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걱, 책 이미지 올리다가 다 날렸네요. 바부팅이 알라딘. 

(다시 올릴 의욕이 생기지 않네요. 차차 수정하겠습니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에 실린 글들 중 잊이버리고 싶지 않은 글귀들을 적어보았습니다. 



P10. “그럼 보이지 않는 존개가 될 때 얼마나 슬펐어?”

그건 마치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에서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닦고 있는 할머니가 된 것 같았어.”

그건 무슨 말이니?”

사실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본적이 있어. 손님이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혼자 식탁 닦고 있는 거. 그걸 보니까 금방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 월급이 깍인다거나 가게 문을 닫는다거나. 나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을 때 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만 같았어. 그러고 보니 손님도 없는데 불 켜 놓고 전기세만 나가는 가게를 보는 것도 슬퍼. 불 꺼진 가게도 슬퍼. 영업을 중단합니다. 라고 써 붙인 가게도 슬퍼.”

 



어렸을 때 만화 <뽀빠이>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라깽이 올리브는 어느 날 먹성이 아주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이렇게 외쳐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그때 이후로 줄곧 제게 남은 문제는 하나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저는 뭔가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하나의 사랑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결국 디테일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디테일로 기억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사전>에 나오는 한 남자의 편지에서처럼요.

 

나를 당신과 사랑에 빠졌던 남자로 추억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지평선에 뜬 작은 무지개를 보여 주러 당신을 앨버타 주로 데려갔던 남자로, 스위스의 산장에서 당신에게 담배를 가르친 남자로, 당신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영국에서부터 달려왔던 남자로 기억해 주십시오. 나 역시 당신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p18. 마라도나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만든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에서 이렇게 자기 인생을 노래합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했지만 축구공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p33.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흥미에서 다른 흥미로 끝없이 관심사를 옮겨 가기만 하는 그런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p35.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정원사가 어린 나무를 보듯이 인간은 어린아이를 본다. 특정한 내재적 속성을 가진 존재, 적절한 토양과 공기와 빛이 제공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룰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p39.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돌아가고픈, 사랑하고픈, 존재하고픈 욕망에 대해서 시를 쓴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비수에 새겨진 꿈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키우는 시간은 시간의 척추입니다. 우리 몸에도 척추가 있지만 시간에도, 영혼에도 척추가 필요합니다.

 

p41. 저는 어디선가 사랑하는 연인이 어디에다 입을 맞출지 몰라서 온몸을 떠는 존재란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우리에겐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어떻게 생기는가 깊이 성찰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자면 의지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무게로 치자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단한 핵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행성이 되고 또 그만한 무게와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저는 이것을 앙드레 고르에게 배웠습니다. 소외된 개인은 내가 이것을 원해도 될까?” 라는 도덕적 질문에 대해 항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이야.”,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능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슈발의 이야기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꿈, 나의 관심사, 나를 감탄하게 하는 것, 나를 사로잡는 것이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알고자 노력하면 됩니다.

 

어떤 분야에서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라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책은 저를 숨 쉬게 합니다. 아주 좋은 책을 만나면 저는 어쩐지 크게 한 번 숨을 몰아쉽니다. 어쨌든 책 읽기는 쉬는 시간입니다. ‘숨 쉬는 시간입니다.

 

칼 세이건은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어떤 종의 식물과 동물을 키우고 어떤 것들을 죽게 할 지를 신중하게 선별해 왔다고 말하려고 이 이야기(헤이케 이야기와 사무라이 게)를 했습니다. 벼가 인간을 좋아해서 자신들은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며 찾아온 것이 아니란 거죠.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처음엔 인간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제리 카플란의 주장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해고당했지만 복직하고 싶죠. 일을 하고 싶죠. 꿈이에요. 그런데 꿈이 이뤄져서 복직이 된다 해도 야, 이제 복직되었으니 다 되었다, 하고 살고 싶지가 않아요. 다시 월급 받게 되었으니 만사해결이다, 하고 그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 고통을 겪으면서 예전에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남의 일이 잖아요.’ 이 생각 말입니다. 이게 무서워요......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아 보고 싶어요.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 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 해고 노동자 이창근의 말

 

윤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나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된 사람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까 생각하면서......

 

오에겐자부로, <우울한 얼굴의 아이> 중에서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왜 책을 읽느냐고요? 모르면 자꾸 되돌아가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우리는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 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했다고요. )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삶은 원래 무섭다는 것을 인정하란 거였습니다. 삶이 지닌 무서움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가 될 거라고요.... 진짜 오만한 사람은 그 무엇에도, 자신의 고통에도, 타인의 고통에도 상처 받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릴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죽어서 사라진 것도 나의 마음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내가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을 때마다 그 사람은 나의 내부에서 독특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스카 와일드도 <옥중기>에서 릴케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즐거운 날이 아니라 굳어 버린 날이라고. 그래서 그는 슬픔과 고통을 애써 잊으라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모든 종류의 평범한 것들을 섭취하여 아름다운 살덩이의 형태, 머리카락, 입술, 눈의 색과 그 곡선 등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환기에 선 영혼도 육체와 같은 영양 섭취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자신에게 있어서 비열하고 잔인하며 굴욕적인 모든 것을 진지한 사고의 흐름이나 고귀한 정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은 이러한 것들 속에서 그의 주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얻을 수 있으며, 원래 그를 모독하고 파괴하려고 했던 것을 통해서 그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형식이야말로 인생의 비밀이라고 말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슬픔은 귀중한 것이 되고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환희는 커집니다. 이런 식으로 단순히 표현하는 것이 위로의 한 방식이 된다는 거죠.

 

책 읽기도 형식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책 읽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라는 형식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멜로디 한 소절보다 짧을지도 모르는 인간은, 결국 시간일 뿐입니다.

-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 전기>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 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중략)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중략)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래서 위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고, 타인을 위한 용기이고, (고통의 망각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위로는 기억이 그러하듯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입니다.

 

책이 쓸모가 있나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앞으로 예상되는 높은 구조적 실업률에 비추어 보면 정말 무책임하고 악의적이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현 경제 시스템은 우리를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되니까 말이다.

고용불안으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처방은, 심리적, 경제적 압박을 일으키는 구조적인 힘에 대항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맞춤형 근심 해소 방안들은 긍정적 사고 훈련, .....베스트셀러 <시크릿>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아류들......19세기 말 미국에서 발달한 소비 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 댄 하인드, <대중이 돌아온다>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키치적 인간입니다.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길 바라는 태도. 그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입니다.

 

키치적 인간은 현실의 이면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을 수용합니다. 결국 우리가 찬양하는 키치는 현실과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를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추방하려 합니다.

 

적도 지역에서는 지극히 가늘고 실처럼 생긴 벌레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먹는다. 그러면 무당을 부른다. 그가 마술피리를 불면 벌레가 홀려서 조금씩 몸을 펴면서 밖으로 나온다. 예술의 피리도 그러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책은 바로 그런 쓸모입니다.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에 한계를 주고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 피리입니다.

 

노인이 장승에 새긴 글귀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공개 선언이었습니다. 노인은 자기 삶에 대못을 꽝 박듯이 글귀들을 새겼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풀을 뽑는 것이 자기 수양이자 기도하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 뽐을 때마다 헛된 마음을 한 자락씩 뽑아냅니다.

 

채송화의 다른 이름은 일락화예요. 하루만 폈다가 싹 져 버려요. 시들지도 않고 깨끗하게 져요. 이 나이가 되니까 그렇게 깨끗하게 피어 살다가 지는 것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을 두루마리 책의 이미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생각 속에서 우린 등 뒤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을 지고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겁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이미지에서 출발해 첫번째 사랑과는 다른 두 번째 사랑을 만드는 인생의 지혜에 대해 말을 합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인생의 지혜는 바로 인생 경험과 생애 커리큘럼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독일 소설가 제발트는 자신의 의지 만으로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다.”라고도 말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두가 괴로움에 다 같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된다면구원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우리 영혼을 통해 꿈꾸는 존재입니다.

 

독서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니까요. 우리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세계에 뛰어듭니다. (중략)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독서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고 정리해 둘까요. 고대인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태아의 자세로 주검을 매장했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에릭 클랩턴이 나는 명예를 얻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아예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닯는다. 내 생각은 평범하다. 평범함의 승리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하는 거.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최선의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내 작업에 필요한 최선의 것을 고안해 낼 수 있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텍스트가 간접적으로 들리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게서 최상의 즐거움을 생산해 낼 것이다. 내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머리를 자주 들고 다른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중략)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 태도, 응달 지역, 사슴의 뿔, 상아 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


-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공감과 관련해서 제가 제일 즐겨 인용하는 것은 남아공의 우분투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풀어보자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담보되고 그 관계가 불가해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지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 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굴욕이나 억압을 당할 때 자신 또한 같은 일을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기억, 경험, 세상을 연결시켜 본단 뜻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일은 개별성의 운명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날이다. 왜냐하면 보편성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특수한 것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이날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다. 자기의 출생일은 인격의 출생일과 동일하지 않다. 자기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그 자신의 출생일이 있다. (중략) 어느 날 그것이 무장한 인간처럼 인간을 급습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취한다.....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세계의 한 파편, 심지어 그의 고유한 의식 이전의 존재이다. ....

 

- 로렌츠 바이크, <구원의 별>

 

이것이 우리들 인간 모두의 기원의 관한 비밀이기 때문이란다. 서로 포옹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서 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는 거야. 서로 껴안음으로써 서로 두드리지 않아도 우리는 울리는 거란다. 포옹으로 옛날 얼굴들과 옛날 몸들이 뒤섞이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이 재생되고, 그렇게 해서 다시 젊어지는 거야. ”

 

-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움베르트 에코는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첵은 죽지 않는 능력을 준다. 단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각을 공부했으며, 그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그 셋째 권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대신에 조각이란 낱말을 놓아 보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정당하고 옳은 일이었다.

 

- 릴케, <릴케의 로댕>

 

레마르크의 <개선문>에는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은 언제나 외톨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고독한 것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근처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렇게 고독한 것은 아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라는 말을 했습니다.

 

벤야민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 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 즉 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는 것! 나에곧 생존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는 거야. 자신이 정말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는 유용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무엇에 도움이 될까? 나의 내면에는 무엇인가 있어.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루쉰은 책을 공기구멍이라 했습니다. 우린 사방이 막힌 어딘가에 갇혀있습니다. 숨구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책과 삶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면, “걸작은 시대를 통해서 매번 재발견된다. 그리고 우리는 걸작 속에서 매번 우리를 재발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우리 삶은 중간 부분이 펼쳐진 책이다.”라고도 했습니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한하다고 했습니다.

 

책 하나하나가 우리를 부르는 영혼이고 인간 하나하나가 서로를 부르는 영혼입니다.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르트르의 고매성의 협약이란 말입니다. ...고매성의 협약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고 최고의 기대를 하는 겁니다.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가버렸구나. 이 구석에서

어느 날 밤, 네 곁에서,

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

 

- 세사르 바예호, <트릴세 XY>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인간의 대지>에서 길을 잃고 리비아 사막을 헤매는 는 사막 여우에게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소란함 속에서도 들리는 침묵과 신비의 소리를 발견하듯

순수와 맑음으로 만나진 자연과

동심으로 어우러진 사츠키와 메이 그리고 토토로의

꾸밈없는 표정 하나하나를 순간 닮아

행복해진 내가 그곳에 있었다

또한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 전진성,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비밀일기

 

제가 읽었던 책들도, 그리고 제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영혼도 이렇게 제 혈관 어딘가에 흐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을 지금 당장은 제가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것들이 ,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나오게 해 주십시오. 절 혼자 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은 뒤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 로르카, <인상과 풍경>

 

나는....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일이다.

 

- 장 그르니에, <>

 

 

살이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위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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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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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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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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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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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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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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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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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쓴 리뷰가 아닙니다.

 

신간 평가단의 책과 리뷰가 겹치게 될 때마다 고민이다. (신간평가단의 선구안은 신뢰할만하다.) 이미 리뷰가 넘쳐나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보태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들은 폼 나게 책 받고 쓰는데 책도 못 받고 리뷰 쓰는 나는 얼마나 속없고 한심해 보일까? (책도 못 받고 리뷰 쓰는 사람이 있다고?! 아니, ?)

, 쪽팔려. 부끄럽다.

 

그렇다고 페이지가 줄어들 때마다 안타까워한 책의 독후감을 건너뛰어야만 할까? 리베카 솔닛은 페넬로페다. 솔닛은 마치 오딧세우스를 기다리듯, 아직 오지 않은 독자를 고대하며 이야기의 실을 감고 이야기의 실을 푼다. 리베카 솔닛은 셰에라자드다. 나는 마치 술탄마냥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랐다. ‘온기라는 씨줄과 냉기라는 날줄이 직조해낸 테피스트리의 실 한 오라기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리베카 솔닛은 얼음처럼 날카롭고 호흡처럼 따스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poesis’ 만들어내고, ‘to spin’ 잣는다.

 

나방이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신다.

 

과학기사의 제목이라니. 시가 아니었다니. 이 문장이 나를 싣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나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먹고 사는 나방이었을까. 화가 아나 테레사 페르난데스는 얼음 하이힐을 신고 얼음이 녹아 맨발이 될 때까지 서 있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

하여간, 설치미술가들이란! 너나할 것 없이 쓸데없는 짓거리들을 하는군.’

 

추위로 손발의 감각이 없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따뜻해진 후에야 비로소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신데렐라>에서 여성은 신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킨다. 반면 아나는 신발을 부수고, 맨살과 얼음 사이의 투쟁을 통해, 그리고 현실에 맞지 않는 동화와 그녀 자신이 가진 굴복하지 않는 온기 사이의 투쟁을 통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 한번도 <신데렐라>를 저렇게 해석해 본적이 없다니! 남성인 나는 얼마나 무감각한지. ‘신데렐라 형여성을 비판하기만 했을 뿐, 여성을 신데렐라 화하려는 사회의 구조는 간과했다. 그렇다. 신발에 맞추도록 여성을 강요한 건 남성이었다. 남성은 여성의 눈물을 먹고 사는 나방이었다.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시는 나방이나,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같은 건 서로 다른 존재의 공존일 뿐이다.

 

솔닛은 맨스플레인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솔닛은 서론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의 공존, 공감, 연대를 말한다. 리베카 솔닛은 나병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나병은 특정 박테리아에 대한 감염 때문에 발생한다. 나병은 대체로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감각의 마비 때문에 병이 악화된다. 솔닛은 묻는다. ‘나 역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손발 어딘가가 마비된 것은 아닐까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할 때, 나병 환자의 살이 썩어가듯 우리의 영혼도 썩어갈 것이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무감각이 자아의 경계를 수축하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서 카이의 심장은 트롤의 깨진 유리에 박혀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된다. 카이는 자신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게르다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눈물로 인해 카이는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토해 낸다.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얼음 같은 심장을 깨부순 셈이다. 키츠의 시구처럼 현세는 영혼을 다듬는 골짜기여서 응급상황과 어려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책 역시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이 눈물을 마시고 나는, 나를 둘러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다.

온기로 가득 차.

 

밑줄 그은 문장


“가까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전한다. 뉴욕에서 몇 년을 지낸 후 뉴멕시코의 시골로 이사한 조지아 오키프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인사말을 덧붙였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철학자 찰스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책 <용서>에서 말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

얼음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Glace에는, 거울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얼음, 거울, 유리.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을 ㅗ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고대 그리스어 ‘프시케’는 숨, 생명, 삶의 본질적인 활기, 영혼을 뜻하고, 때로는 영혼의 상징인 나비를 뜻하기도 한다.

냉기는 거의 모든 것을 보존한다. ‘동결하다freeze’라는 단어가 현대 영어에서는 ‘시간을 멈추다, 진행을 멈추다, 영상을 멈추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시간이 강이라면 아마 그 물은 얼음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흐름을 멈추고 정지한 시간이 극지방의 완고한 안정감이다.

극지방의 태양에 관해 쓴 지 1년쯤 후, 그러니까 남편이 갑작스레 익하한 후에 메리 셸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마음이 차가운 사람인 걸까?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마음 한가운데 있는 얼음같이 차가운 무언가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이 차가운 심장에서 나온 감정이 만들어 내는 눈물은 뜨거운 것임을.”

p94. 이스터 섬의 원주민이던 라파누이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 의식을 좀 더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예언자들은 의식에 참가할 사람들을 꿈에서 선정했다. 누군가의 꿈에 등장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된 것이다. 참가자들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으로 헤엄쳐 간 후에, 그해 처음 낳은 검은등제비갈매기의 알을 찾아서, 다시 헤엄쳐 와서는, 알을 깨뜨리지 않고 절벽을 올라와야 했다. 익사하거나, 상어에게 잡아먹히거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참가자들도 종종 있었다. 우승자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홀로 지내게 되지만, 1년 동안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부족은 그가 가져온 검은등제비갈매기 알 덕분에 그 섬의 모든 알을 독점할 수 있었다.

버드맨 의식은 어떤 작은 물건을 전리품으로, 영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혹은 삶을 바꾼 어떤 징표로 여기는 수많은 이야기 중 극단적인 예이다.

검은등제비갈매기 알은 점이 찍힌 작은 알일 뿐, 별다른 특징도 없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은 마케마케makemake다.

p99. 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다. ..도서관은 세상으로 가득 찬 은하수다. 모든 독자는 우다오쯔이며, 상상력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책은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풍경이다.....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p100.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다.....나는 침묵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고 청중 앞에서 낭독할 때라도 여전히 부재하며 멀리 있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미지의,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09 성 프란체스코는 젊은 시절 말라리아에 걸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요양 중에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깨달았다. 모기 한 마리가 그런 영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p111. 그 혈액세포의 생성 과정을 ‘조혈(hematopoiesis)’이라 하는데, 각각 ‘피’와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시(poetry) 역시 ‘포에시스poesis’에서 유래 했는데, 여기에는 예술이 단지 모방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사상이 깔려있다. 우리가 ‘시’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단어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의 모든 ‘만드는 행위’를 보았던 것이다.

p115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마라.” 이번 모험은 두 손으로 덥석 받을 많은 이유가 있었다. 마치 책이 하나의 문이 된 듯했다.

‘에로스와 프시케’를 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보이는 그대로 사랑 이야기로 읽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도전 의식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이야기로 읽는 방법이다. 이렇게 읽으면 두 주인공은 두 인물이 아니라 한 존재의 두 가지 측면이 된다.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시는 나방이나,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같은 건 서로 다른 존재의 공존일 뿐이다.....흡혈 나방으로 알려진 많은 종류의 나방들은 척추동물의 피를 빨아 먹고 살고, 열 종 남짓한 어떤 나방은 포유류의 눈을 공격해 단백질과 소금, 기타 미네랄을 먹고 산다.

p121. 젊을 때 읽었던 마르키 드 사드의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 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시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 살덩이든 저 살덩이든, 오늘은 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내일이면 천 마리의 곤층으로 변해 버릴 것을?” 사드에게 중요했던 이 질문 혹은 탄식은 일반적으로 분해라고 상상하는 어떤 과정이 또한 변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p125. “아르스 롱가, 비타 브레비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p133. 17세기 프로테스탄트 목사이자 북아일랜드 데리 지역의 주교였던 에즈키엘 홉킨스

“이 모든 것이, 비록 매끈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모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입니다. 비눗방울, 허공에 떠다니는 비눗방울이 온갖 광택과 색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진정한 세상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신의 숨결을 허공에 불어 만든 커다란 비눗방울에 불과합니다.” 몇 세기 전 네덜란드 철학자 에라스뮈스도 오래된 라틴어 표현 ‘homo bulla’ 즉 ‘인간은 거품이다.’라는 명제를 되살려 냈고, 바니타스 회화에서는 종종 작품 속에 비눗방울이 떠다니기도 한다.

자신의 숨을 세면서 거기에 집중하는 훈련은 선종의 명상에서 기초가 되는 훈련인데, 이 과정이 지루하다며 불평을 하는 제자가 있었다. 스승은 제자의 고개를 개울물에 넣은 다음 한참 후에 꺼내 주며 “아직도 지루하냐?”라고 물었다. 그 일시성이 분명해질 때, 숨은 지루하지 않은 것이 된다.

p194. ‘잣다 to spin’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그저 뭔가를 만드는 행위를 뜻하다가, 빠르게 도랑가는 건 뭐든 뜻하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하다’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바늘이다. 하지만 거기에 꿰는 실은, 물론, 그림자다”라고 브렌다 힐먼이 자신의 시 <수트라 끈 이론>에 적었다. 영어와 라틴어에서 ‘꿰매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suture’sms 산스크리트어의 ‘수트라sutra’ 혹은 고대 인도어의 하나인 팔리어의 ‘수타suta’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두 단어 모두 바느질과 관련이 있다.

‘수트라’라는 단어는, 플랫폼 수트라(육조단경), 하트수트라(반야심경), 로투스 수트라(법화경) 같은 단어에서 보듯이, 붓다 자신 혹은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훗날에 묶여 나오는 학문적이거나 철학적인 글들과 구분된다......수트라에 적힌 말이나 그 의미들이 만물을 관통하며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실들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고 삶이 흐르는 혈관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울게 한다. “희망이 곧 역사로 이루어지는” 순간, 아주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던 어떤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그와 함께 어떤 질서를 알아보고 또 만들어 내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 그저 놀랄 만큼 아름다운, 도덕적인 아름다움까지 포함하는 어떤 순간, 정의가 행해지고 진실이 존중받고 질서와 일체성이 회복되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어떤 깊이 있는 아름다운 정의를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실처럼, 시간에 따라 풀려나가는 하나의 서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들 각각은 그저 하나의 섬이고, 그 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실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일 뿐이다.

테피스트리 같던 특정 시기에서 실을 한 올 뽑아 보면, 내가 기술한 것은 모두 진실처럼 느껴진다.

p215. 하지만 승려들은 군부와의 연계는 거부했다. 시위의 절정에서 승려들은 매우 보기 드문 의식을 행했다. 그것은 팔리어로는 ‘파탐 니쿠자나 카마’, 즉 아무것도 담을 수 없도록 시주받는 그릇을 엎어 버리는 의식이었다......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내어 주는 것 역시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속세의 사람을 종교인의 삶과, 영적인 삶과 이어주던 끈을 끊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p222. 네 번째 광경은 <불소해안>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바로 ‘비구’, 즉 홀로 방랑하며 인간이 고통받는 원인을 찾고 그것을 전하는 일에 삼을 바친 사람들이다.

p225. ‘두카’는 하늘, 공기 혹은 구멍, 특히 바큇살의 축에 있는 구멍을 의미한다. ‘수카’가 바퀴가 잘 굴러가게 하는 좋은 구멍이라면, ‘두카’는 잘못된 구멍, 바퀴가 흔들리고 길에서 덜컹이게 하는 구멍이다. 이는 조화나 차분함의 반대어로, 불화 아니면 소란으로 번역할 수 있다.

p232. 그 이어짐이 비극인 이유는 철새와 함께 이동하는 독성 물질과 기후변화 때문이다. 그 독성 물질은 곰을 자웅동체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린란드 여성의 모유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유해 폐기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수반카가 말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시작되는 독성 물질의 여정이 북극에서 끝나거든요. ”

나방이든 나비든 다 자란 곤충은 ‘이마고’라고 부른다. 그 복수형이 ‘이매진즈’다. 나방이나 나비, 혹은 날 수 있는 다른 곤충을 성충으로 완성시키는 세포를 ‘이매지널 세포’라고 부른다. ....이마고는 또한 ‘한 인간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라는 뜻도 가지는데, 이 이미지는 보통 어린 시절에 부모를 보며 형성된다.

불교에서 정신의 낙원을 뜻하는 니르바나는 촛불이나 불꽃을 ‘불어서 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건 열정이 가진 열기를 끄는 것, 숨을 길게 내쉬며 흘려보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p294. ‘헛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벌hevel’이고, 이는 숨 혹은 수증기라는 뜻으로, 숨처럼 순간적이고 수증기처럼 금방 사라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북극은 예외였다. 그곳에서는 페테르 프로이켄의 숨이 그래도 하나의 구조물이 되었다.

p350.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적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다가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를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도 그렇다. 여기서 나는 내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도달한다. 어찌되었든, 원단의 뒷면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우리는 ,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그 패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세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 말이다.”

p355. 피터 싱어는 “현실을 파악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두 개의 과정. 즉 정서적 체계와 의도적 체계”를 이야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이미지나 이야기에 관여하며 감정적 반응을 유도한다. 후자는 사실과 수치에 관여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p363. 응급상황emergency이란 무엇일까? 이 단어의 어근을 보면 ‘부상emergence’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고, 그다음엔 ‘나타나다emerge’까지 이어진다. 응급 상황이란 무언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응급 상황’의 첫 번째 정의는 “가라앉았던 사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현재는 많이 쓰이지 않음”으로, 이는 ‘부상’의 정의와 동일하다. 두 번째 정의는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마치 물놀이를 하던 사람이 갈대를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의 입에서 비밀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그다음에 가서야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가 나온다. “에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한 상태, 즉각적인 대처를 서둘러 해야 하는 상태.”

시인 존 키츠는 현세란 “영혼을 다듬는 골짜기”이며, “응급 상황과 어려움을 통해 영혼이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응급 상황이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시기라면, 융합merge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이다. “어떠한 특정한 활동이나 삶의 방식, 환경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어떤 액체에 녹아드는 것”, “어딘가에 포함, 흡수, 혼합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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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5-08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다시 펼치고 싶네요.

시이소오 2016-05-08 09:30   좋아요 0 | URL
야금야금 읽다 반납할 때가 되어 슬프네여. 흑 ^^;

:Dora 2016-05-0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이책 집어들었다 놨었는데.. 리베카 솔닛 ♡

시이소오 2016-05-08 09:59   좋아요 0 | URL
아직 다 안 읽으셨군요. 느무 부러워요 ㅋ^^

:Dora 2016-05-08 10:00   좋아요 0 | URL
시작도 못했죠 사려다 말았거든요...

시이소오 2016-05-08 10:02   좋아요 1 | URL
사셨어야죠 ㅋ

:Dora 2016-05-08 10: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근데 사고픈 책이 너모 많았어요 솔닛아줌마가 이양구샘 책에 밀렸어요 ㅋㅋ

시이소오 2016-05-08 10:10   좋아요 1 | URL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도 읽고 싶네요 ^^

:Dora 2016-05-08 10:15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보셔요^^ 제가 좋아하는 연출님이에요 필경사바틀비 연극한다는데 공유도 할게요

시이소오 2016-05-08 10:18   좋아요 1 | URL
꼭 읽어볼게요 ^^ 바틀비를 공연하다니 신선하네요 ^^ 바틀비적 정신이 필요한 시대죠. ^^

보물선 2016-05-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러나와 쓰는 서평이 진짜 서평이죠^^ 잘 읽었슴다. 남자들의 느낌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5-08 10:21   좋아요 1 | URL
나방의 깨달음이죠. 후반부에도 기가막힌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즐독하시길 ^^

보물선 2016-05-0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나방까지 읽었어요 ㅋㅋ

시이소오 2016-05-08 10:24   좋아요 1 | URL
나방 이야긴 챕터마다 계속 나와요 ^^

보물선 2016-05-08 10:26   좋아요 0 | URL
그럼~~처음 나오는 나방^^ 신데렐라 구두이야기까지였던 것 같아요~ 이 여자(분)의 세계는 정말 크구나 그런느낌^^

시이소오 2016-05-08 10:31   좋아요 1 | URL
리베카 솔닛의 다른 책도 궁금하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5-08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님 리뷰는 항상
그 책을 손에 쥐고싶게 만들지요^^

시이소오 2016-05-08 21:04   좋아요 0 | URL
강요님이 그렇게 읽어주시니 그렇죠. 감사합니다 ^^

보빠 2016-05-0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것 좋아하시
네요 리뷰에서 느껴집니다

시이소오 2016-05-09 09:43   좋아요 0 | URL
좋아하죠. ^^

cyrus 2016-05-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서평을 써본 적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이소오님이 서평단 모집할 때 지원하면 선정될 겁니다. 저는 신간도서를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습니다. 시이소오님처럼 생각하면, 신간도서 못 사는 제가 한심해집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5-09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신간이건, 구간이건 모든 책을 빌려 읽습니다 ^^;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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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더불어 읽고 싶었던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열광하며 읽었다면 에밀 시오랑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니체를 불어로 쓰면? 에밀 시오랑이다. 이 정도면 거의 표절인데. 시오랑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시오랑은 이 책을 23살에 썼다. 나 역시 젊은 날,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열광했었다. 그때의 시오랑보다 겁나 나이를 먹은 나는 왜 아직 이런 책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절망을 넘어서자는 건가? 그런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84살까지 끈질기게 살진 않았겠지? 읽다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안 죽은 거야? 올가미에 목을 매달 것이지 펜을 붙들고 자빠졌냐?’ 자신의 글대로 생각대로 살고자한다면, 시오랑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살을 감행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너무 잔인한 독설인가? 읽다보면 불끈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십대도 아닌 내가, 시오랑의 거친 사유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윗 문장을 나침반으로 삼아야할까. 윗 문장과 모순되는 글을 만나더라도 계속 읽어가기 위해선? 

 

시오랑은 살기 위해선 서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 고통을 느낄 때,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서정적이 된다. 서정적이 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고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정의 절정은 광기이고 정신착란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나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삶이라는 흑점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윗 문장에 꽂혀, 시오랑을 읽고 싶었다. 굉장히 공감할만한 문장이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시오랑을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시오랑은 자기비하자기애의 수단으로 삼는다.

 

인생은 야만적으로 나를 짓밟고 억눌렀으며, 한창 날아오르는 나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내가 누릴 수도 있었을 기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나의 열정, 속세에서 뛰어난 인간이 되려고 퍼부었던 미친듯한 에너지, 찬란한 미래에 느꼈었던 매력

 

시오랑의 책은 성공하지 못한 젊은이의 푸념, 세상에 대한 원망의 글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오랑은 신자유주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부활한 것일까. 시오랑은 나르키소스다. 자신을 느무느무 사랑한다. 이토록 사랑스런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멸절되어도 좋다. 시오랑은 니체보다는 히틀러의 자식이다. 젊은 시절 시오랑은 파시스트였다. 루마니아 극우민족주의 단체 철위대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만큼 호감이 가고 존경할 만한 동시대 정치인은 없다는 망언까지 저질렀다. 이 책에서도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분출되고, 붕괴되며, 떨어져 나온 땅의 파편들이 날아올라 먼지가 돼버리고, 풀들이 허공에 괴상한 무늬와 기괴한 뒤틀림과 훼손된 형상을 그리기를! 불꽃의 소용돌이가 원시적 힘으로 솟구쳐 세상을 휩쓸어버려 미물까지도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형상이란 형상은 모두 사라지고, 세상에 있는 견고한 구조들이 혼돈 속에 모두 삼켜지기를! 모든 것이 미친 소란, 몰아쉬는 거친 숨, 공포와 폭발이 되기를! 뒤를 이어 영원한 침묵과 최후의 망각이 이어지기를! 그 마지막 순간 인간의 삶이 너무나 높은 강도에 도달한 나머지 후회, 갈망, 사랑,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느꼈던 모든 것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기를!

 

나치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나치는 그러한 종말의 순간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 나치즘은 나르시즘을 기원으로 한다. 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시오랑은 허무주의자라기 보단 자기애에 빠진 일개 파시스트다.

 

나치가 니체를 오독했듯 시오랑 역시 그러하다. 니체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해석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니체가 주장한 영겁회귀는 영원히 똑같은 삶이 반복됨을 가정으로 한다. 내가 지금 한 행위는 다음 생에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낙타처럼 노예로 살아야 할까? 좆선일보나 쳐보면서, 국민을 총칼로 학살한 자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뽑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의인들을 조롱하며, 수억 번을 그렇게 버러지처럼 살아야 할까? 

 

시오랑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자신만의 우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다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워야 한다. 예술은 거짓말이 아니고 철학은 농담이 아니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무가치하지 않다. 역사를 모르므로 원숭이보다 못한 것을 대통령으로 뽑는 원숭이들로 가득한 거 아닌가.

 

이 책을 좋아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증거다. 절망에, 허무에 매혹되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애때문이다. 절망에, 허무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박학다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런 생각 없이 멍청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저주받을 역사!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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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다른 느낌으로 읽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감의 토로가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을,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있고 어쩌면 딱부러지기까지 하게 글로 정리해놓을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거든요.
시이소오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07:46   좋아요 0 | URL
다소 격렬한 리뷰였죠? 시오랑이 히틀러를 찬양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는 바람에 ^^;

보빠 2016-05-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평론가하셔도 되겠습니다. 공격할 포인트 찍고 논리 세우고 감성적으로 전달하고...직업이 글 쓰는 일인가요? 재미있는 리뷰였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10:28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앎이 미천하여 부끄럽네요.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할 따름이네요 ^^

2016-05-09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09 10:28   좋아요 0 | URL
블로그 이웃님은 중2병 환자의 책이라고 혹평을 ㅋ

자주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______^
 
비트레이얼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정도일줄이야. 이거 출판사 광고대로 영국, 프랑스 베스트셀러 맞나? 더글러스 케네디 최악의 작품. 망작도 이런 망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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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위대한 개츠비>의 독후감에서 나는 <위대한 개츠비>가 자본주의를 낭만적 사랑이란 외투로 감싼 소설이라 비판했었다. 내 생각과 다른 관점의 책을 읽고 싶었다.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는 딱 그런 책이다. 작가의 논리에 설득된다면 언제든 나는 내 생각을 바꿀 뿐만 아니라, 저자 앞에서 바닥을 기어 다닐 수도 있다. ‘, 몰랐습니다.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소설이었군요.’

 

모린 코리건은 책 전반부에서 피츠제럴드, 혹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여러 비판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반 유대주의? 맞다. 인종주의? 맞다. 국수주의? 맞다 ( ‘성차별동성애 혐오는 일단 미뤄놓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인지 시험을 치른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낙제다.

 

또한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모든 작품 중에서- 160편의 단편을 포함해 - <위대한 개츠비>만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다른 소설들은 쓰레기거나 그저 그렇다는데 그녀 역시 동의한다. 이후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주장 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고전들 중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개츠비가 데이지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얻지 못하고 물에 빠져 익사했으므로 계급이라는 주제를 다뤘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인용한 고전들 - <모비딕>, <허클베리 핀>- 을 단지 인종을 다룬 작품이라는 해석도 충격적이다) 나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다는 교수가 이걸 지금 논리라고 펼치는 건가?

 

만일 이 작품이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면 모든 계급의 캐릭터가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주요 인물들 중에 하층 계급 캐릭터엔 누가 있나? 개츠비? ? 데이지? 톰 뷰캐넌? 베이커? .......아무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주유소를 경영하는 윌슨 부부인데 이들은 거의 단역 캐릭터에 불과하다. 언제부터 부자를 다루면 계급을 다루게 된 것일까? 하층 계급은 아예 계급에 끼지도 못한단 말인가?

 

오히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보다는 인종에 대한 얘기다. 톰 뷰캐넌이 추천하는 책이 뭔가?

고더드가 쓴 <유색 인종 제국의 등장>이다.

 

요컨대 우리가 북유럽 인종이라는 거야. 나도, 그리고 당신도, 그리고 자네도, 그리고......” 조금 망설인 뒤에 고개를 약간 끄덕이면서 데이지도 포함시켰다. ....“ 게다가 우리가 문명을 이루는 데 들어가는 온갖 것들을 생산해 낸다는 거지. 과학과 예술, 그런 모든 것들을 말이야. 알겠나?”

 

톰 뷰캐넌은 유럽을 상징한다. 저자가 언급했듯 <위대한 개츠비>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 개츠비의 집에 뷰캐넌과 두 친구( “슬론이라는 남자와 이름 모를 예쁜 여자”)가 말을 타고 온다. 개츠비는 그들을 환대하고, 말이 없지만 차로 그들을 따라가겠다며 나갈 채비를 하기위해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들은 개츠비를 조롱하며 그를 기다리지 않고 떠난다.

 

저자는 피츠제럴드가 삶에서 겪었던 왕따에 대한 기억으로 이 장면을 해석한다. (그는 왕따당했으므로 피해자다.) 나는 이 장면을 귀족유럽에 대한 미국의 열등감으로 읽었다. ‘에 대한 열등감. ‘오만한유럽 앞에 희생자인척 하는 미국. 개츠비는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개츠비가 아무리 프랑스식 저택에 살지언정 그는 결코 유럽인이 될 수 없다. ‘올드 머니에 대한 뉴 머니의 열등감. 그렇다고 해서 뉴 머니가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치가 사악하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인을 학살하는 유대인이 선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2. <위대한 개츠비>는 반미국적인 소설이다.

 

굳이 내가 반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반박해보자. 저자는 개츠비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개츠비>에서 가장 심오한 순간에 피츠제럴드는 하나의 목소리를 소환한다. 이 목소리를 미국의 전지적 목소리로 부르자. 그것은 아메리칸드림을 거부할 수 없게 하고, 애끓게 하고, 또 자신만만해지게 하는 목소리다.”

 

3. <위대한 개츠비>는 하드보일드이고 느와르다.

 

난 이 주장에 동의한다. 처음 개츠비를 읽었을 때 내 소감이 딱 이랬다.

뭐야, 이거 장르소설이네, , 호갱 남주, 배신, 팜므파탈.

 

<위대한 개츠비>를 느와르로 해석하건 하드보일드로 해석하건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4. <위대한 개츠비>의 익사 이미지에 매혹됐다.

 

저자는 대개의 장면을 물과 익사 모티브로 분석한다. 저자의 말대로 푹 젖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의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걸까? 나 역시 이 소설을 액체 이미지로 분석할 수 있다. , 알코올, 석유로. 그러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작품이 위대해지는 건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익사 이미지로 분석하면 그 소설은 위대해지는 건가?

 

5. 피츠제럴드는 왕따였고 고생했다.

 

피츠제럴드가 어린 시절 왕따였고 빚 때문에, 미쳐버린 젤다 때문에 고생했다고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피츠제럴드는 전체 미국인 수입의 10%에 달하는 돈을 한 달 동안 식료품 구입에 썼다. , 그의 1년 치 식비가 전체 미국인 수입과 똑같았다는 말이다. 빚을 안 질래야 안질수가 없다. 오늘날 그럴 수 있는 작가가 누가 있을까? 물론 고통을 객관화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배를 굶어가며 작업한 숱한 작가들 앞에서 피츠제럴드가 고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6. <위대한 개츠비>는 미래를 예언했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홀로코스트란 단어가 쓰였으므로 나치를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츠비의 집에 불이 꺼지고 파티가 끝난 점을 들어 대공황을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터 평론가가 점쟁이가 된 것일까. 이 정도면 증상이 심각하다. 정신과 치료가 시급하다.


 

이 책을 통해 피츠제럴드와 개츠비를 둘러싼 여러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마치 위대한 개츠비 파쓰레기 개츠비 파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현재는 위대한 개츠비 파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시대다. 1925년도 <위대한 개츠비>가 출판될 당시엔 상황은 전혀 달랐다. 당시엔 고작 2만 부가 팔렸을 뿐이었고 대중들로부터, 비평가들로부터 완전히 잊혀졌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모리 코리건은 <위대한 개츠비> 부활의 역사를 추적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부활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출판한 스크리너브스 출판사의 편집진이 전승도서 편집진에 합류하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목록에 포함시켰다. <위대한 개츠비>20대의 군인들에 의해 부활한 셈이다. (주인공인 개츠비와 화자인 닉 캐러웨이 역시 군인이었다.)

 

이후 <위대한 개츠비>는 페이퍼 백 인기에 편승한다. 1950년대, TV의 등장도 한몫했다. 피츠제럴드의 장편과 단편들 다수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후 피츠제럴드는 대중문화를 거쳐 빠르게 번져나갔다. 피츠제럴드 덕후인 브루컬리 교수도 피츠제럴드 부흥에 이바지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부흥의 정점은 2013년 개봉한 바즈 루어만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의 영화화가 아니었을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소설이라면 왜 애초부터 위대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왜 이렇게 <위대한 개츠비>푹 젖었을까’? 우선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직업적으로 너무 많이 읽었다. 50. 두 번째 이유가 결정적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엔 저자 자신의 성이 나온다. 4장 시작 부분. 캐리건 부부.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개츠비>가 나를 읽어내다니 짜릿하다.”

 

개츠비는 당신을 읽은 적이 없다. 이건 소설이다. 제발 정신 차려라. 모린 코리건은 ‘21세기 보바리의 현현인가. 저자의 지인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는다.

 

나는 언제나 개츠비가 자신의 내면을 채우 것을 잘못 찾고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틀렸나? 어떻게 생각해? 개츠비는 돈과 옷과 데이지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는 없지. ”

 

저자는 오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독해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츠비의 특징이 사라진다. 모든 것을 거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다.

 

......이 작품은 계급 문제와 벌기와 쓰기의 궁극적인 공허를 다루는 가장 위대하고 위대한 미국 소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리고 실수로) 1920년대에 자리 잡기 시작한 소비사회를 찬양하는 소설로 회상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저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의 저자 아자르 나피시는 회고록에서 학생들과 <개츠비>를 읽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개츠비>를 두고 학생들은 재판을 연다. 학생들은 <개츠비>를 대악마 미국의 문학적 대리인으로, 미국과 관련된 모든 퇴폐적인 것들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아자르 나피시가 설득력있게 개츠비를 변호했다고 그녀의 말을 인용한다.

 

금전에 관한 꿈이 아니다. (개츠비) 본인이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한 상상이다. 물질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평가보다는, 돈이 꿈을 살려내는 수단이 되는 관념적인 국가에 대한 평가다. 여기에 아둔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아둔함이 꿈과 숫제 섞여버렸기 때문에 따로 구별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윗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을 음미해보면 전적으로 <개츠비>를 두둔했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개츠비는 아둔함이 꿈과 섞인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낭만적 사랑과 소비지상주의가 구분할 수 없이 섞여있다. 그리고 내가 비판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드러내놓고 소비를 찬양하는 소설은 아니다. ‘낭만적 사랑아래 소비지상주의를 감추고 있기에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이찌되었건 사람들은 개츠비의 과시적 소비를 닮고 싶어 한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최근 들어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최근 들어 기업가들이 자기 창조와 과시적 소비의 짜릿함을 느낀 이 나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즈 루어만의 영화는 2013년 중국에서 상영을 허락받은 해외 영화 서너 편 중 하나였다.

 

....중국 패션 브랜드 마사 마소의 다채로운 남자용 와이셔츠 광고 문구를 보라. ‘굉장한 가이 ’, 서양에서는 <위대한 개츠비>로 알려진 작품의 가르침을 기억하라며 쇼핑족들을 이끈다. 광고는 권한다. ‘잊지 말자, 주인공 개츠비는 명성과 부를 획득하자마자 나가서 밝은 색의 아름다운 셔츠를 산다. 그 셔츠는 데이지의 눈에 비칠 그의 이미지를 바꿔준다. 사실이다. 꽃무늬 셔츠를 입으면 그 옷은 당신에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보여줄 것이다.

 

 

소설가 조너선 프랜즌은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중요한 우화를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책을 읽으면 휘핑 크림을 먹는 기분이 들죠.”

 

휘핑 크림을 먹는 듯한 기분. 피츠제럴드의 글에선 아파트도 하얗고 긴 케이크 조각이 된다.

피츠제럴드 덕후인 저자 덕분에 작가에 대해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접해 나름 재미있었다.

한편으로, 저자의 아둔함과 꿈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밑줄 친 문장들.

 

"나는 밖에 나가서 부드러운 황혼을 헤치며 동쪽으로 공원을 향해 산책하고 싶었지만, 내가 나가려고 할 때마다 거칠고 공격적인 논쟁에 휘말려 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시 높은 곳에 줄지어 선 우리의 노란 창문들은, 어스름 무렵 거리를 별 생각없이 걷던 사람이 쳐다볼 때면 자기 몫만큼씩 인간의 비밀을 나누어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안에 있으면서도 안에 없는 채로, 인생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에 매혹되면서도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보내준 책은 감동적이었어요. 당신의 세대에 내가 감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미래를 향해 비행하는 세대니까요....
내가 지금 당신과 다툴 문제는 하나뿐이에요. 개츠비를 진짜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 당신은 그가 인생 초기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 짧은 요약 말고요. 그랬다면 그의 상황이 분명했을 테고, 그의 마지막 비극도 진정한 비극이 되었겠지요. 조간 신문의 "사건 사고"기사처럼 보이지 않고요.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그러다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 -----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는 낙담했습니다. (...) 그 시절 피츠제럴드도 형편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형편없어요. "

- 로버트 프로스트. 1946년 작가 모임에서.

"우리는 1930년대의 비평적 실수에 대해 과도하게 회개하면서 피츠제럴드의 책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는 스타인 벡이나 제임스 T. 패럴을 선호했는데, 이제 우리가 더 이상 그들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이유로 그러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마치 소녀 같아 보인다. 우리가 외딴 집에 남겨두고 떠났는데 미처 돌아가기 전에 죽은 소녀. 가슴 아프기도 해라. 그래서 특히 감상적으로 이상화하기 쉽다. "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 <스콧 피츠제럴드에 관한 몇 가지 메모> 1951년

"나는 <개츠비>가 미학적으로 과대평가되었고, 심리적으로 공허하며, 도덕적으로 안이하다고 생각한다. 그 책이 품은 교훈에 대해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개츠비> 또한 신성불가침이 아니라면, 이들 중 아무것도 내게 중요하지 않다. "

- <뉴욕>지 서평가 캐서린 슐츠, 나는 왜 <위대한 개츠비>를 경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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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5-0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개츠비 ㅋㅋ 신선하네요!

시이소오 2016-05-06 09:24   좋아요 0 | URL
너무 운을 맞췄죠? ㅋㅋ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07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상전환
다양한 해석
문학은끝이없네요^^

시이소오 2016-05-07 06:28   좋아요 0 | URL
문학은 끝이 없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