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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지난주 서울 형님댁에 가서 시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에 전철을 탔다.
형님이 싸준 식혜에 동그랑땡에 깍두기까지 냄새가 폴폴 나는 묵직한 가방을 손에 들고,
잠이 들어 천근만근 무거운 아이는 남편이 안았다.
술냄새를 물씬 풍기는 중년의 여성 둘이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얼굴도 불콰했고 목소리도 높았다.
입을 열 때마다 소주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내 입에서도 자주 풍기는 냄새지만
맨정신에 맡으려니 좀 괴로웠다.
그들은 다른 승객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날 술자리에서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던 나의 뇌리를 스친 생각.
--내 또래 같은데, 저들은 결혼을 안했을까? 그러니 이 시간에 술을 마시고......
나는 좀전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중년여성은 이 시간까지 술 마시면 안되는겨? 로드무비, 니가 언제부터?!
참 별꼴이다.
사회적인 통념상 '적령기 혹은 적령기를 놓친 여성'으로 산 세월과 기혼으로 산 세월이 비슷한데
어느새 나는 철저하게 기혼여성 혹은 주부의 포지션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너무 큰 목소리로 떠들어 내 새끼의 잠과 나의 독서를 방해받는 상황이
좀 마음에 안 들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렇게 간사할 수 있을까!
'언니네'라는 사이버 커뮤니티가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 어느 님의 페이퍼로 알았다.
'성적性的'으로 무진장 솔직하고 자유로운 이야기들이 오고간다는 것이다.
솔깃하여 한 번 꼭 방문해 봐야지 해놓고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다가
어제 오늘, 이렇게 책으로 먼저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수위와 내용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내게는 대부분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집으로 침입한 강간범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 한 여성의 어조와 그 내용은
이상하게 깊숙이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지만.
그런데 대부분 섹스, 성 정체성, 나쁜 남자들,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성性과 관련하여
언니네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는 얘기 등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들을 묶은 거라는데 여성잡지 특집기사를 읽는 정도의
감흥밖에 없었으니......
나는 잘난체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엉터리고 가소로운 족속인지 잘 알고 있고,
여성이 비혼으로 사노라면 얼마나 피곤하고 열불 나는 일이 많이 생기는지
주르르 꿰고 있을 뿐 아니라, 딴에는 솔직하겠다고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면전에서는 칭찬을, 돌아서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는 것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 모든 걸 짐작하고 있는 여성이든, 세상과 사랑에 대해 아직 환상을 품고 있는 여성이든,
자신의 현재진행형 연애에 대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어쩌면 이 남자는 진짜고 내가 기다려온 일생의 사랑인지 모른다는 미련과 기대.
그래놓곤 그 사랑이 깨어지고 난 후에는 또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다.
--어째서 저 새끼는 예외라고 생각했던 걸까?(92쪽)
좀 의아했던 건 남자와 잘 때 좋기는커녕 괴로워 죽겠는데도 즐거운 척 연기를 했던 건
상대남성에 대한 배려의 차원도 있겠지만 자신의 미숙함이나 실수도 분명 있는 것일진대
몽땅 상대 남성에게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
그리고 참다못해 무능하고 불성실한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어느 여성이
시어머니의 집을 팔아서 반을 위자료로 받아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
(부모나 시부모는 봉인가?!)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함과 당당함을 지향하는 여성의
생각과 발언으로는 좀 걸리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였다.
전철 속의 여성들이 큰 목소리로 떠든다는 이유로 그들을 잠시 얕잡아봤던 것처럼,
그동안 내가 변한 것일까? 10년도 안 되는 세월을 아줌마로 살면서?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