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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내게 가장 좋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표제작이 된 이유가 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라는 언뜻 불가해한 표현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과거에 갇혀 비관에 빠진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위로와 함께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비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제안이 담겨 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따뜻하고 다정하며 가볍지 않은 긍정성을 품고 있다. 다만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다소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 이토록 평범한 미래
화자는 1999년을 회고한다. 2019년에 읽은 소설의 내용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1999년의 일을. 20년 전 동반자살을 꿈꾸었던 지민은 이제 화자와 결혼하여 함께 그때를 돌아보고 있다. 지민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것은 예언자라 칭하던 줄리아가 둘에게 한,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이다'라는, 평범하지만 시차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기보다 미래를 상상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29쪽)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34,35쪽)
#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보다 2년 전에 발표된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역시 미래를 기억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이 소설집 제일 마지막에 배치되어 수미쌍관의 느낌이!
화자는 입원한 할아버지가 '바르바라'라는 말을 자꾸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의 기억을 추적한다. 할아버지의 구술 기록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녹취한 자료를 듣는다.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224쪽)
"우린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 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 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234쪽)
세대와 세대 사이의 교류와 소통, 그리고 책 속의 기록 등을 통해 우리 정신의 삶은 과거 80년+나의 삶 80년+미래 80년 합하여 240년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말은 어쩐지 감동적이면서, 세대간 갈등에 경종을 울리기도 하는 것 같다. '고독'은 정신을 확장하지만 '고립'은 비극을 초래한다.
#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 사랑의 단상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와 '사랑의 단상'도 좋았는데, 이 두 작품은 2014년에 발표된 글로, 세월호 사건을 추모한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화자가 희진으로부터 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 메일은 희진과 함께 일본에 갔던 10여 년 전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현재의 배경은 2014년 4월, 당연히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인디 가수로서 일본에 초청받아 간 희진은 공연 마지막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직접 지은 노래를 부르다가 울고 만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를 초대했다는 일본인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희진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바로 10년 전, 2004년 봄에 희진이 화자와 함께 방문했을 때, 자신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한 사람의 인생에 확고한 기억과 희맘의 끈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희진은 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181쪽)
'사랑의 단상 2014'는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와 함께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담긴 단편이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진 지훈의 기억들이 다소 가볍고 낭만적으로 제시되다가, 마지막에 반전이다. 웹사이트 검색창에 '사랑해'라고 입력했더니 나온, 유족들의 편지...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211쪽)
두 작품을 통해 작가는 잊지 말자고, 기억하자고,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 진주의 결말 (독서괭 Best!)
여러 작품들이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진주의 결말'이다. 이 작품이 너무 좋아서, 빌려 읽은 이 책을 사서 소장해야 하나 고민중.
'진주의 결말' 속 화자는 <사건의 결말>이라는 프로그램(그것이 알고 싶다와 비슷한 듯)에 출연한 범죄심리학과 교수다. 그가 분석한 사건의 피의자인 유진주. 그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살던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몇 년 동안 치매를 앓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존속상해치사 혐의를 받는다. 불구속 상태로 조사받던 유진주는 아버지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제주도로 도피한 후, 화자에게 메일을 보낸다. <사건의 결말>을 통해 화자는 유진주의 삶과 아버지의 사망 사건, 이어 방화에 이르기까지를 "그럴싸한 이야기"(87쪽)로 엮어낸다. 수동적으로 억압을 견디던 피해자의 감정 분출, 그것이 사건의 전말이라고. 하지만 유진주의 메일에서 그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87쪽)
'진주의 결말'은 자꾸만 논리정연하게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우리의 본능에 경고한다. 우리는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85쪽). 누군가의 인생이, 처지가, 고통이 나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설 때, 한계를 인정하기보다는 내 이해의 범주 안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처지를, 고통을 우겨넣고는,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유진주는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73쪽)이라는 화자의 말을 가슴에 품으면서도, "모두 각자의 달을 향해 서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말하는 게 분명 제 마음일 텐데도 전혀 제 마음 같지가 않았어요.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가 몰리고 있었다는 게 선생님의 전제인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그 다음의 분석도 죄다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예요. 생각해보세요, 선생님. 저도 달을 향해 서 있고, 선생님도 또 저의 이웃들도 달을 향해 서 있어요. 모두가 각자의 달을 향해 서 있는 거예요.(...)" (73, 74쪽)
제가 공책에 받아 적은 끔찍한 글을 읽고 난 뒤에도 저를 이해해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85,86쪽)
일독을 권합니다!!
아, 2년 쯤 전에 읽다가 중도에 끊겨 버려 끝내지 못한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다시 읽어야겠다.. 빨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