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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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더불어 읽고 싶었던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열광하며 읽었다면 에밀 시오랑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니체를 불어로 쓰면? 에밀 시오랑이다. 이 정도면 거의 표절인데. 시오랑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시오랑은 이 책을 23살에 썼다. 나 역시 젊은 날,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열광했었다. 그때의 시오랑보다 겁나 나이를 먹은 나는 왜 아직 이런 책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절망을 넘어서자는 건가? 그런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84살까지 끈질기게 살진 않았겠지? 읽다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안 죽은 거야? 올가미에 목을 매달 것이지 펜을 붙들고 자빠졌냐?’ 자신의 글대로 생각대로 살고자한다면, 시오랑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살을 감행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너무 잔인한 독설인가? 읽다보면 불끈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십대도 아닌 내가, 시오랑의 거친 사유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윗 문장을 나침반으로 삼아야할까. 윗 문장과 모순되는 글을 만나더라도 계속 읽어가기 위해선? 

 

시오랑은 살기 위해선 서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 고통을 느낄 때,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서정적이 된다. 서정적이 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고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정의 절정은 광기이고 정신착란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나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삶이라는 흑점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윗 문장에 꽂혀, 시오랑을 읽고 싶었다. 굉장히 공감할만한 문장이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시오랑을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시오랑은 자기비하자기애의 수단으로 삼는다.

 

인생은 야만적으로 나를 짓밟고 억눌렀으며, 한창 날아오르는 나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내가 누릴 수도 있었을 기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나의 열정, 속세에서 뛰어난 인간이 되려고 퍼부었던 미친듯한 에너지, 찬란한 미래에 느꼈었던 매력

 

시오랑의 책은 성공하지 못한 젊은이의 푸념, 세상에 대한 원망의 글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오랑은 신자유주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부활한 것일까. 시오랑은 나르키소스다. 자신을 느무느무 사랑한다. 이토록 사랑스런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멸절되어도 좋다. 시오랑은 니체보다는 히틀러의 자식이다. 젊은 시절 시오랑은 파시스트였다. 루마니아 극우민족주의 단체 철위대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만큼 호감이 가고 존경할 만한 동시대 정치인은 없다는 망언까지 저질렀다. 이 책에서도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분출되고, 붕괴되며, 떨어져 나온 땅의 파편들이 날아올라 먼지가 돼버리고, 풀들이 허공에 괴상한 무늬와 기괴한 뒤틀림과 훼손된 형상을 그리기를! 불꽃의 소용돌이가 원시적 힘으로 솟구쳐 세상을 휩쓸어버려 미물까지도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형상이란 형상은 모두 사라지고, 세상에 있는 견고한 구조들이 혼돈 속에 모두 삼켜지기를! 모든 것이 미친 소란, 몰아쉬는 거친 숨, 공포와 폭발이 되기를! 뒤를 이어 영원한 침묵과 최후의 망각이 이어지기를! 그 마지막 순간 인간의 삶이 너무나 높은 강도에 도달한 나머지 후회, 갈망, 사랑,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느꼈던 모든 것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기를!

 

나치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나치는 그러한 종말의 순간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 나치즘은 나르시즘을 기원으로 한다. 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시오랑은 허무주의자라기 보단 자기애에 빠진 일개 파시스트다.

 

나치가 니체를 오독했듯 시오랑 역시 그러하다. 니체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해석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니체가 주장한 영겁회귀는 영원히 똑같은 삶이 반복됨을 가정으로 한다. 내가 지금 한 행위는 다음 생에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낙타처럼 노예로 살아야 할까? 좆선일보나 쳐보면서, 국민을 총칼로 학살한 자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뽑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의인들을 조롱하며, 수억 번을 그렇게 버러지처럼 살아야 할까? 

 

시오랑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자신만의 우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다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워야 한다. 예술은 거짓말이 아니고 철학은 농담이 아니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무가치하지 않다. 역사를 모르므로 원숭이보다 못한 것을 대통령으로 뽑는 원숭이들로 가득한 거 아닌가.

 

이 책을 좋아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증거다. 절망에, 허무에 매혹되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애때문이다. 절망에, 허무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박학다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런 생각 없이 멍청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저주받을 역사!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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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다른 느낌으로 읽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감의 토로가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을,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있고 어쩌면 딱부러지기까지 하게 글로 정리해놓을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거든요.
시이소오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07:46   좋아요 0 | URL
다소 격렬한 리뷰였죠? 시오랑이 히틀러를 찬양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는 바람에 ^^;

보빠 2016-05-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평론가하셔도 되겠습니다. 공격할 포인트 찍고 논리 세우고 감성적으로 전달하고...직업이 글 쓰는 일인가요? 재미있는 리뷰였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10:28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앎이 미천하여 부끄럽네요.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할 따름이네요 ^^

2016-05-09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09 10:28   좋아요 0 | URL
블로그 이웃님은 중2병 환자의 책이라고 혹평을 ㅋ

자주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