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K씨의 폭탄선언 [06/03/08]
유명 소설가인 K씨가 말했다. “앞으로는 (소설 집필) 청탁을 받지 않겠다. 대신 장편을 쓴 다음, 경매에 부치겠다. 제일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겠다!”

소주잔을 부딪치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문화 상품의 유통에서 경매라는 제도가 중요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K씨의 선언은 조금 낯설었다. 물론 책은 문화 상품이다. 그러나 K씨는 이제 원고 단계부터 상품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원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신문 기사도 원고요, 시나리오도 원고다. 게임도 스토리 원고가 없으면 안 된다. ‘원고’란 다시 말해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 콘텐츠’다. 책이 아닌, 콘텐츠를 가장 높은 가격과 조건에 팔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설가들은 사석에서 구두약속 비슷하게 출판계약을 하고 책을 내왔다. 알음알음으로 원고를 전달하기도 했고, 신인들은 출판사로부터 “놓고 가세요. 연락 줄게요”라는 기약 없는 대답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대신 출판사 쪽에서는 독자들 반응이 좋은 유명 작가의 원고를 받기 위해 공을 들였다. 여행을 보내주기도 하고, 선인세(先印稅)를 듬뿍 안기는 경우도 많았다.

문학은 물론이고 순수 음악, 연극 같은 기초예술 분야는 전통적으로 그 작품들이 사고 팔리는 시장(市場)과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문화계에도 ‘공연 쇼핑몰’이 생기고 제1호 쇼 호스트로 나선 이가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공연할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예술가와 투자할 만한 콘텐츠를 찾고 있는 투자자 모두에게 필요한 공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작가와 작곡가, 연출가와 무대 디자이너를 ‘판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공연계의 복덕방’을 자처했다던데, 이 역시 일종의 경매 원리를 차용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미술계에도 화랑보다 경매시장이 활황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서울옥션은 이른바 ‘작가지수’라는 것을 만들어 작가들의 작품 값에 대한 기준치를 마련하고, 시장에서의 가격 변화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너무 상업화로 치닫는 것은 아니냐”고 얼굴을 찡그렸다.

따지고 보면 출판계가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와 사재기 문제를 놓고 홍역을 치른 것도 비슷한 이유다. 문화적 소비자로서 선택을 할 때 독자들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그 무엇’에 기대고 싶어한다. 이때 ‘밀리언 셀러’라는 말은 무엇보다 매력적인 선택의 기준이다. 영화도 같다. ‘1000만 돌파’, 혹은 ‘연속 4주 전미 박스 오피스 1위’라는 말처럼 당기는 말도 없다. 가장 많이 낙찰된 작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형 문화 경쟁력은 모든 예술가들을 일단 상업주의 시장에서 철저히 발가벗기듯 계량화하는 경험을 한번쯤 가져본 이후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인 황지우 시인은 말했다. “내 삶 자체가 이미 시장에 편제되어 결정되고 있는데, 관념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위선이다. 오늘날 시장자체가 불가항력적이다. 그 어느 예술도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소설가 K씨의 말에 웃던 사람들이 웃음기를 거두고 허리를 세웠다. 완성된 ‘원고’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디어와 집필 계획서 단계에서 사실상의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다빈치 코드’로 대박을 터뜨린 댄 브라운의 차기작 국내 판권이 수백만달러까지 호가하면서 거의 경매 상태에 있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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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3-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어요.

승주나무 2006-03-0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꾹 누르고 퍼갈게요^^

하늘바람 2006-03-0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승주나무님 오랜만이에요

stella.K 2006-03-0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작가의 반란? 아님 지능이 좋아지는 걸까요? 암튼 새로운 발상이네요.^^

하늘바람 2006-03-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기작가는 정말 돈 ㅁ낳이 벌겠어요. 험란한 인기작가의 길이지만 그만큼의 보상이니 기쁘겠지만 그래도 뭔가 씁쓸하네요. 작가가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