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평점 :
에이모 토올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은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원제인 <Rules of Civility>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연인'을 제목에 넣었는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중 일부에 불과한 '연애'를 중심적인 요소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원제를 더 살리는 제목이었으면 좋았겠다.
다 읽은 후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근래 읽은 가장 낭만적인 소설"이라고 100자평을 썼다. 그 낭만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20대가 표상하는 젊음: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은 대부분 20대이다.
1938년의 뉴욕이 가진 분위기: 대공황(1929~1939)에서 벗어나는 시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재즈클럽, 맨하탄의 밤을 밝히는 불빛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는 도시.
회상의 형식: 중년이 된 화자가 20대 시절인 1938년을 돌아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을 추억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상주의: 위의 모든 요소들이 결합하여 강렬하게 지향하는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동경.
이 책을 읽고나면 누구나, 20대의 나는 어땠지? 하고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혹은 있을 거라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너무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20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보스턴 출신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에서 영문학 석사를 했으며 투자전문가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이력 때문인지, 부르주아적인 느낌이 있다. 뭐랄까, 부르주아가 노동자의 노동이나 거친 삶에 대해 갖는 막연한 동경? 낭만화?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 미국의 빈곤층이 이 작품을 볼 때 어떻게 느낄지는 궁금하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1938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는데 당시 미국 최빈곤층의 삶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뉴욕이라는 도시다. 이 도시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번도 뉴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궁금해졌다.
뉴욕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 - 92쪽
신문판매대의 노인이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저거야. 남들처럼 뉴욕으로 도망칠 수가 없잖아." - 142쪽
"뉴욕은 정말 사람을 확 바꿔놓지 않아?" - 184쪽
바람이 아무리 괴로워도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 맨해튼은 정말이지 현실 같지 않을 만큼 너무나 찬란하고, 밝은 약속들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아서 평생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실제로 그곳이 손에닿지는 않을지라도. - 500쪽
줄거리를 절반만 얘기해 볼까.
접힌 부분 펼치기 ▼
도입부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내 취향이다.
1966년, "맨해튼에 사는 부유한 중년"인 '나', 케이티(캐서린) 콘텐트는 남편과 함께 사진전에 참석한다. 그 사진들은 1930년대 말 뉴욕 지하철에서 찍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케이티는 그 안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 팅커 그레이. 그 얼굴로 인해 그녀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이라는 소제목이 끝나는 부분에 "뉴욕, 1969년"이라고 써 있는 건 뭘까? 작가가 된 케이티가 이 글을 썼고 그 날짜가 1969년이라는 걸까? 작품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한 장치인가.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리뷰를 쓰려고 다시 보니 그런 것 같다.
추억을 소환하는 이 낭만적인 도입부에 끌린 나는 순식간에 이 책을 완독.. 하고 싶었으나, 여건상 찔끔찔끔 읽다가, 이래서는 빠져들지를 못하겠다 싶어 중반부터는 밤에 시간을 내서 쭉쭉 읽어나갔다. 그러자 너무 재밌는 거다, 특히 중반 이후는 자러 가면서 아쉬울 정도였다.
과거 소환은 1937년 12월 31일부터 시작한다. 케이티는 친구인 이브 로스와 함께 재즈바를 찾았다. 이날 이 재즈바에서 이들은 운명적으로 팅커(시어도어) 그레이를 만난다. 팅커는 "돈 있는 집에서 예절 교육을 받으며 자란 젊은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굉장한 미남"(31,33쪽)이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데, 팅커는 "매사추세츠 출신이고, 프로비던스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월스트리트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케이티는 "다시 말해, 보스턴의 백베이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을 다녔으며, 자기 조부가 세운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38쪽)며 팅커의 말을 해석한다. 이걸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책의 후반까지 읽으면 이 부분의 의미심장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사람은 1938년을 함께 맞이하고, 우정을 이어간다. 팅커를 보자마자 관심을 표하며 '내 거'라고 선언한 것은 이브지만, 왠지 팅커와 케이트 사이에 교감이 형성되어 가는 와중, 세 사람의 관계는 자동차 사고로 급선회한다. 팅커가 운전하던 차에 셋이 함께 탔지만 그중 이브만이 얼굴에 큰 상처를 입는다. 얼굴의 흉터와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이브를, 팅커는 자신의 집에서 보살피게 된다. 케이티는 하숙집을 나와 방을 얻는다. 이 사고 장면이 있는 소제목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연극이나 소설에서 이야기가 꼬이고 막혔을 때 초자연적인 힘이나 전능한 신 등을 등장시켜 이를 해결하는 것)로 붙인 게 재밌다.
이로써 팅커는 이브의 차지가 된다. 이브보다 케이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 팅커가 한줄기 희망으로 케이티에게 키스를 하지만 케이티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고착된 것으로 보였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케이티는 승진 제안을 걷어차고 존경하는 편집자가 있는 출판사로 직장을 옮긴다. 그곳 직원들과 어울리면서 디키 밴더와일을 만나는 등 상류층 청년들과 어울린다. 출판사에서 잡지사로 이직도 하고, 디키 일행을 따라서 간 홀링스워스 집안 파티에서 월러스 월코트와 재회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흔한 이야기 아닌가?
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친구인 두 여성. 한 사람이 남자를 차지하고, 다른 여자는 시기심에 이를 갈며 상류사회에서 다른 남자를 찾아....
이 책이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중반 이후에 드러난다. 이브는 모두의 세속적 예상을 뒤엎는다. 케이티와 이브의 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팅커는 케이티가 넘겨짚었던 그런 인물이 아니다.
더 이상의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되니 생략하고, 이 책의 매력을 꼽아보자.
1.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 책, 책!
곳곳에서 책이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헤밍웨이가, 펄 벅이, 디킨스가, 소로우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케이티는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집에도 버섯처럼 책이 자라고 있다. ㅋㅋ
"책이…… 아주 많네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병이죠."
"혹시……… 치료를 받고 있나요?"
"아무래도 불치병 같아요."
그는 서류가방과 포도주를 아버지의 안락의자에 놓고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건…… 듀이 십진분류법인가요?""아뇨, 그래도 비슷한 원칙이긴 해요. 그쪽은 영국 소설들이고요, 프랑스 작품들은 부엌에 있어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서사시들은 저쪽 욕조 옆에 있고요."
(...)
월러스는 내 침대 밑의 책더미를 가리켰다.
"그럼 저…… 버섯들은?"
"러시아 작가들이에요." - 296, 297쪽
2. 인물들의 매력 + 뉴욕의 매력
각각의 인물들이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케이티는 러시아인 부모를 둔 이민자 2세로 노동계층에서 공부를 통해 자주성가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상류사회 인물들과 어울리며 부를 즐기는 등 세속적이랄까 현실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브는 중서부에서는 경제적으로 최상위층으로 꼽히는 집의 딸인데 아버지의 도움을 거절하고 마음대로 산다. 대담하고 거침없는 모습.
"(...)몇 주 전 주말에 웨스트포트에 있는 저 인간 집에서 다 같이 파티를 했는데, 저녁 식사 후에 저 인간 아내가 피아노로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동안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 인간이 하녀한테 식품저장실에서 뭔가 보여줄 게 있다고 말하더라고. 나중에 내가 가보니까 저 인간이 그 아가씨를 빵 상자 옆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막 목을 물려는 참인 거야. 그래서 내가 감자 으깨는 기구로 저 인간을 쫓아버렸지."
(...)
"네가 나타나서 그 아가씨도 운이 좋았다고."
이브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운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식품저장실까지 저 자식을 ‘미행‘한 거니까."
이브가 감자 으깨는 기구를 손에 들고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이 사는 뉴욕의 주택 복도를 배회하는 모습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훌쩍훌쩍 뛰어 몸을 숨겨가며 비열한 인간들을 죄다 혼내주려고 나선 모습.
"그거 알아?" 내가 새로운 확신을 갖고 말했다.
"뭘?"
"너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야." - 190, 191쪽
팅커는 "불사조" 같은 인물인데, 1938년 당시에는 품위를 지키며 쳇바퀴 돌듯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끔 내 기분이 바로 그래요. 내 고객 중 절반은 알래스카를 향하고, 나머지 절반은 에버글레이즈를 향하고 있는데...... 나는 강둑에서 강둑을 오가고 있는 기분." - 73쪽
앤 그랜딘 부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케이티에게 야망을 품으라고 말한다.
부인은 드 로셔의 박스석을 가리켰다.
"제이크 옆에 있는 서른 살의 금발 여자 보여요? 제이크의 약혼녀예요. 캐리 클랩보드. 캐리는 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고 애를 썼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세 채나 되는 집에서 부엌 하녀들과 상차림과 골동품 의자의 커버 교체 같은 걸 감독하며 행복해 하겠죠. 그거야 다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내가 당신 나이라면, 캐리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을 거예요. 제이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겠죠." - 180쪽
상류층 자제인 디키 밴더와일과 월러스 월코트도...
월러스 아파트에서 둘이 책 바꿔 보는 거 너무 좋았고(307쪽), 디키가 종이비행기 날리는 장면은 최고였다(451쪽). 종이비행기 이 장면을 읽으면서 아, 이 책 영화로 만들면 참 좋겠네 싶었는데, 영화는 아직 없는 듯.
3. 우정.. 우정!!
이브와 케이티의 우정이 팅커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날 밤 늦게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복도가 유난히 조용한 가운데, 혼자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또렷하게 떠오른 사람은 이브였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은 오늘처럼 서로 적당히 의견이 어긋나기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디너파티에 초대받아서 다음 날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붙들려 있을 때, 베개에 기대앉아 내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이브의 존재가 내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는데..... - 157쪽
이 작품 다음에 쓴 <모스크바의 신사>는 더 평이 좋던데, 무척 기대된다. 이 책보다 더한 벽돌이지만....^^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하며 마무리.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 사람은 반드시 소박한 즐거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들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는 찰스 디킨스의 책들이 아버지의 커피 한 잔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외계층에 속하면서도 용감한 책 속의 젊은이들과 아주 적절한 이름을 지닌 악당들에게 조금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우울할 때도 디킨스 소설을 읽다가 정거장을 지나칠 만큼 책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209,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