 정당방위라고 생각했어요
끝내 안 밝혀지는것도 통쾌했고요^^

독서괭 2023-08-10 13:40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과찬 감사합니다^^
열불 터지며 읽으셨군요 ㅋㅋㅋ 진짜 카야한테 너무들 하죠 다들.. 그 와중에 평소 따뜻하게 대해준 점핑이랑 메이블 부부, 상점 점원 등 나중에 법정에 카야 응원하러 온 선량한 사람들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저는 살인을 미화했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그런 말씀 하신 리뷰어님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요. 그냥, 백인의 시선, 기득권의 시선, 남자의 시선, 그리고 이들이 만든 도덕률에 기초하여 이 사건을 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잠자냥 2023-08-31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거 전에 다락방 님 리뷰 읽고는 열불 터질 거 같아서 일단 안 읽기로 했던 작품인데....
스포일러가 잊힐 때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3-08-31 16:03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똑같이 열불 터지는 소설인데
저는 목로주점 쪽이 더 제 취향이거든요 ㅎㅎ

독서괭 2023-08-31 18:0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열불 터지는 책들의 목록 하나 만들어주셔요 ㅋㅋㅋㅋ
최근 잠자냥님 열불 터지는 소설 많이 읽으신 것 같던데.. 제 생각엔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닐 것 같고요.
목로주점 쪽이 더 취향이라는 페넬로페님 말씀 보니 <목로주점>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