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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계보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평점 :
생존은 늘 힘겹고 비참하다. 인간에게도 그렇다. 이를 전제로 헤시오도스는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경고한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를 타고 장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부터? '그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 ([알라딘서재]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1 (aladin.co.kr)에 이어지는) 2부다
판도라는 왜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까?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튀어나온 것은 인간의 몸(육체)를 괴롭히는 온갖 질병들이었다. 또한 인간의 마음(정신)을 괴롭히는 불안, 걱정, 질투, 원망, 복수, 집착 등등이 줄지어 나왔다. 그리고 항아리에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희망만이 남았다. 그날 이후 인간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노동하는 삶,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일의 탄생이다.
그 과정에서 그 옛날의 행복한 기억마저 잊히지 시작했다. 이전까지 인간 종족은 '지상에서 재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힘겨운 노고도 없이, 인간들에게 죽음의 운명을 가져다주는 병(病)도 모르고 살았던 것'. '희망'에 대한 해석도 분분한데, 희망만이 항아리에 남았다는 것은, 희망이 우리한테서 멀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며 고통을 완화해주는 진정제 노릇을 한다는 것, 옮긴이(천병희)의 주석이다.
없다면? 늘 우리 곁에서 고통을 완화해주는 진정제, 희망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 주인공들은 저마다 어떤 실수를 했을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해, 그가 아끼는(챙기는) 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 앞에서 늘 약자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가장 아픈 곳을 저격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전에 당부하였으나, (그런 줄 아는) 동생을 끝까지 챙기지 못하였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처럼 슬기롭지는 않으나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라(굳이 해당 편을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고), 아이언맨은 프로메테우스 스타일의 전형이다. 동맹에 참여하여 거대악을 물리치는 부류 중에는 일단 공격하고 보는 에피메테우스 스타일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은 상보(상호보완) 관계다. '사전에 생각하는' 스타일이 가진 신중함은 실수를 줄인다. 그러나 실행하기 전에 너무 고민하다가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을 놓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것도 그렇다. 보수가 ‘신중’하게 기존 흐름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기획한다면, 진보는 개혁이라는 목표를 위해 먼저 ‘저지르는’ 측면이 있다. 두 형제의 이름에 담긴 의미다. 곧 협동(協同)하며 살라. 그렇다면 판도라는? 판도라는 왜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을까? 'WHY?'에 알맞은 대답이 <일과 날>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황상 '호기심(好奇心)' 때문이다.
'사전에 생각하는' 보수, 실행을 앞세우는 진보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00년경에 활동했다.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아테나이 출신 대학자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천병희,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라는 단 한 번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데우칼리온이란 아들이 있다. 데우칼리온은 판도라가 에피메테우스에게 낳아준 딸 퓌르라와 결혼한다. 제우스가 대홍수를 일으켜 청동 종족을 멸하고자 할 때, 이들 부부는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는다.(『그리스 신화』 1.7.2.) 헤시오도스보다 900년쯤 후에 집필된 아폴로도로스의 저작에서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 퓌르라의 어머니 정도로 '1)신들이 만든 2)최초의 여인'이지만 문득 등장할 뿐 「일과 날」에서와 같은 디테일은 없다. 제우스가 일으킨 대홍수는 인류에게 재난이다. 그런데, 이 재난을 예측하고 대비하기란 쉽지 않다. 두 형제의 아들과 딸답게 아버지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중함’과 ‘실행력’ 덕분에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 인류의 기원이 된 것은 아닐까.
대홍수 생존자, 데우칼리온과 퓌르라는 부부 이전에 사촌간
한편 소개하였듯 제우스의 지시에 따라 헤르메스는 판도라의 가슴속에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과 교활한 기질'을 심는다. 그녀가 항아리를 연 것은 세 가지 기질 가운데 어느 것 때문일까? 그 마음을 '호기심'이라고 해석하는데, 굳이 하나를 선택하면 '교활한 기질'이지 싶다. 그런데, 「일과 날」에서 제우스가 헤르메스에게 명령하여, "그녀 안에 개의 마음과 교활한 기질을 넣게 하셨소."(68행)와 같은 언급이 있다. 개의 마음과 호기심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서 사는지, 하루 두세 끼니 식당에 앉아 메뉴를 고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먹고살려고'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이다.
호기심 ‘ 때문에’ 호기심 ‘덕분에’, 날마다 노동하는 인간
판도라의 항아리(인간의 것으로)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희망'은 인간이 오늘날' 날마다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자, 노동의 신성함이 「일과 날」의 주제라서 더욱 그렇다. 비록 필멸의 인간이지만 "신들과 한곳에서 태어나" 신적인 혜택을 누리던 인간들이 '추락하여' 오늘날까지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으로 살게 된 것은 판도라의 '호기심'에서 ‘때문’이고, 노동의 신성함을 고려하면 그 호기심 ‘덕분’이다. 제우스의 기획으로 판도라의 마음에 심어진 것인지, 그와 별도로 인간 본성 중 하나가 발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판도라의 '호기심'은 희망을 발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희망이 때로는 ‘희망 고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우리는 오늘도 일을 하고 있고, 일을 해야 한다.
맺으며, 관련하여, 『이솝 우화』 123/358 에피소드. <123. 제우스와 좋은 것들이 든 항아리>
”제우스는 좋은 것들을 모두 항아리에 담은 뒤 어떤 사람에게 간수하라고 맡겼다.
호기심 많은 그 사람은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모두 신들에게로 날아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