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함께살기 님의 글 내가 걷는 길 1. 큰 출판사와 싸우다에 대해 먼댓글로 써 본 글입니다.)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모욕

······ 소로우는 이렇듯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편집자나 출판업자와의 관계도 별로 우호적이지 못했다. ······ 한번은 소로우가 자기만의 문체로 소나무의 '살아 있는 영'에 대해 표현한 한 문장('그것은 나만큼이나 영원하고, 어쩌면 어느 천국으로 높이 올라가 거기에서 나보다 더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이 편집자의 손에 의해 소로우의 허락 없이 삭제되었다. 그것은 소로우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모욕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 편집자가 교체될 때까지 그 잡지에 어떤 글도 보내지 않았다.(108쪽)



 

아무리 좁고 구불구불할지라도

소로우는 세상이 정해 준 대로 살지 않는 반항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이 학칙을 내세워 학생들에게 검은 코트만을 입을 것을 강요하자 소로우는 학교 안에서만큼은 녹색 코트를 입었다. ······

소로우는 한 사람의 인생을 특징짓는 것은 천성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순종하면서 안으로는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목소리를 좇아 분별없이 자신의 좁은 길을 뒤로 한 채,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큰 길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소로우는 충고한다. 자신의 길을 가라고.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아무리 좁고 구불구불할지라도 그 길이 그대가 애정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길이라면 그대로 그 길을 따라 걸으라. 비록 큰 길 위에 서 있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그의 눈에 보이는 길이 울타리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길이라면, 그 길을 추구해 나가라. 사람이란 결국 자신만의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

소로우는 자신의 삶에서 떠맡을 유일한 책무는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화려함과 초라함, 그리고 그 밖의 대부분의 단어들이 내게는 내 이웃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웃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내가 천하고 불운한 운명 탓에 산과 숲을 떠돌아다니고, 홀로 강을 항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내가 실로 이곳에서 단 하나뿐인 이상향을 갖고 있는 한, 나의 선택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

한번은 소로우가 집에서 키우던 돼지가 울타리를 넘어 도망친 사건이 일어났다.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까지 그 돼지를 잡아들이느라 하루를 다 써버린 뒤, 소로우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녀석의 고집이나 내 고집이나 사실은 피장파장이다. 돼지의 끈질긴 독립심에는 차라리 존경심이 느껴진다. 놈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기를 고집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이든 아니든 말이다. 돼지가 내 뜻에 저항한다고 해서 분별을 모르는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분별력이 더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갖고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어떠한 삶의 틀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누군가가 살아 본 인생, 시도해 본 실험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했듯이 개개의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을 인정했다. 단지 그는 말했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데 열중하지 말라. 당신 말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그 밖의 것은 과감히 버리라." (157∼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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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1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제게도 의미있는 문장들입니다^^

oren 2013-11-11 17:04   좋아요 0 | URL
이 짤막한 인용글이 프레이야 님께도 의미있는 문장들이라니 저도 기쁩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3-11-1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 글은 언제 다시 읽어도 아름답다고 느껴요.
요즈음은 <강>이라는 책, 소로우 님이 처음 쓴 책을 읽습니다~

oren 2013-11-11 17:17   좋아요 0 | URL
소로우 님의 글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 글들이 참 많다고 저도 느껴요.

저도 소로우 님이 쓴 책을 열 권쯤 사놓고 있는데 끝까지 다 읽은 책은 다섯 권뿐이네요. 여태 읽지 못한 <소로우의 강>, <씨앗의 희망> 등을 마저 읽은 다음 맨 마지막으로 <주석달린 월든>-가끔씩 들춰보며 주석에 달린 내용들이 점점 더 낯설지 않음을 발견해 내고 있는-을 읽을 생각이에요.

함께살기 님께서 지금 <강>을 읽고 계시다니 그 책을 읽는 동안 소로우 님의 목소리가 얼마나 또 생생하고 아름답게 울릴까 생각만 해도 그저 즐겁습니다.

transient-guest 2013-11-14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의 글에서는 자기 내면으로,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봅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삶에 치일때 특히 가슴에 와 닿는때가 많더군요. 읽기도 쉽고, 공감하기도 쉽지만 이를 삶에 대입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네요..ㅎ

oren 2013-11-15 12:17   좋아요 0 | URL
공감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참된 삶을 찾기 위해 어떠한 고정관념도 다 무시할 수 있었던 '진정한 용기'를 지닌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좌절하지 말도록 격려를 해주는 듯해요. 그리고 끊임없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도록 부추김을 받는 느낌도 들구요.

정말 아무나 들려주기 어려운 이야기를 아주 친근하고도 설득력있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우리가 얼마만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늘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보라, 색이 바래가는 다채로운 숲을,
색조 위에 색조가 깊어가 세상이 온통
갈색으로 물드는 것을, 거무스름하고 암갈색,
그리고 희미하게 색이 바랜 녹색에서 숯처럼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색깔로, 무리 지어 있는 나뭇잎들을.

 - 제임스 톰슨의『사계(The Seasons)』중「가을(Autumn)」

 * * *

(아래의 인용글들은『소로의 자연사 에세이』에서 '따왔다'. 사진들은 어제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며 찍은 것들이다.)


한 해의 꽃, 한 해의 잘 익은 과일인 단풍

도시에 평생 살아서 이 계절에 시골로 와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아주 많은 사람들은 한 해의 꽃을, 아니 그보다는 한 해의 잘 익은 과일인 단풍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그런 도시 사람과 말을 같이 타고 간 적이 있었는데, 최고로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에는 약 보름쯤 늦었지만, 단풍을 보고 깜짝 놀라며 더 아름다운 단풍이 있었다는 것을 믿으려 들지 않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이 같은 현상에 관해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읍내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단풍을 보지 못했을 뿐더러 해가 지나면 대다수는 거의 기억조차 못한다.(178쪽)





 




마침내는 신화 속으로 편입될 것

아직도 여전히 새파란 다른 단풍나무들이나, 상록수를 배경으로 아주 밝은 선홍색을 발하며 홀로 서 있는 단풍나무 몇 그루는 전체 숲이 점점 물드는 것보다 더 인상적이다. 한 나무 전체가 숙성한 과즙이 꽉 찬 하나의 거대한 주홍색 열매 같고 가장 낮은 가지부터 가장 높은 꼭대기 가지까지 다 불타오르고 있을 때, 특히 태양을 마주해서 그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풍경 속에서 어떤 물체가 더 두드러지겠는가? 몇 마일 밖에서도 다 보이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 같은 현상이 딱 한 번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승에 의해 후손에게 전해지고 마침내는 신화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188쪽)





 




 








우리는 언제 빨갛게 되는 거야?

나뭇잎들은 그 나무에게 "우리는 언제 빨갛게 되는 거야?"라고 작은 목소리로 계속 물어보곤 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바닷가나 산 혹은 호수로 서둘러 떠나는 여행의 계절인 9월에, 이 겸손한 단풍나무는 1인치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그 명성대로 여행을 떠난다-그 언덕 사면으로 주홍색 깃발을 퍼뜨리는데 이는 그 나무가 다른 모든 나무들보다 먼저 여름의 과업을 끝내고서 이제 경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가장 화려하게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찾아낼 수 없던 그 나무가 이제 한 해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 완숙의 빛깔로 그리고 자신의 홍조로 마침내 멀리 떨어져 있는 무관심한 여행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 사람의 생각을 먼지 나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멋진 고독 속으로 이끈다.(189쪽)

 




 
















10월이 한 해의 해질녘 노을이라면

10월은 물든 나뭇잎들의 시절이다. 나뭇잎들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색채가 온 세상에 반짝거린다. 과일과 나뭇잎 그리고 한 날도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을 띠는 것처럼, 한 해도 저물 때가 가까우면 화려한 색을 띤다. 10월이 한 해의 해질녘 노을이라면 11월은 더 늦은 황혼녘이다. (180쪽)





활활 타올라라!

활활 타올라라! 포탑에서 굽이치는 더러운 깃발들이 한 마을이 전시할 수 있는 색채 전부이어야 하겠는가? 계절을 알려줄 이런 나무들 없이는 마을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읍내 시계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 나무들이 없는 마을은 잘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나사가 풀리고 중요한 부품이 빠져 있는 셈이다.(206쪽)









경치라는 순수한 자극제들이 있어야 한다

마을에는 우울과 미신을 막아줄 이처럼 밝고 기운을 돋우는 경치라는 순수한 자극제들이 있어야 한다. 나무로 활력을 얻으며 10월의 모든 광휘로 불타는 한 마을과 그저 허접스러운 쓰레기와 나무도 없는 황무지, 혹은 자살하는 데에 쓸 나무 한두 그루 밖에 없는 두 마을을 내게 보여다오. 그러면 나는 극도로 굶주리고 맹신적인 광신자와 가장 절망에 빠진 술주정뱅이가 후자의 마을에서 발견되리라고 확신한다. 모든 빨래통과 우유통 그리고 비석들이 다 드러날 것이다. 거주자들은 마치 바위들 사이 사막의 아랍인들처럼 갑작스럽게 곳간과 집 뒤로 사라질 터인데 그들 손에는 창이 들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가장 어리석고 비참한 교리-세상은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고 혹은 이미 멸망했다거나 혹은 그들은 스스로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의 마른 관절을 금 가게 하고서는 이를 영적인 교제라고 부를 것이다.(207쪽)






낙엽들은 우리에게 죽는 법을 가르친다

갓 떨어져서 빳빳하고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이 덮인 바닥 위를 걷는 일은 즐겁다. 그 잎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자신들의 무덤으로 가는가! 얼마나 부드럽게 자신들을 눕혀 흙으로 돌아가는가? 수천 가지 색을 띠고 있어, 살아 있는 우리들을 위한 잠자리를 만들기에도 적합하다. 잎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가볍고 경쾌하게 무리 지어 간다. 어떤 상복도 입지 않고서, 자리를 고르고 지점을 선택하여 땅위로 즐겁고 재빠르게 떨어지는데, 철제 담장을 요구하거
나 그 일에 관해 온 숲에다 소곤거리지도 않는다. 어떤 나뭇잎들은 그 아래서 사람들의 시체가 썩어가는 지점을 선택해 중간쯤에서 시체들과 만나기도 한다. 무덤에 조용히 안식하기 전에 나뭇잎들은 얼마나 많이 팔락팔락하는가! 그렇게 높이 솟구쳤던 것들이 높은 곳에서 펄럭일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만족해하며 다시 흙으로 돌아오며,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나직이 누워 나무 발치 아래에서 썩어가며 제 동족의 새로운 세대에게 영양을 공급하려고 몸을 맡기는가! 낙엽들은 우리에게 죽는 법을 가르친다. 불멸에 대해 큰소리치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낙엽만큼 완숙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누울 날이 오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머리카락과 손톱을 버리듯 인디언 서머같이 고요하게 자신들의 육체도 벗어버릴 수 있을지 말이다.(200쪽)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은 거의 볼 수 없다.(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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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4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잎을 저리 찍으니, 다시 겸손해지네요... ^^
호수 공원에서도 찍으신거 맞나요, 맞나 아닌가 갸우뚱해지네요.
제 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 렌즈로 바라본 세상은 참으로 다르게 느껴지기도 해요.

좋은 글과 사진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oren 2013-11-04 16:27   좋아요 0 | URL
연잎이 바싹 마른 모습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탄식을 자아낼 만큼 애처롭다 싶더군요.

사진들은 시간대별로 먼저 찍은 사진들부터 쭈욱 올렸는데, 앞부분 사진들은 제가 사는 동네 주변이구요, 연잎 풍경을 포함한 마지막 여섯 장은 오후에 '호수공원'에 나가서 찍은 사진들이 맞답니다.

마고님 말씀처럼 저 역시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는 풍경이 맨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를 때가 많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해요. 어떨 땐 '눈으로 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로 다 담지 못해 안타까울 때도 있고, 또 더러는 카메라에 달린 '단순한 눈'으로 바라볼 때가 더욱 아름답다 싶을 때도 있고요.

세실 2013-11-0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들이 '우리는 언제 빨갛게 되는거야....'하고 물어본다는 글이 참 예뻐서 상상해 봅니다.
소근 소근, 바스락 바스락!! ㅎㅎ
때로는 눈으로 보는 시선보다 앵글속 시선에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사진 참 좋아요!

oren 2013-11-05 10:27   좋아요 0 | URL
나무들이 소곤대는 '가을의 속삭임'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고 싶은 계절이에요.
소로의 말처럼 '특히 태양을 마주해서' 앵글 속에 들어오는 단풍을 바라보면 가끔씩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을 지경일 때도 있어요.

숲노래 2013-11-04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가을빛 한껏 누리셨네요.
앞으로 겨울이 오기까지
이 빛들
늘 곱게 누리셔요~

oren 2013-11-05 10:32   좋아요 0 | URL
이 아름다운 가을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지요. 나무들이 잎들을 다 떨구고 이제 홀가분한 기분으로 겨울을 맞이하는 동안 우리는 다가올 추위 때문에 더욱 두터운 겨울옷들을 갖춰 입어야 되겠지요.

cyrus 2013-11-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가을에도 이런 붉으스름하게 변한 나뭇잎과 낙엽을 보더라도 여름 못지 않게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지네요. 가을은 아늑하고, 고요스러운 느낌이 나서 좋아하는 계절이었는데 각양각색의 가을나무를 보게 되면, 꼭 그렇지 않은거 같아요. ^^

oren 2013-11-05 10:36   좋아요 0 | URL
가을에 온통 빨갛게 물든 단풍숲들을 보노라면 불이 붙었다 하더라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겠지요.
저마다 고운 빛깔을 맘껏 뽐내는 나무와 풀들이 이 계절을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프레이야 2013-11-05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수공원의 가을 풍경이군요. 사진 분위기에 풍경에취합니다. 저번달에 처음으로좋은벗들과 그곳엘 갔더랬지요. 십일월의 단풍은 시월의 그것과 느낌이 확실히 달라요. 더 깊어지는 달, 좋은날보내세요^^

oren 2013-11-05 10:42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호수공원에 오셨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따사롭고 싱그러운 가을 풍경들을 만끽하실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지난 주말의 단풍들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어진 듯해서 저도 놀랐어요. 이제 고작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계절은 금새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서지 않을까 싶어요. 황혼녘처럼 금새 사라질 늦가을, 프레이야님께서도 좋은 시간들 듬뿍 누리시길 바래요.

timeroad 2013-11-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못에는 가을 옷을 입은 백조도 보이고 미운오리 새끼들이 더 많이 보이는 듯, 연꽃의 씨앗 하나하나를 보주(요의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기들이 집적된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걸까요, 머리가 무거워 물속에 머리를 들이민 풍경들, 보기 좋습니다. 연못에 연이 없어도 연못이라고 부릅니다. 참 이상하지요? 정말 오랜 만에 써보든 댓글입니다.

oren 2013-11-05 22:17   좋아요 0 | URL
연못에 연이 없어도 연못이군요. 참 이상하다 싶다가도, 연꽃이 때만 되면 언제든 또 피어날 테니 잠시 연꽃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걸 '연못'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싶기도 하네요.

onsangggochi 2013-11-1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아름다운 글들과 가울정취들!

oren 2013-11-15 12:11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셔 감사드립니다. 꾸벅~
 


"경북 봉화 산간 지방은 최저 영상 1도까지 떨어지겠습니다."

오랫만에 TV를 통해 확인해 본 지난주 금요일의 일기 예보가 괜히 신경쓰였다. 마침 올해 '가을 산행'을 예정한 곳이 봉화 인근의 '영덕 칠보산'이었던 데다가, 워낙에 추위를 타는 탓에 날자를 너무 늦춰 잡은 게 아닌가 싶어 슬며시 후회되기도 하였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등산배낭 속에 (몇달 전 히말라야 트레킹때 아주 요긴하게 입었던) '고소(高所) 내의'까지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서울은 아직도 단풍이 물들기를 주저하고 있는 동안, 오히려 남쪽 산간지방엔 단풍이 한창이었다. 걱정스러운 추위는 거의 없었고 날씨는 대체로 화창했고 단풍은 예상보다 훨씬 더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 잎을 반짝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듯싶었고, 눈에 띄게 경작지가 늘어난 사과밭들은 온통 빨갛게 익은 사과로 가득했다. 들녘엔 마지막 수확을 기다리는 '노란 콩밭들'을 제외하곤 배추와 무우 정도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고향에서 들은 소식으로는 '무서리는 내렸지만 된서리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 * *

○ 일시 : 2013. 10. 25(금) 12:00 ∼ 10. 27(일) 18:30

○ 이동 경로(총 820km)

    여의도 → 원주 → 제천 → 풍기 → 백암온천 → 후포항(저녁) → 영덕 칠보산 자연휴양림(1박) → 칠보산 
    후포항(점심) →
영양(2박) → 일월 주실마을 → 일월산(1,205m) → 풍기(점심) → 제천 → 일죽 → 일산



 - 울진 후포항, 영덕 칠보산 자연휴양림, 영양, 일월 주실마을, 일월산 주변

 


 

 - 칠보산 자연휴양림에서 동해 쪽으로 내다본 풍경. 저 멀리 바다가 흐린 하늘과 맞닿아 있다.





 - 맑은 숲속 공기처럼 말끔해 보이는 칠보산 자연휴양림 숙소.





 - 언제나 뽀얀 맨살을 드러내고 있지만 철마다 때 맞춰 몸단장을 잊지 않는 자작나무.





 - 칠보산 오르는 산길이 고요하고 따사롭다.



 - 단풍은 봐주는 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이곳 산 속에서도 어김없이 붉게 물들었구나.





 - 이 녀석은 소나무를 따라 기어올라 푸른 하늘을 실컷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키큰 소나무숲 아래에서도 단풍은 넉넉하게 붉게 물들었다.





 -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채 쓰러져 조용히 썩고 있다.





 - 쓰러진 소나무가 살아 숨쉴 적에 이웃이었던 저 단풍나무들은 소나무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까?





 -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여기서 조용히 자연으로 되돌아간 소나무 한 그루.
    저 소나무의 죽음은 그저 한낱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 가는 것일 뿐 한 조각의 슬픔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 소나무의 죽음

이제 나무가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언덕 비탈에 바람을 보내고는 계곡에 있는 자신의 잠자리,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자리에 눕는다. 전사처럼 자신의 녹색 망토로 몸을 감싸면서 깃털처럼 부드럽게 눕는다. 서 있는 것이 이제는 싫증이 난다는 듯 자신의 구성 분자들을 흙으로 돌려보내며 말 없는 기쁨으로 지구를 감싸안는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中에서


 

 

- 수수한 단풍 색깔이 더 곱게 느껴진다.




 - 제법 붉은 단풍이지만 햇볕이 들지 않아 몹시 화려하진 않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몹시 경쾌하다.





 - 가벼운 산행길이라 어느새 하산길을 재촉하는 길. 주위엔 온통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 이곳 산 속엔 유난히 한 몸에서 나와 두 줄기로 자라는 소나무가 많다.





 - 이 소나무는 두 다리를 마치 하늘로 뻗은 듯한 모습이다.





 - (윗사진과 같은 나무)
   하늘 높이 뻗은 나뭇가지가 마치 땅 속 뿌리처럼 하늘의 맑은 공기들을 빨아들이는 듯싶다.





 - 머지 않아 곧 바스라져 한줄기 휘잉~ 부는 찬바람에 어디로 사라질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빨갛게 익어 아침 저녁으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길 때다.





 - 이곳 나뭇잎들은 도시에서 자라는 녀석들보다 왠지 모르게 훨씬 더 행복해 보인다.





 - 솔향기, 가을햇살과 함께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곳.





 - 일요일 아침.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에 고향 근처 '일월 주실마을'의 조지훈 생가에 들렀다.





 - 조지훈 생가인 '호은 종택' 마당 안에서 대문밖 정면에 솟아 있는 '문필봉'을 바라본 모습.





 - 주실마을 풍경.




접힌 부분 펼치기 ▼


영양 주실마을

 

마을 북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고 그 옆으로는 문필봉(文筆峰)과 연적봉(硯滴峰), 노적봉(露積峰) 등 해발 200m 높이의 봉우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인근에는 반변천이 흐른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주실쑤’라는 울창한 숲이 있다.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오늘날까지 가꾸어 온 것으로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 혹은 ‘시인의 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은 약 38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후 한양을 떠나 마을로 온 조전은 1630년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고 이후 한양 조씨의 씨족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옆의 문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띄고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봉우리로 문필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마을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이 있다. 박두진, 박목월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이었으며 대표작인 <승무>와 ‘지조론’이 유명하다. 신간회 동경지회장이었던 민족운동가 조헌영도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풍수론에 따르면 마을 형태는 배 형상을 띄고 있다고 하여 마을 안에는 되도록 우물을 만들지 않았는데, 배에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게 되는 것처럼 액운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현재까지도 마을 내 우물은 한 곳에만 있으며, 주민들은 50여리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

마을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제178호)이다. 마을에 처음 정착한 조전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7세기 말 처음 세워진 것으로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옥 형태인 ㅁ자형구조 가옥이다.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었다가 1963년 중건되었다. 또 다른 대표 건축물인 옥천종택(玉川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은 1694년 처음 지어졌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네 방향의 건물이 모두 연결된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ㅁ자형 가옥형태이다. 옹기를 여러 개 이어 만든 옹기굴뚝이 건물 밖에 세워져 있으며 가옥 내부에는 마을에서 하나뿐인 우물이 있다.

과거 안동문화권에서 가장 반(反)안동적인 마을로 불렸다. 조선시대 당시 정통 성리학을 고수하며 보수적이었던 영남지역의 일반적인 양반마을과 달리 일찍이 실학을 접하고 근대화를 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영양에서 교회가 가장 일찍 들어섰고 1900년대 초에는 마을 전체적으로 단발을 시행하였다. 또한 영양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인 영흥학교에서 신교육이 이루어졌으며1911년에는 노비를 해방하는 등 보수적인 영남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 마을에는 조지훈문학관이 있고 마을 곳곳에는 조지훈의 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주변 명소로는 전통 정원인 서석지와 감천 마을, 일월산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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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월산 정상의 월자산봉(1,205m)에 올랐다.





 - 동해 바다 쪽으로 바라본 모습. 첩첩이 펼쳐진 산자락마다 제각기 철맞는 옷으로 갈아 입은 모습이다.





 - 모든 게 사라져가는 가을에도 '찬란한 봄'을 잊지 말라는 듯 풀빛이 몹시 싱그럽다.





 - 파란 하늘에 맞닿은 저 능선 위 나무들은 곧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앙상한 가지들만 남을 게 뻔하다.
    봄철에 새로 돋은 듯한 저 풀들은 첫눈이 내릴 때까지도 여전히 저런 모습으로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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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맛보는 특별한 음식들을 쏙~ 빼놓기는 조금 아쉽다. 배고픈 분들이 이 사진들을 보게 되면 혹시라도 침이 고이다가도 금새 배가 아파 올지도 모르겠다. 혹시 주변을 여행할 기회가 되는 분들은 음식점 이름을 기억해 두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글쎄, 좀 보라

글쎄, 좀 보라. 자기 머릿속에 처넣은 사상 때문에 맛있는 식사도 돌아다 볼 생각을 않으며, 이런 먹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느냐고 불평하는 자의 잡념과 허상을 마음놓고 그대에게 말하도록 해 보라. 그대는 식탁의 모든 반찬들 중에 그의 영혼이 말하는 그 훌륭한 이야기보다 더 멋쩍은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의향은 그대의 스튜 요리만한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르키메데스의 황홀경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 특대(特大) 모듬회(후포항 '안동횟집'). 가격도 싸고 회가 싱싱하고 단맛이 날 정도로 고소하다.




 - 비록 '영덕대게'는 아니지만 '홍게'라도 이곳에서 먹는 게맛은 역시 다르다.(후포항 '안동횟집')




 - 석달 전 여름에도 이 식당에서 물회를 먹었었다. 물회맛은 정말 일품이다.(후포항 '안동횟집')




 - 고향 친구가 손수 그물로 잡아서 끓여낸 '민물매운탕'. 맛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 '소백산 한우'로 무친 싱싱한 육회(풍기에 있는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 생갈비살과 등심(풍기에 있는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 숯불에 굽는 생갈비살. 맛 뿐만 아니라 착한 가격(200g에 23,000원) 때문에 더욱 만족스럽다.



 - 일행 넷이서 점심때 먹은 '낮술'로는 다소 많다 싶었지만 안주가 좋았던 만큼 술이 오히려 부족하다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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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 이래서 가을이 좋다
    from Value Investing 2015-11-02 19:42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페크pek0501 2013-11-0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사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재밌네요. 사진도 물론 좋고요.
자작나무의 길을 보니, 산책을 좋아하는 저로선 걷고 싶어지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길이 들어가 있는 풍경을 좋아합니다.
가을 풍경을 잘 감상했어요.
어제 10월의 마지막 날이 흘러가 버려서 이젠 11월이네요.
아, 이렇게 해서 한 해가 또 가고 있네요.



oren 2013-11-01 15:18   좋아요 0 | URL
일년을 아쉬움 없이 흠뻑 느끼고 싶어서 '가을 산행'을 해마다 꼬박 꼬박 다녀 오는데, 그 때마다 느끼는 게 '올 한 해도 벌써 다 저무는구나' 싶은 생각이에요. 붙들 수도 없는 세월이라면 온 몸으로 느껴볼 수밖에요. ㅎㅎ

yamoo 2013-11-0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만 봐도 얼마나 좋은 여행하셨는지 느껴집니다. 가을 산행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산행을 아주 안좋아하지만 가을 산행은 정말 가끔 가곤합니다. 하지만 서울 근교가 전부...오렌님의 사진으로 올 가을 산행은 대체하렵니다~ㅎㅎ

oren 2013-11-03 23:47   좋아요 0 | URL
yamoo님께서도 저처럼 나이가 좀 들면 '편력'을 좀 더 자주 하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yamoo님께서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플라톤의 법칙을 따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 * *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 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장님이 손으로 더듬듯 얼마나 컴컴한 구름 속을 거쳐서 잡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습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도 보아 싫증이 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빛나는 창공을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런 사물들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이 사물이 처음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마치 그것이 갑자기 그들 눈앞에 놓여졌다고 상상하라.
이보다 더 기적에 비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것을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루크레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 * *

영화 <그래비티>를 본 탓일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리 낯설지 않은 어느 가을날의 해 질 녘 모습이,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꾸만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갑자기 무중력의 공간에 내던져진 듯,
발 아래가 자꾸 허전하다.

중력이 우리를 지구 표면에 꼼짝없이 꽉 붙들어 매어 놓았는데,
왜 중력보다 더한 어떤 힘이 있어 우리를 단 한 순간만이라도 멈추게 하지는 못할까?


 


Shooting Date/Time 2013-10-21 오후 5:32:38


 


Shooting Date/Time 2013-10-21 오후 5:38:33


 


Shooting Date/Time 2013-10-21 오후 5:40:29



 * * *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그 진리와 규칙들이 다른 우주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다른 우주들은 아마도 다른 모습과 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극히 짦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명인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인지 누가 아는가?      (에우리피데스)

그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이 영원한 밤의 무한한 흐름 속의 한 섬광이며, 우리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 조건의 극히 짧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자격을 얻을 것인가? 죽음은 이 순간의 앞과 뒤의 전부와, 이 순간 자체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자들은 멜리소소의 추종자들처럼 운동이라는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왜냐하면 이 우주가 하나밖에 없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천체의 움직임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움직임도 여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자연에는 생산도 부패도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출생한 일이 결코 없었고,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며, 시간이 그것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는 일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란 움직이는 사물이며, 항상 그림자같이 나타나고, 그 재료는 항상 흐르며 유동하고, 안정해서 머무른다든지 항구적인 것이 없고, 그것에 '전에', '뒤에', '있었던 것', '있을 것'이라는 말이 해당되는 것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을 단번에 보여 준다. 왜냐하면 아직 존재로 있지 않은 것, 또는 이미 존재로 있기를 멈춘 것을 존재한다고 말함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고, 아주 확실한 거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그것으로 시간의 이해를 세우며 유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현재'·'순간'·'지금' 같은 말로 말하면, 이성은 그것을 발견하며, 당장에 그것을 부숴 버린다.

이성은 즉석에 그것을 쳐서 미래와 과거로 갈라 버린다. 마치 필연적으로 둘로 갈라 놓고 보려는 식이다. 자연을 측량하는 시간에서와 같이, 측량당하는 자연에게도 일은 마찬가지로 되어 간다. 자신에게도 머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 반대로 거기서 모든 사물들이 출생되었거나, 출생하고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단 하나 존재하는 신을 가지고, 그가 전에 있었다든가 장차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지속할 수 없거나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의 변화·통과·변천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신 혼자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어느 시간의 척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겪을 수 없고 움직임이 없으며, 시간으로 측량되지 않고, 어떤 쇠퇴도 당할 수 없는 영원성에 따라서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뒤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더 새롭다는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것도 없고, 단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유일한 '지금'을 가지고 영속을 채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는 있었다'라거나, '그는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신 하나밖에는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어야만 할 일이다.

"만일 인간이 인간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굴하고 더러운 사물인가!" (세네카)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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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10-23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가 아름다운 무한수의 자연 풍경을 실제와 똑같은 사진을 봤다면 엄청 놀라고, 흥분했을겁니다.

oren 2013-10-23 20:02   좋아요 0 | URL
cyrus님 덕분에 제가 잘 몰랐던 화가인 프리드리히라는 인물이 그린 그림을 여러 점 살펴볼 수 있었네요.

그의 그림을 보고 난 뒤에 '그의 풍경은 자연과 인간의 감성이 미묘한 전이를 겪는 시간, 새벽과 석양이 주를 이루고······' 라는 설명글을 나중에 읽어 보니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저같은 사람도 조금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할 만하다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숲노래 2013-10-2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날 노을은
다른 어느 철보다
빛깔이 짙고 냄새도 느낌도 훨씬 보드랍구나 싶어요.
이런 가을날에
저녁빛을 놓칠 수 없겠지요~

oren 2013-10-24 10:10   좋아요 0 | URL
철마다 해 뜰 무렵과 해 질 녘 모습이 그만큼 다르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세실 2013-10-2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했습니다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정작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오늘 저녁 석양은 잊지 말고 봐야겠습니다.

oren 2013-10-28 11:13   좋아요 0 | URL
날씨가 차츰 아침 저녁으로 추위를 느낄 만큼 변해 가면서 따뜻한 저녁 노을을 볼 날도 그리 많지 않을 듯싶어요. 깊어가는 가을, 좋은 풍경들 자주 마주하시길 바랄께요~

transient-guest 2013-10-25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의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서 소중함을 보는 oren님의 비전이 참 좋습니다. 올려주신 사진은 계속 봐도 질리지가 않네요.

oren 2013-10-28 11:16   좋아요 0 | URL
나이를 먹을수록 주위의 풍경들이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또 자연은 언제나 조금도 사소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이 오히려 훨씬 더 사소하다는 느낌도 들어요. ㅎㅎ

페크pek0501 2013-11-0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롭게 산책하기엔 해질녘이 최고죠.
오렌 님도 해질녘을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oren 2013-11-01 15:19   좋아요 0 | URL
해가 저물 무렵이 하루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때가 아닌가 싶어요. 해가 뜰 때도 가끔 찬란하긴 하지만요.

yamoo 2013-11-0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크레티우스, 몽테뉴의 글들이 아름다운 석양 사진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네요~
나중에 여행기 사진을 모아서 읽었던 책의 인용구를 이런 페이퍼 식으로 조합하면 좋은 책한권이 그냥 탈고될 거 같아요~^^

oren 2013-11-04 00:09   좋아요 0 | URL
yamoo님의 권고대로 '그렇게 쉽게 탈고되는' 책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책이 과연 한 권이라도 팔릴까 그게 걱정이지요.

몽테뉴의 말대로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 올리는' 그런 글을 단 한 줄만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책 한 권' 써 볼 욕심을 내어 볼텐데 말입니다.

* * *

그들의 언어는 지조 있는 자연스러운 힘으로 충만하며 벅차다. 그들은 꼬리뿐만 아니라 머리와 배와 다리 전부가 풍자시이다. 거기에는 억지가 없고 길게 잡아 늘린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같은 태세로 진행된다. "그들의 사상은 남성적 미의 상징이다. 그들은 단지 말을 꾸며서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세네카)

그것은 가시 없는 무른 웅변이 아니고, 힘줄이 박히고 담담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보다는 채워서 황홀하게 하며 가장 강력한 정신들을 감복시킨다. 이러한 훌륭한 문체가 그렇게 생기있고 심각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말이 잘됐다고 하지 않고 생각이 잘됐다고 말한다.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올리는 것이다. "웅변을 만드는 것은 흉금이다."(뮌틸리아누스) 우리네는 속이 찬 개념들을 판단력이니 언어니 아름다운 문장이니 하고 부른다.

이러한 묘사는 숙련된 문장력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고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더 생생하게 마음속에 받았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갈루스는 단순하게 말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호라티우스는 피상적인 표현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물을 더 명확하게 더 멀리 내다본다. 그의 정신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과 모양의 곳간 전체를 뒤져서 옭아내 온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 예사로움을 벗어나므로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는 사물들을 통해서 라틴 말을 본 것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 몽테뉴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자연은(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눈물의 비를 흘릴 것이며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제를 갖지 않겠는가? 나 자신의 일부분이 그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

 - 『월든』 중에서


 * * *

소로는 내가 그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더라면 결코 그런 인물이 있었으리라고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을 듯싶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비록 너무 젊은 나이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그가 평생 동안 '영원한 현재'를 붙잡기 위해 '순간의 기념비'에 글을 새기듯 써 놓은 일기들을 읽어 보면 그가 아직도 여전히 우리 곁에 바싹 가까이 머무는 듯하다.

나는 가끔씩 그가 '지금 여기' 되살아 나온다면 그의 일기는 도대체 어떤 내용들로 채워 나갈지 너무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가 떠난 후 150년 동안 '문명'은 비록 '발전'했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은 그가 '걱정'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퇴보했음이 갈수록 분명해 보인다. 사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가 지금이라도 당장 나타나서 '어서 그 바보같은 짓들을 당장 멈추지 못할까!'하고 호통칠까 두렵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홀로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숲속에서 '자발적인 가난'을 겪은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절박하게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삶을 갈망했으며 자연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과 환희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누구보다 더 '사람들의 삶'을 걱정했던 사람이다. 그가 남겨놓은 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말대로 "
소로는 살아생전에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독백을 했다. 그러나 사후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어쩌면 수억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호소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석달린 월든』中에서)


그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랄 때부터 이미 자연과 온전히 동화된 삶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는 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삶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그가 쓴 일기들은 스무 살 때나 마흔 살 때나 한결같은 느낌이 든다. 그가 스무 살 때 쓴 일기들을 보면 몽테뉴의 말이 떠오른다. "나로서는 우리 심령은 20세가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 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 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 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시를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는 그만큼 자연과 인류 문명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일찍 깨달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모든 흐름에 대해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지만 아주 파괴적인 사람이다. 예수 못지않게 과격한 인물이다. 그는 마르크스처럼 사회를 전복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명을 거부하는 마르크스의 국가는 다른 생명 거부의 국가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대의 일반적 흐름에 온몸을 던져 반대했다."는 평가를 듣는 인물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들 때문에 스스로 즐겁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우선 그의 글 속에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자연'을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나도 이미 고향을 떠나 복잡한 대도시에 몸을 깃들여 산지 벌써 서른 해를 넘겼지만 그래도 드물지 않게 '내고향'을 가끔씩 찾아가 본다. 그리고 고향을 찾을 때마다 잊고 지내왔던 '고향 냄새'를 다시금 느끼며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남몰래 느낄 때도 많다. 그렇지만 소로의 글을 읽을 때면 그런 행복감을 '아무때나' 느낄 수 있다. 소로의 책을 펼치면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온갖 다채로운 풍경들이 골고루 떠오르며, 고향 시골에서 '자연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 순간들'이 좀 더 파노라마처럼 길게 이어지며 좀 더 아름다운 영상으로 뚜렷하게 펼쳐지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어서 좋다.

나는 또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꿈을 꿀 수 있어서 좋다. 가끔씩은 그의 책을 읽는 동안에 벌써 '내가 살 집을 짓고, 그 곳에서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용한 절망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깨닫고, 소로는 철저히 자신의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 나가기로 결심했다. 적응하고, 동화하고, 합류하고, 개혁하고, 완성하는 대신에 삶 그 자체를 살아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소로의 글이 매번 즐겁게 읽히다가도 나는 그가 보여준 '강력한 실천이라는 덕목'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며 곧바로 나 자신을 스스로 책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소로처럼 자연을 즐기고 해석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의 생활 방식은 별 호소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폭넓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를 더해갈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 * *

(아래의 글들은『소로의 자연사 에세이』에서 '따왔다'. 그나마 사진들은 내가 찍은 최근의 것들이다.)


매미의 울음소리

자연에는 빈틈이 없고 모든 부분이 생명으로 가득하다. 나 또한 즐겁게 여름 한낮을 가득 채우며 영원의 조직과 결이 바로 이런 것들로 이루어졌겠구나 싶은 온갖 소리의 근원을 탐구한다. 날카로운 점호 나팔 같은 매매의 울음소리를 누가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아나크레온의 송시에서 보듯 오래전에 그리스에서도 이런 소리를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15쪽)


Shooting Date/Time 2013-09-01 오후 3:12:46


귀뚜라미의 우는 소리

가을철 한낮에는 어디서나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에는 주로 해질녘에 우는 데 반해 가을 이때쯤에는 끊임없이 울어대는 한 해의 저녁을 재촉한다. 세상을 괴롭히는 그 모든 허망한 것들이 밤이 선택한 선율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모든 맥박 뛰는 소리는 귀뚜라미의 노랫소리와 벽 속 살짝수염벌레의 사각사각 소리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할 수 있거든 이것들과 맥박 소리를 번걸아 들어보라. (17쪽)


지는 해가 웅장한 소나무 숲의 반대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169쪽)


Shooting Date/Time 2013-09-30 오후 6:06:47


마침내 해와 바람이 자신들을 가렸던 커튼을 걷어내면 하늘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30쪽)


Shooting Date/Time 2013-10-06 오후 5:47:23


우리의 탐험


사실 우리는 소심한 원정대원들이며, 요즈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며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일은 해보려 들지 않는 걷는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의 탐험은 저녁이면 우리가 출발한 익숙한 벽난로 곁으로 되돌아오는 여행일 따름이다. 그 산책의 절반은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아주 짧은 산책이라도 불멸의 모험심에 사로잡혀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 황폐한 왕국에 방부 처리된 우리의 심장을 유물로 보낼 준비를 갖추고서 말이다. 부모와 형제자매, 부인과 아이, 그리고 친구들을 떠나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준비가 되어 있고, 빚을 갚고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모든 일을 정리해서 자유인이 되었다면 비로소 당신은 산책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126쪽)


Shooting Date/Time 2013-10-06 오후 6:15:57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사물들이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 있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눈을 그쪽으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젤리(jelly)에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눈 그 자체에도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은 거의 볼 수 없다.(216∼217쪽)


Shooting Date/Time 2013-10-10 오후 5:38:04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모든 바람에 몸을 내맡겨라. 어떤 계절이든 당신의 모든 구멍을 열어 자연의 온 기운을, 모든 하천과 대양을 들이마셔라. 독기와 감염은 몸 밖이 아니라 몸 안에서 생긴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연법칙에 어긋난 삶을 살다 무덤가에 이른 병약자는 그렇게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삶을 지속하면서 특정한 풀로 만든 차만을 마시는데, 이는 바람구멍에서는 절약하지만 마개에서 낭비하는 셈이다. 그는 자연도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않은 채 병들어 죽어가기에 그를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다.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물병처럼 각 계절의 영향력을 마셔라. 너를 위해 특별히 조제되어 어떤 치료에도 쓰일 수 있는 진정한 만병통치약이다. 여름의 물병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고, 그의 지하저장실에 저장해둔 물병만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 네가 빚은 포도주가 아니라 자연이 담아준 포도주를, 염소나 돼지가죽에 보관한 포도주가 아니라 가지각색의 고운 베리 껍질에 담긴 포도주를 마셔라.

대자연이 너 대신 담고 절이고 보존하게 하라.

모든 자연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자연의 존재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 반항하지 말라. 아무리 약한 체질이라도 병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온 자연이 아니라 몇몇 야생 것들만이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알아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신이 봄 혹은 여름, 가을, 겨울에 몸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말장난을 용서한다면 이는 그들이 참으로 그러한 계절 속으로 잘, 즉 제대로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318∼319쪽)

 

 * * *

소로의 일기 엿보기

접힌 부분 펼치기 ▼

 

1852년

7월 26일

내가 사람과 멀어진 이유는 자연과 친밀해졌기 때문이다. 태양과 달, 아침과 저녁에 대한 나의 관심이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석양 진 하늘만큼 숭고한 그림은 없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 그 누구와 만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사람들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명확히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은 인간 사회로부터 멀어진다. 교제에 대한 나의 욕망은 무한히 크지만 실제 사회에 대한 나의 적응력은 오히려 감소한다.


1854년

4월 16일

요즈음 한 이웃이 불쾌감을 줄 정도로 품위를 내세우고 다닌다. 그와 만날 때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안녕! 나는 자네가 태도를 바꿀 때를 기다리겠네. 당장 말 한마디에 자네의 명예가 무너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수고스럽게 고상함을 뽐낼 필요가 뭔가? 나는 가볍고 가느다란 칼에 찔려 상처를 입는 것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네. 자네의 위엄이 하도 당당해서 나는 자네의 반경 3미터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라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상대방을 위압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왜 단순하지 못할까? 자기 자신만을 가치 있는 인물이라고 간주할까? 오, 나는 어째서 이런 얇은 피부나 토기만을 상대해야 하는가? 그들은 내가 웃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가? 반박할 수 없는 대단한 위엄을 지닌 사람들!

(『몽테뉴 수상록』가운데 어떤 구절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조금 이상할까?)
 

'재치가 아니라 심령이 문제될 때에' 마음에 드는 것 모두가 배불려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키케로의 《투스쿨라나에》(키케로의 대표적 작품)를 못 읽어 보았더라면 죽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나는 이제 진실로 죽음을 마주 대하고 보니, 말재주는 좀 늘었으나 마음에는 별로 얻은 것이 없다고 느낀다. 마음은 내 본성이 만들어 준 그대로이며, 사람들과 공통의 보조로 싸움을 위해서 무장하고 있다. 책은 나를 훈련은 시켜주었을망정 가르쳐 준 것은 별로 없다.

뭐라고? 학문이 새로운 방어책을 가지고 우리가 타고난 불운에 대항해서 새로운 방비로 무장해 주려고 시도하다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이치와 묘책을 지닌 것 이상으로 이 인생이라는 불운이 바로 거창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인상을 우리의 사상 속에 깊이 새겨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학문이 우리를 쓸데없이 깨우치는 묘책이다. 속이 가장 짜이고 현명한 작가들을 두고 보아라. 그들은 옳은 논법을 둘러서 얼마나 경박한 다른 논법들을, 그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이 빈 논법들을 뿌려 놓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언어만의 헛된 말재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달리 쓸데없이 너저분한 이론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서적 속에도 빌려 왔거나 모방했거나 해서, 이런 식의 문장이 상당히 여러 군데에 끼여 있다. 그러므로 좀 묘한 구절을 힘차다고, 날카로운 점을 견고하다고, '마시기보다도 맛보기에 더 좋은 것'(키케로)을 가지고 잘되었다고 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재치가 아니라 심령이 문제될 때에'(세네카) 마음에 드는 것 모두가 배불려 주는 것이 아니다.(1156쪽)

 



8월 9일

보스턴으로 갔다.
《월든》이 출간되었다.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그가 일기에 남긴 기록을 보면 『월든』은 그에게 지극히 평범한 사건 중 하나였을 뿐인 듯하다. - 『주석달린 월든』중에서

 


9월 2일

나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패러독스 - 정반대의 것만을 말함 - 모방일지 모르는 방법.
착상의 교묘함.
말로 희롱함 - 되웃어주는 것 - 단순 - 강건 - 명료하지 않을 때도 있음.
나 자신의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유명한 표현이나 격언을 사용함.
진지하지 못할 때도 있음. '요컨대', '사실', '참으로!' 등. 의식의 결여.

(나의 생각)
나의 잘못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만, 소로의 일기장에서 '내가 너무나 자주 저지르는 잘못'을 발견한 건 좀..... 감격스럽다.

 

펼친 부분 접기 ▲




『월든』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대목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 싶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 『월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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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로우의 질문과 대답
    from Value Investing 2013-11-22 15:35 
    (밑줄긋기) 당신의 글(소로우가 잡지에 발표한 산문)을 읽고 전에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다시금 내 기억 속에 떠올랐습니다. 지난번 콩코드에서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당신은 우리의 문명 사회를 떠나는 것에 대해 진지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 친구들이 속해 있는 이 사회가 그립지 않겠느냐고. 당신의 대답은 매우 단호하고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아니오. 난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습니다." (13쪽) "강둑 위를 환하게 비
 
 
숲노래 2013-10-1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 글을 떠올리며 사진을 찍으셨나요?
사진이 보드랍고 따스합니다.

번역글 가운데 "곡식 노랗게 익으라" 하고 옮긴 대목은
번역을 잘못했지 싶어요.
oren 님도 시골에서 자라셨다면 아실 테지만,
곡식은 '노란' 빛이 아니라 '누런' 빛이니까요.

제가 오늘 읽은 어느 번역책에는
'태양빛 먹으며 자라는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번역이 잘못되었어요.
나무도 풀도 곡식도 '빛' 아닌 '볕'을 먹거든요.

햇볕을 먹어야 풀과 나무가 자라고, 사람도 햇볕으로 비타민 성분을 얻어요.
햇빛은 사물을 알아보고 무지개와 같은 빛깔을 이루도록 하는 기운이에요.
볕과 빛, 여기에 살(햇살)을 제대로 가눌 줄 아는 작가와 번역가가 드문 탓은
아무래도 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만 했을 뿐,
막상 시골살이나 숲(자연)을 가까이하지 않아
머리로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모르기 때문이지 싶어요.

저는 요즈음 완전히 절판되어 사라진 소로우 님 평전을 읽는데,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복간되지는 않은 듯하고,
복간될 수 있을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소로우 님 책 그러모은 사진이 참 보기 좋습니다.
저기에 <씨앗의 희망>도 찾아내어 함께 그러모으실 수 있기를 빌어요.
<씨앗의 희망>도 참 훌륭한데, 안타깝게 너무 일찍 절판되어서... ㅠ.ㅜ

oren 2013-10-12 11:48   좋아요 0 | URL
소로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분을 닮은 분들이 여기 우리나라에도 적지 아니 계시리라 저는 믿고 싶어요. 그리고 그리 멀리서 찾을 일도 아니고 바로 이곳 알라딘에도 한 분 계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함께살기 님의 글을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소로의 글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자주 들고요.

함께살기 님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은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의 마지막 쪽에 나오는 글인데, 제가 인용한 대목인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라는 표현은 굳이 '곡식'이 무르익는 모습만을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소로가 이 책의 여러 에세이 가운데 《산책》,《가을의 빛깔》,《야생 사과》,《허클베리》등에서 자연(풀,꽃,나무,과일 등등)의 온갖 빛깔들을 다채로운 언어로 섬세하게 묘사한 부분들을 읽어보면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는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나 과일'에 빗댄 것처럼 읽히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월든』에서 인용한 '나 자신의 일부분이 그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라는 대목을 보더라도 그렇고,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이 다행히 '생태와 환경에 관한 글'을 많이 쓰시는 분이라는 점을 살펴 보더라도(역자 소개에는 문학과 환경학회 창립 멤버로서 회장을 지냈다고 나옵니다) 번역이 그리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함께살기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곡식은 누렇게 익는 모습이 가장 흔하리라 저도 생각하구요.

소로의 평전은 저도 '구경조차' 하지 못했는데 함께살기 님께선 그런 귀한 책도 갖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씨앗의 희망》은 저도 올해 봄에 사 두었는데 그 책이 벌써 '절판'되었군요. 제가 산 책은 책값이 9,800원인데, 알라딘 중고상품 가격은 최저 15,000원부터 최고 37,000원까지 '꽤나 비싸게' 나와 있는 게 제법 흥미롭군요.

yamoo 2013-10-1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전부 소로우의 저서들이네요!!!! 전 월든 한 권 밖에 없는데....
소로우는 미국정신을 만든 인물 중 하나라서 언젠가는 전집을 읽어보아야 하는데, 계속 멀어지기만 하네요...ㅜㅜ
지난 번 도올의 중용 강의에서 소로우의 위대함을 다시금 접해서 관심만 뭉게뭉게 커져가고 있습니다..ㅎ

자연과 더불어 산 소로우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아래의 자연 사진은 정말 멋지네요!!!



아, 근데 이 페이퍼 작성 시간이 새벽 2시가 넘었어요!

oren 2013-10-12 11:24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을 여러 권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농담이 아니구요. 제가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살 때만 하더라도 『월든』한 권의 책값이 겨우 9,800원에 불과했어요.(제가 와장창 사들인 책은 [개정2판 16쇄, 2010년 4월 9일]에 나온 책이네요. 그렇게 사 둔 책들을 가끔씩 '월든을 읽을 만한 분들께' 선물로 드리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무척 싸게 사들인 책도 이제는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페이퍼를 작성한 어젯밤은 사실 무척 피곤한 상태였어요. 마침 어제 오후에는 고교동기 녀석들 여럿이 함께 제법 쎄게 불던 가을 바람과 맞서 싸우며 운동을 했고, 저녁이 늦도록 웃고 떠드느라 집에 들어온 시간이 제법 늦었거든요. 그래도 그 모임에 최후까지 남아 있지 않고 빠져 나온 덕분에 이 글이라도 쓸 수 있었어요. ㅎㅎ

saint236 2013-10-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의 책이 이렇게 많군요....

oren 2013-10-14 14:11   좋아요 0 | URL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글을 썼던 점에 비춰 보면, 막상 출판되어 세상에 나온 책이 그리 많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해요.

2013-10-13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4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10-1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가을과 풍경과 추억과 사진... 이 다섯 가지를 깊이 감상할 줄 아시는 행복한 예술가이십니다, 오렌 님은...^^

oren 2013-10-14 14:17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정작 저는 갑자기 불어닥친 '가을 바람'에 겁도 없이 쏘다니며 나돌아 다녔더니, 몇 년 만에 제대로 찾아온 심한 감기·몸살을 얻게 되어 여러모로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요... ㅠㅠ

2013-10-1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