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은, 성매매를 둘러싼 여성들의 인식의 딜레마를 "크레바스"라고 표현했다. <페미니즘의 도전> 3부에서 다루고 있는 성매매 문제에 대한 그의 분석을 읽고 있노라니, 성매매에 대한 내 입장이 다소 우왕좌왕 하였던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꺠닫는다. "성매매는 포주에 의한 착취이므로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렇다면 딱히 포주라 할 존재가 없는 개개인 사이의 성매매(주로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였고, 이에 대해 애초에 성이 편향적으로 매매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깨달음과 <레이디 크레딧>의 구조 분석 덕에 어느 정도 내 안에서 정리가 되었던, 오랜 시간에 걸친 과정 말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성이란 곧 성매매라고 생각하는 남성 인식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여성주의 실천이 혹시라도 '가장 억압받는 민중 여성'인 성판매 여성의 목소리를 빼앗는 데 일조할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가장 '안전한' 방법인 침묵으로 일관했다. (...)
'근절 대 허용'이라는 이분법은 애초부터 어느 여성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래서 빠질 수밖에 없는 크레바스였다. - 224쪽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더 깊이 다루고 있는 부분은 '성판매 여성의 인권' 측면의 문제로, 더욱 결론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다. '반(反)성매매,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성노동자 인권,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립 구도에서,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 성판매로 유입되는 근본적 원인들 - 남성의 수요와 이를 허용하는 남성성 문화, 여성의 경제적 어려움 등 - 을 그대로 둔 채, 성매매 외의 다른 길을 제시해 주지 않은 채 무조건 금지, 퇴출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정희진은 두 이론 중 무엇이 옳은지 보다는, 여성주의에서 성매매 당사자인 성판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반성적으로 고찰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절대화"(233쪽)하는 것은 위험하고, "성판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계속 업주(남성) 혹은 '일반 여성'의 이해로만 환원"(257쪽)하게 되면 성판매 여성을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며, "여성 억압의 동일성에 대한 강조"(257쪽)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여성주의자와 성판매 여성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에 의해 정해진다. 여성주의는 공통된 본질과 정체성을 지닌 경험적 집단의 투쟁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가 종속적으로 구성되는 복합적 형식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성매매 역시 다른 방식의 접근을 모색해볼 수 있다.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나 성판매 여성의 입장이나 모두 '부분적 진실'이고, '상황적 지식'이다. - 259쪽
그래서 결론이 뭐냐? 성매매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냐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 책은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언급하였듯,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다른 목소리'(17쪽)다. "'다른 목소리'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자기 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목소리'의 잠재적 주인공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다."(17쪽)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39쪽)라는 말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러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을 마치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어떤 이들은 바닐라만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은 로키로드를 좋아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 이론은 (그리고 그 정도는 덜하지만 실용주의는) 한 가지 맛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해석을 위한 도구다. 그것은 아이스크림 스쿱과 같다. - 58쪽
포스트모던 철학에 관하여 모든 걸 해체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다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아주 쬐~끔 퀴어이론을 통해 맛보기 한 내가 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요하다. 굳어진 생각을 깨뜨리기에 좋다고 할까? '답'을 제시하지 않는 정희진의 위 성매매 관련 페미니즘 분석처럼, 그것은 새로운 인식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1장에 나온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 관한 위 설명- "스쿱"이라는 비유- 은 딱 이해하기 좋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방법론으로서 차용하면서도 실용주의 페미니즘처럼 실증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아 보인다.
내가 퀴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장 타자화 하기 좋은'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종은 섞일 수 있고, 국적은 변경될 수 있으며, 계급은 상승/하락할 수 있고, 누구나 사고나 질병에 의해 장애를 가질 수 있으며, 남성도 '여성화'된 모습으로 여성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선천적이라고 보는 것이 통론임을 감안할 때, '퀴어' - 대표적으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 는 '노멀'- 이성애자 및 지정성별과 성정체성 일치자 -과 서로 섞이거나 양자를 오갈 수 없는 '타자'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토록 '타자'로 보이는 것은 '젠더' 개념 자체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고착되어 있고 내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젠더 개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퀴어에 대하여 "그들"이라 지칭하며 타자화 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퀴어들의 입장도 갈리는데,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지 않아요, 정상가족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며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입장과, 보다 전복적으로 이분법적 젠더체계에 의문을 던지고 정상가족 개념 자체의 해체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위험하다'. 위험하다고 여겨져서 더 많은 거부를 불러온다. 그러나 젠더 이분법 해체, 정상가족 해체가 정말로 우리 사회를 흔들 만한 위험인가?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런 이데올로기가 해체되어야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길이 보일 것이다. 저출산 문제도 그렇다. 낙태는 금지하면서(현재는 사실상 금지상태) 낳은 아이는 나몰라라 하는 사회, 오로지 정상가족에서 출산한 아이만 보호하고 미성년자, 비혼자, 동성부부 사이의 출산과 양육에 대해 비난만 하는 사회에는 앞날이 없다...
얘기가 왜 여기까지 왔지? 흠.
마침 2년 전 오늘 쓴 글로 올라온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리뷰에 인용했던 글을 다시 소개하며 마무리 해야겠다.
만약 성소수자의 노출과 애정표현 같은 모습이 불편하다면, 그래서 표현을 막거나 음지로 돌려보내고 싶다면, 사실은 지금까지의 '편함'이라는 것이 다수의 '편함'을 위해 소수자의 권리나 실존을 희생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그런 사회는 과연 윤리적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조수미, '퀴어문화축제: 가시성과 자긍심의 축제, 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