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마이페이퍼의 뒷정리를 하는데(이미지들이 다운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리중'이라고 해놓고 방치해놓은 페이퍼들이 눈에 띄곤 한다. 널려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은 숫자도 아니다. 그 중에서 작년 12월말에 진행하다가 만 '토성의 영향 아래(3)'을 마저 끝내기로 한다. 12월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러다간 1년을 다 채우겠다 싶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했는데 반납기한도 있으므로 '쇠뿔도 단 김에' 빼야겠다. 처음 두 문단이 작년에 적은 것인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보태 쓰겠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한다. 힘 닿는 한에서.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시울, 2005) 중 표제가 된 벤야민 장에 관한 세번 째 정리이다. 67쪽, 아니 68쪽부터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두 권의 짧은 책, 1930년대에 씌어져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은 이 책에는 벤야민의 자화상이 가장 뚜렷하게 담겨 있다."(국역본은 '이 책'이라고 단수로 돼 있다.)  그 두 권의 책이란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과 <베를린 연대기>를 말한다. 참고로, 네권짜리 영역본 선집과는 별도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하버드대학출판부, 2006)은 단행본으로도 새로 출간됐다.

초기 우울증 질환자였던 벤야민은 "고독이 인간의 유일한 적합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때의 고독은 방안에서만의 고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거대 도시 내에서의 고독,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68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이다.

그러한 벤야민의 모델은 보들레르의 산책자(flaneur)였으며,  그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는 걸 좋아했다. "<베를린 연대기>의 다른 부분에서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삶을 지도로 그린다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도시의 미로는 그에게서 삶의 은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는 지도와 도식, 기억과 꿈, 미로와 아케이드, 원경과 전경 등의 은유을 이용해 "방향찾기의 일반적인 문제를 말하며 어려움과 복잡성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벤야민이 참조한 것은 브르통의 <나자>나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같은 초현실주의 소설들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벤야민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주의'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은 우울질의 사람들은 또한 '둔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는 것도 특징이다. 어머니와의 산책에서의 그의 이러한 고집불통의 구제불능성은 강화되는데(그는 커피 한 잔 끓일 줄 모른다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보다 더 느리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버릇은 이때의 산책에 그 근원이 있다. 이 버릇에는 또 내가 나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빠르고, 더 능수능란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위험이 있다."(71쪽) 그리고 이러한 '완고함(stubbornness)'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의 1/3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이 나온다. 나는 '완고함'에 '구제불능'이란 뜻을 포개서 읽고 싶다. 문맥상 이 산책에서 문제된 것은 항상 그가 엄마보다 뒤쳐져서 따라가곤 했다는 것. "얘, 발터야,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를 헌정하기도 한 아샤 라시스 얘기가 나오는데('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페이퍼를 참조) '아샤 라키스'라고 잘못 표기돼 있다. 그리고 음미해볼 만한 기술. "벤야민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했을 때, 즉 어린아이일 때에 대해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쓸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린시절을 보았을 때 벤야민은 자기 삶을 지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에 드러난 솔직함과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은 벤야민이 과거를 완전히 소화하여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친구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안에 괴물이 떠돌아다닌다는 환상에 빠진 이야기는 벤야민이 후에 자기 학급을 증오한 일을 예시(豫示)한다."(72쪽)는 문장에서 '자기 학급(his class)'은 아무래도 '자기 계급'의 오역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이어서 학교가기 싫어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라고 내가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실컷 자도록 내버려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의 교수자격취득청구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이 통과되지 않게 되자 "어떤 지위와 안정된 직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헛된 것임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충족될 것이었다("벤야민은 과거에서 떠올린 것 전부를 미래에 대한 전조로 간주한다.").

해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방식, '학자티를 내며' 언제나 어머니보다 한발 뒤에서 걷는 모습은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를 예시하는 것이다."라는 게 손택의 통찰력 있는 예리한 지적이다.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 of real social existence)'는 '실제적인 사회적 존재에 대한 거부' 정도의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는 제몫의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절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암묵적인 소망이 성취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열정.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 시간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은 시간, 순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구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공간, 순간,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던 벤야민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라고 불려도 좋을 파편적인 작품을 썼다... 벤야민은 과거를 되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과거를 공간적 형태로, 예언적 구조로 압축한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세상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73쪽)

공간에 대한 이러한 선호를 손택은 토성적 기질과 연관시킨다.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거리의)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로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쪽)

그렇다면 토성적 기질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토성적 기질의 특징은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가차없는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건'이 뜻하는 건 자아(self)이다. 곧 자기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토성적 기질이다. "따라서 이 기질은 지성인에게 적합한 기질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를 빌자면 "나는 내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것이 토성적 기질이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아는 어떤 과제이며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따라서, 이 기질은 예술가나 순교자에게 적합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말하듯,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의 기질이다)." 그리고 자아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늘 너무나 느리다. 이들은 항상 스로에 대해 뒤쳐져 있다(And the process of building a self and its works is always too slow. One is always in arrears to oneself)."  김현승의 시구를 비틀자면, "나는 내게 느리다"가 토성적 기질이다. 그들은 K처럼 마을에는 도착하지만 끝내 성(자아라는 성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페이퍼 또한 아직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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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이따가 집에서 퍼갈랍니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으니..안된다고 하면 안가지고 가고. 흠흠.

로쟈 2006-11-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될 리가 있나요? 기술적인 거라면 몰라도...

수유 2006-11-1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주 수월하게 옮겼네요..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나저나 서재는 리플을 달기위해 꼭 로긴해야 한다는게 넘 불편하군요.. 일부러 서재까지 만들어야 하고..

로쟈 2006-11-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덕분에 '악플'로부터 좀 자유로운 장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