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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1,12권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어제 오후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차 안에서 읽을 책으로 <식객>을 골랐다.
짐도 있고 아이도 대동했으므로 11권 한 권만 달랑 넣었는데, 결과는
가는 길에 한 번, 오는 길에 한 번, 모두 두 번 읽었다.
신기한 건 같은 날 전철 안에서 두 번 읽는 건데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사실.
미아리 역 부근을 지날 무렵에는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나는 51세입니다. 물론 결혼했지요. 직업은 건축가입니다.(...)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놀았습니다.
로 시작하는 52화, '장마' 편.
친구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특히 재즈 음악을 사랑해 밤을 지새운 날이
수없이 많았다는 이 남자는 대대적인 치과 치료를 받은 후 대젓가락에 돌돌 만
세발낙지도 마음껏 뜯고 한마디로 그렇게 즐거울 수 없는 날들을 보낸다.
평소 먹는 걸 무지 좋아하는 독자라면 듣기만 해도 어깨춤이 나고 입에 침이 고이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허영만의 초기 작품 제목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칫솔 한 개> <담배 한 개비>.
"소주 한잔 합시다"하고 다짜고짜 말을 거는 사람의 화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목이었고, 작품도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52세 건축가의 덤덤한 진술이 마음에 들어 자세를 바로하고, "어디 앞으로 당신이 맛보는 음식을
나도 죄 먹어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비오는 날의 부침개 이야기와 함께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으니......
얼마 전 올케의 생일에 아웃백하우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립'이란 걸 먹어보았다.
너무 맛있어서 부모님이 생각났던 나는 마침 며칠 후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유명한 외식업체의 이름으로 양념한 립을 세트로 판매하는 걸 보고 주문해 드렸다.
효녀하고는 거리가 먼 내가 '이렇게 맛난 걸 아버지 엄마도 드셔보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절실하게 들 정도로 설에 뵌 부모님은 갑자기 많이 늙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그리고 사실 '맛난 것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는 그때'는 나이를 떠나서 누구에게 갑자기 닥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53화 '도시의 수도승'은 1년 365일 거의 닭가슴살만 먹고 버티는 보디빌더의 세계를 다루었다.
아름다운 몸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보디빌더들이랑 수도승은 언뜻 보기에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허영만의 만화 속에서는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쌀이면 쌀, 청국장이면 청국장, 설렁탕이면 설렁탕, 관심이 가는 주제이면 달려들어
아주 뽕을 빼놓고 보는 이 작가의 완벽주의도 신뢰감이 간다.
음식 이야기에 이렇게 인생을 담아내다니! 호들갑 떨지 않고......
각 에피소드마다 친절하게 달린 '취재일기 못다한 이야기'도 흥미롭고, '허영만의 요리일기' 팁도
아주 요긴해서 수첩에 그대로 베껴 쓰고 싶을 정도이다.
(<맛의 달인>은 저리 가라!)
특히 11권의 뒤에는 만화가가 팬으로서 부푼 가슴을 안고 강화도로 찾아가 만난
시인 함민복의 이야기가 나온다. 초로로 넘어가기 직전인 작가의 순정이라니!
함민복 시인의 팬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