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폐인의 하루 - 이 시대의 영원한 화두, 게으름에 대한 찬가
베르너 엔케 지음, 이영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0월
품절


폐인을 자처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그것조차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자신을 치장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오래 전 자신을 詩만 쓰는 무능력자 혹은 폐인임을 자처하며 만나면 김밥 한 줄 값 내지 않던 위인이 자신의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출강하고 있으며 새 소설을 한 권 출간한 것을 며칠 전 아침 알라딘 신간 소개 코너에서 알았다.
사람들 앞에서 죽겠다고 우는 소리를 해놓고 자신에게 유익한 일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몰래 하는 사람이 '자칭 폐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만화일기의 주인공 '축 늘어진 하로'는 어떨까?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 소개

언제나 이발관에 갈 시기를 놓쳐 머리 한 올이 축 늘어져 있는 주인공 하로, 동심을 나타내고 싶어 모자 챙을 뒤로 하여 쓰고 있는 하로의 술꾼 친구 프랑크. 머리 꽁지에 리봉을 맨 하로의 동거녀 주지......뭐 이런 식의 인물 소개.
등장인물 페이지를 보고 본문 몇 장을 들춰보면 "아, 나도 이런 책은 낼 수 있겠다!"하는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도 이 책이 파놓고 있는 함정이다.

-- 5월 12일, 신문광고란을 꼼꼼히 읽다.
'배우는 아름다운 거울을 찾는다'라는 말풍선.(29쪽)

폐인이 즐겨 찾는 곳으로 동네의 공원 벤치만한 곳도 없다.

-- 아, 태어나지 말 것을......
"너 요즘 어디 사니?"
"변두리 중심지."(49쪽)

책 맨 앞에 소개된 축 늘어진 하로의 수기,
'올해는 엿같았다. 그렇긴 해도 몇 가지는 쪽지에 메모해 두었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느라 지쳤다. 사람들은 언제나.....무엇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놓쳤다는 느낌을 받는다.(150쪽)

침대에 등짝이 자석처럼 들러붙어 하루를 보내는 생활.
"이런 하루도 하루가 될 수 있다니 놀랍다"라고 썼던 어느 작가가 있었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프 디터는 늘 아들에게 몽둥이 찜찔이래"
"어른이란 돼먹지 못한 어린아이일 뿐이야."(167쪽)

주지와 친구 민헨의 대화.
그녀들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나비 리본의 위치.

저 대사에 공감한다. 어른이란 돼먹지 못한 어린아이일 뿐, 나만 보더라도 그건 확실한 사실이다.

"같이 사는 여자보다 이 세상에서 더 재미없는 여자는 없을 거야."
"......바로 그걸 거꾸로 상상해봐."(220쪽)

그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자신의 방 침대와 거리와 극장과 술집이 고작. 그런데 희한한 건, 너무나 단순하고 비슷한 그림과 대화와 독백이 계속되는데도 지루하지 않고 처음 보는 그림처럼 새롭다는 것이다.

(하도 비슷한 그림들이다 보니 말풍선과 페이지가 바뀌었는데 그냥 두련다. <행복한 폐인의 하루> 포토리뷰니까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각각의 폐인들과 다른 병명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털어박힌 수많은 창문과 몇 개 안되는 가게가 드문드문 보이는 골목들.

-- (12월 8일) 나는 오늘 다음과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성인 1마르크, 어린이 1마르크 50페니히라는 표찰을 내건 거지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어린이가 어른보다 돈을 더 줘야 하나요?"
"어른이 되면 뭔가 득을 보는 게 있어야지."(288쪽)

어른이 되면 뭔가 득을 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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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3-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 늘어진......압권이네요...^^

mong 2006-03-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도 지난주에 이책이 읽고 싶더라구요 ^^

로드무비 2006-03-2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이 만화 마음에 들어요.ㅎㅎ

메피스토님, 머리 한 올로 캐릭터 설명이 끝나니, 대단하지요?ㅎㅎ

에로이카 2006-03-2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는 오히려 그런 폐인이 되고 싶어요. 챙길거 다 챙기는...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하기 쉬운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도 하지요. 제 경우만 봐도... 로드무비님 말씀을 왜곡하는 건 아니구요.. 어쨌든 이 참에 의욕을 실행으로 옮겨보시는 건 어떨지... 댓글과 추천.. 빠밤...

hnine 2006-03-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눈에 들어오네요. 재미있겠어요.

kleinsusun 2006-03-2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김밥 한줄 값도 안내던 자칭 폐인이 그동안 정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군요. 그분이 낸 소설이 뭔지 궁금해요.^^

비로그인 2006-03-2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반가운 문자들이 보이네요..ㅎㅎ
혹 독일에서 발견하게 되면 조카에게 선물해야겠다는 결심불끈..^^

숨은아이 2006-03-25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돼먹지 못한 어린아이가 왜 뭔가 득을 봐야 할까요? ^^

승주나무 2006-03-2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이란 돼먹지 못한 어린아이일 뿐"에 올인..
저는 돼먹은 어린아이가 되고 싶어요^^

재밌네요
근데 "같이 사는 여자보다 이 세상에서 더 재미없는 여자는 없을 거야."
를 거꾸로 하면 뭐가 되나요? 진짜 궁금해서^^;;;;;

로드무비 2006-03-2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같이 사는 남자보다 이 세상에서 더 재미없는 남자는..."이겠지요.^^
나이 서른, 가능성이 울울창창한 나이입니다.
꼭 돼먹은 어린아이로 사시길......^^

숨은아이님, 돼먹지 못했으니까요.ㅎㅎㅎ

사야님, 가끔 나오는 독일어 보고 '사야님은 이 글들을 아시겠네?'
생각했답니다. 꽤나 침투하신 님이로군요.^^

수선님, 살짝 알려드릴까?
비밀을 보장해 준다면.....(나처럼!(''))

hnine님, 제목부터 흥미롭죠?
단숨에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cacophonyinme님, 오오 저와 같은 생각.
사실은 실속형 인간인 그들이 부러웠다는......
중요한 문제는 보자기로 덮어두고 쓰잘데기없는 일에
매진하는 부분도 제 경우네요.ㅎㅎ
댓글과 추천에 대해 신경이 미치신 것 아주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저도 '추천의 생활화' 이후 방이 아주 번듯해졌거든요.^^



플레져 2006-03-2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이 되면 득을 보는 게 정말 없었나... ㅠㅠ
싸늘한 반전이어요. 흑.

nada 2006-04-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인지 저는 폐인을 보면 항상 feign이 떠오르더군요.

로드무비 2006-04-1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묘하네요.^^

로드무비 2006-04-1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플레져님, 싸늘한 반전이라, 좀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