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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평점 :
(밑줄긋기)
가장 슬기로운 보수주의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마누43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은 법률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즉 그때의 관습은 인간이 정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들의 관습인 것이다. 우리 뉴잉글랜드의 관습은 정한 날을 기릴 수 있다는 흠이 있다. 도덕이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어어져온 관습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양심이 보수주의자들의 우두머리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44 "너는 네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라. 행함은 행함이 없는 것보다 낫다. 행함이 없이는 네 몸조차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45-"타고난 본바탕에서 맡겨진 의무는 설사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지니, 모든 일은 다 흠집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길이 연기에 싸여 있듯,"46-"전체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놓아서는 안 된다."47-"오, 아르주나야, 일어나라, 싸우기를 결심하여라"48가 참으로 아끼는 친족들을 죽이기 두려워하여 싸움에 나서기 망설이는 전사에게 주는 하느님의 충고이다. 그것은 마음에 나타난 그대로의 우주를 아시아적 염원으로 간직하려는, 온 누리만큼 넓고 시간만큼 지칠 줄 모르는 장엄한 보수주의이다.
이 인도철학자들은 변치 않는 필연의 법칙들, 그리고 성향과 소질을 뜻하는 세 가지 구나49 곧 삼성三性과, 태어남과 그로 인해 얽힌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들은 무한한 인식, 곧 브라흐마와의 영원한 합일을 간절히 원한다. 그런 만큼 그 사색은 높고도 넓지만, 인도 고원 너머로까지 모험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으신 이Unnamed'의 특성이기도 한 쾌활함, 자유로움, 부드러움, 다양함, 앞날의 가능성과 같은 일들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신의 풍성한 보답은 끝없이 단조로우면서 고된 일로 얻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앞날에 대한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의 보수주의는 효과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한 프랑스인 번역가는 중국과 인도 왕조들의 예스러움과 끝없이 이어짐, 그리고 입법자들의 슬기를 높이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곳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의 어떤 흔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도주의와 실천을 소중히 여기고, 넓게 볼 때 급진적이다. 저 동양의 현인들은 오래도록 신들의 시대를 살고 침묵 속에서 신비의 '옴Om'50을 토해내며, 자기 안에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리 물러나고, 더 깊이 가라앉으면서 최고 실재Supreme Being의 본바탕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따라서 참으로 슬기로운데도 꽉 막혀 있어, 마침내 같은 아시아이기는 하나 먼 서쪽에서 브라흐마51에 빠지지 않고 브라흐마를 이 땅으로, 곧 인류에게로 끌어내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으로부터 브라흐마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현대가 시작되었으니, 말하자면 하느님이 새롭게 몸을 입은 것이었다. 브라만52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인류의 형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개혁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왕이다.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프로테스탄트의 입술로 옮아가고, 그것들이 가장 풍부하고 실천적인 교재들을 내놓는다. 그 안에는 순수한 공상이나 슬기로운 성찰은 없으되, 상식의 기틀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 가르침은 되비추지 않고, 단지 뉘우칠 따름이다. 그 안에는 시도 없고, 아름다움의 빛으로 바라본 것도 없으며, 도덕적 진실만이 그 목적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도덕관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두드러진 점이 순수한 도덕성이라면, 최고의 힌두경전에서 두드러진 점은 순수한 지성이다. 독자들이 참으로 높고, 순수하고, 드문 생각의 자리에까지 올라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바가바드기타』뿐이다. 워렌 헤이스팅스53는 동인도회사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번역을 권하면서, 원전이 지닌 "개념과 추론과 표현의 숭고함은 어떤 문헌과도 견주기 어려운" 것임을 밝히고 나서, 인도 철학자들의 이 저술은 "영국 통치가 끝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도-한때 인도에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던 원천들이 말끔히 잊혀지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경전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책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보다는 얼마나 거룩한 주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동양철학은 현대 서구철학이 다루는 주제들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주제들에 손쉽게 다가가므로, 이따금 동양철학이 이런 주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양철학만이 행동과 사색 양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동양철학만이 사색을 올바로 본다. 서구철학자들은 사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헤이스팅스는 브라만이 받는 영적 훈련과 그들이 다다르는 놀라운 추상능력의 몇 가지 예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느껴지는 감각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써야 그런 능력에 다다르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서반구에서는 지극히 신중하다는 이들조차 지금 느껴지는 대상이나 지난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주의를 한 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에도 그의 주의는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보다 앞선 이들이 모아놓은 지식의 곳간에 일정한 지식을 덧붙이면서 날마다 마음 모으는 명상을 했음을 알게 된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해도 전혀 엉뚱한 짐작만은 아닐 것입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일이 그러하듯, 그들이 꾸준히 마음을 단련시킴에 따라 저마다 바라는 힘을 얻어냈을지 모르고, 그런 집단 연구를 통해 다른 나라의 학자들에게 익숙한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흐르고 뒤섞이는 길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 거의 휘둘리지 않는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이점을 지녔으므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내용일지라도 사실상 우리 자신의 가장 단순한 진리에 못지않게 진리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행위 속에서의 포기"를 가르쳤고, 그것이 대대로 전해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요가가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구나, 오 아르주나여."54 "모든 행위는 빠짐없이 슬기에 이르러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55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악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악인일지라도 슬기의 배에 의지하면 온갖 죄악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56
"이 세상에 슬기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다."57
"슬기를 쓰는 일에 비기면 행동은 아득히 먼 밑자리에 있다."58
"성자59의 슬기는 거북이가 팔다리를 끌어들이듯, 제 감각기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슬기가 튼튼히 섰느니라."60
"어린아이들은 학식과 요가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진 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에만 올바로 서더라도 양쪽 열매를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61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기에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행동을 내버림으로써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도 한 순간이나마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나 타고난 성품에서 일어나는 충동으로 말미암아 아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누르면서도 그 마음이 감각 대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무언가에 혼이 홀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을 떠나 결과야 어떻든 마음에 두지 말고 맡겨진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가 높이 떠받들어질 것이다."62
"네가 할 일은 행함에만 있지, 조금도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하는 까닭을 결과에다 두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행하지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63
"언제나 집착을 떠나 해야 할 일을 하는 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다."64
"행위 속에서 무위를, 무위 속에서 행위를 보는 자가 인류 가운데 슬기롭다. 그는 모든 의무의 온전한 실행자이다."65
"모든 몫이 욕망과 탐욕을 떠났으며, 모든 행위가 슬기의 불로 태워져 버린 사람을 어진 이라 부른다. 행함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만족할 줄 알며,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아무리 행함 속에 있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66
"행함이 결과에 매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탁발승이요, 요기이다. 그는 제사 불을 피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사람과는 다르다."67
"희생을 바친 뒤에 남은 음식이 감로이니, 그 음식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흐마에 들어가느니라."68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 연필제조업자이고, 제정신인 내가 어떡하면 신들과 교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오든 나는 그를 받아준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내 길을 따르는 것이다."69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신약성서에 비춰보면, 이런 가르침은 실제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현실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적지 않다. 브라만은 용감하게 악을 무찌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단지 악을 끈기 있게 굶겨 죽이라고 말할 뿐이다. 카스트 관념,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시대라는 거칠고 사나운 정치가 움직임에 써야 할 그들의 힘을 굳어지게 했다. 크리슈나의 주장은 흠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주나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그의 판단은 "상키야샤스트라70가 깊이 생각해서 다다르는 신앙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직 슬기에서만 피난처를 구하"라지만, 서구 정신에서 슬기란 무엇인가? 크리슈나가 말하는 의무는 그에 타당한 이유가 빠져 있다. 그 의무는 언제 정해지는가? 브라만의 미덕은 옳은 일을 하는 데서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하는 데서 생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행함"이란 무엇인가? "맡겨진 의무"란 무엇인가? 다른 이의 종교보다 훨씬 좋은 "그 사람 자신의 종교"란 무엇인가? "그 사람 자신만의 특별한 소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카스트 제도의 옹호, "싸움터에서 달아나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는" 크샤트리아, 곧 전사의 의무와 같은 "자연스러운 의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옹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행함의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행함에 대해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보라. 동양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서양은 행함으로만 가득 차 있다. 동양은 눈이 멀 때까지 해를 쳐다보고, 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부지런히 쫓아간다. 서양에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들이 있으나, 동양보다는 훨씬 힘이 약하다. 그것이 이곳 서양에서의 보수주의이다. 너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고, 어떤 제도도 어기지 말고, 어떤 폭력도 행하지 말고, 어떤 차용증도 찢어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곧 국가가 너의 부모이다. 그 미덕과 인격은 전적으로 자식으로서의 미덕과 인격이다. 모든 나라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갈등, 말하자면 해를 끊임없이 바라보려는 자와 해 지는 쪽으로 서둘러 가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의 부류는 후자더러, 너희가 해 지는 곳까지 이르더라도 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후자는,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루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놓지 않았느냐고 대꾸한다. 전자에 따르면, "깨달은 성자牟尼는 모든 산 것들이 밤 시간에 쉬러 가는 때인 밤에만 걷고, 모든 산 것들이 깨어 있는 낮 시간에만 잠을 잔다."71
나는 다음과 같은 산자야72의 말을 빌려 여기에 끌어 쓴 글월 전체의 요약으로 삼겠다.
오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저는 더욱더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73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기쁨과 놀람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가 계신 곳, 훌륭한 궁술가이신 아르주나가 계신 곳, 그곳에서는 언제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고, 굳건한 다스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74
경전을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좋은 책을 원한다면, 나는『마하바라타』75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4천 년도 더 지난 시기에-4천 년 전이든 3천 년 전이든 그 시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비야사76가 썼다고도 하고, 아무아무개가 썼다고도 하는, 찰스 월킨스77가 옮긴 『바가바드기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한 경건한 민족의 거룩한 전승의 한 부분으로서, 양키들이라도 존경심을 갖고 읽어볼 값어치가 있으며, 지성을 갖춘 히브리인이라면 그 안에서 히브리 경전에 못지않은 장엄하고 웅대한 도덕을 발견하고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참으로 뛰어난 영국의 학자 겸 비평가에 속하는 이조차 세계의 명사들을 추려내면서 유럽 문화가 옹졸하게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럽 문화의 아들딸 중에서 페르시아와 인도의 시인과 철학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전문적인 시인과 사상가들보다는 상인으로서 아마추어 학자인 이들이 그 시인과 철학자들을 더 잘 알아보았다. 영국 시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이 주제를 다룬 기억할 만한 단 한 편의 시도 찾기 어렵다. 독일이 문헌을 뒤지는 노력을 통해 철학과 시의 큰 줄거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괴테가 어느 정도 인도철학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괴테도 인도철학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만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의 재능도 사물을 가리고 따지는 분야에 더 얼맞은 실제적인 재능이고, 명상의 영역에서는 저 현인들의 재능에 미치지 못한다.
페르시아의 힘이 줄어들고 나서야 유럽 문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도 현대 유럽의 명사 목록에서 동양인의 이름은 고작해야 호머와 히브리인 몇 사람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인류의 가장 훌륭한 명사이자 현대 사상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질 만하고, 아직까지도 그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살아 있는 저 인도의 현인들은-그들의 명상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들이 화가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꿈에서는 철학이 희미하게나마 독특한 진실을 지니고서 동양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데도, 서구 세계에서는 그것의 자리매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철학자들과 견주어 이제껏 현대 유럽은 어떤 철학자도 낳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셰익스피어조차 『바가바드기타』처럼 드넓게 우주를 껴안는 철학에 대보면 청년의 미숙함이자 실천만 앞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자라투스트라의 갈데아 신탁78처럼 수많은 변혁기를 치르고 번역까지 거치면서 살아남은 이 장엄한 글월 중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그 시적 형식과 의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보람 있고 꾸준한 생각을 나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자들은 여전히 '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서구 세계는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모든 빛을 아직까지 끌어오지 못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히브리와 같은 나라의 경전들과 거룩한 글월들을 모아 '인류의 경전'으로 펴내는 일이 이 시대에 당장 서둘러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신약성서는 너무 자주 사람들의 입술과 심장을 오르내리고 있어, 어떤 면에서 보면 경전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나란히 놓고 견주어보면,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멍에에서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인쇄기의 노력에 한껏 영광의 관을 씌워줄, 시간이 편집해야 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이야말로 선교사들이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바이블, 다시 말해 책 중의 책이다.
(중략)
앞은 물론 뒤에까지 눈을 달고서 그 자체를 굽어보는 즐거운 지혜인 『비슈누사르마의 히토파데샤』80와 같은 아주 오래된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닮은 생각들을 만나면 늘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자극을 받게 된다. 이런 책들을 통해 후세가 겪는 일들도 건강하고, 홀로 설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건전함의 증거는 어느 한 책에만 따로 떼어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이따금 즐겁게 그 자체를 돌이켜보기 때문이다. 『히토파데샤』의 줄거리와 그 안에 든 우화들은 사막의 수많은 오아시스처럼 글월에서 글월로 뻗어나가지만, 무르죽81과 다르푸르82 사이를 지나는 낙타의 자취처럼 희미해진다. 그것은 무수히 밀려오는 현대 서적들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다. 읽는 이가 징검돌에서 징검돌로 건너뛰듯 글월에서 글월로 건너뛰는 동안, 줄거리는 급히 흘러가서 잊혀지곤 한다.
이에 비해 『바가바드기타』는 시적이거나 간결한 면은 떨어질지 모르나, 줄거리가 훌륭하게 지탱되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병사나 상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만큼 건전하고 숭고하다. 위대한 시는 읽는 이가 성격이 조급하든 신중하든, 그 나름에 알맞은 비율로 그 뜻을 밝혀준다. 콸콸 흐르는 시내에서 여행자들은 목을 축이고 군인들은 수통에 물을 채우듯, 위대한 시는 실천적인 이에게는 상식일 터이고, 슬기로운 이에게는 지혜일 터이다.(195쪽)
주석
43. 힌두 신화에서 마누(Manu)는 절대존재이고, 대홍수 후 다시 인류를 번성시킨 인간의 시조이자 최초의 법 편찬자이다.
44. '거룩한 자의 노래'를 뜻하는 『바가바드기타』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의 일부를 이룬다. 두 형제 집안이 왕국을 놓고 싸움을 벌이기 직전, 그 한 집안의 셋째인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의 화신)가 깨우침을 베푸는 말씀이 주가 되어 있다.
45.『바가바드기타』3장 카르마요가 8절 참조.
46. 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48절 참조.
47. 3장 29절 참조.
48. 2장 삼캬요가 37절 참조. 삼캬는 학식이나 이론을 뜻한다.
49. 원문에는 goon: 오늘날은 구나(gunas)라고 표기한다(goon→gunas).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을 구성하는 성질을 말한다. 순수한 성질(善性), 사나운 성질(動性), 게으른 성질(暗性)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50. 영어로 aum이라고도 표기한다.ㅏ,ㅜ,ㅁ 세 음(音)이 합쳐져 우주의 틀을 이루는 체계를 총칭하고, 우주의 질대진리인 브라흐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51. 힌두교의 절대자는 브라흐마(거룩한 창조의 능력), 비슈누(유지의 신), 시바(파괴의 신)의 세 가지 인격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52. 인도의 승려 계급
53. Warren Hastings(1732∼1818): 1750년에 인도로 가서 1764∼1769년 사이의 귀국기간을 제외하고 20여 년을 인도 통치에 종사하고, 1773년 초대 벵골 총독이 되었다.
54. 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2절 참조. 즈나나는 지식, 카르마는 행위, 산야사는 욕망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크리슈나는 『바가바드기타』전체에 걸쳐 아르주나에게 요가(요컨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55. 4장 33절 참조.
56. 4장 36절
57. 4장 38절.
58. 4장 37절.
59. Moonee → muni: 성자(牟尼)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즐거움 속에서도 집착이 없으며, 애욕도 두려움도 화도 다 벗어버린 현인을 일컫는다.
60. 2장 58절 참조.
61. 5장 내버림의 요가 4절 참조.
62. 3장 4∼7절 참조. 여기에서 무위는 얽매임 없는 행위를 일컫는다. 모든 함의 보이지 않는 근본이지만, 아무런 집착 없이 하기에 함이 없다 한다.
63. 2장 47절 참조.
64. 3장 19절 참조.
65. 4장 18절 참조.
66. 4장 19∼20절 참조. 여기에서 어진 이(Pandeel→pandita)는 자아실현에 이른 이를 뜻한다.
67. 6장 진정한 요가 1절 참조. 요기는 요가수행자를 일컫는다.
68. 4장 31절 참조.
69. 9장 최고의 지식과 신비 29절 참조.
70. Sankhya Sastra: 상키야 학파는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지식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면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믿음이 중시되어 있다.
71.『바가바드기타』2장 69절 참조.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면서 욕망에서 벗어나 참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잠잘 때 깨어 있다.
72. Sanjay: 왕의 마부로,『바가바드기타』는 그가 장님인 왕에게 전장의 모습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73. Haree: Hare Krishna로, 크리슈나 자신의 별칭이기도 하다.
74. 18장 76∼78절 참조.
75. Mahabharat: 옛 인도의 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길다.
76. Kreeshna Dwypayen Veias: Veias는 '편집자'라는 의미로, 그가 네 『베다』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77. Charles Wilkins(1749∼1836): 식자공이면서 작가로, 1785년에 처음으로 『바가바드기타』를 영역했다.
78. Chaldaean oracles: 갈데아, 즉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지는 단편적인 텍스트들.
79. Madeira: 포르투칼령의 한 대서양 군도.
80. Hitopadesa of Veeshnoo Sarma: 벵골에 전해진 설화집 『판차탄트라』의 이본(異本)으로서, 9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원본의 이야기 5편을 4편으로 개작하고 새로이 17가지의 설화를 추가했다. 이 책도 찰스 월킨스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다.
81. Mourzouk: 리비아 서남부의 오아시스 마을.
82. Darfour: 수단 서부에 있는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