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촌평과 험담을 자주 늘어놓다가 급기야는 박인환에 대한 책들까지도 ‘업데이트‘ 명목으로 몇권 주문했다. 오래 전에 시집부터 평전까지 뗀 시인인지라 ‘재방문‘이 된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 등이 대표작인데 그의 전집을 읽더라도 대표시의 목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명동 백작‘으로도 불렸던 박인환은 시가 아니라 포즈로써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가을 분위기에 맞기도 해서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인터넷에 찾았다(찾은 건 어젯밤이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의 가사가 원시와 약간 달라서 혼동되는 면도 있는데 일단 이런 시다(최종판은 시집에서 확인해봐야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시를 읽으면 노래가 자동으로 귓전에 흘러드는 시다. 감상적인 시의 표본이라도 해도 과장이 아니다. 노래 가사와 원시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란 시구다. 노래에서는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개사되었다. 이 개사는 누구의 작품인지 문득 궁금한데 더불어 이유도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적인 추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발성상의 문제. ‘과거는 남는 것‘은 순수하게 음성학적 차원에서 조금 불편하다. 특히 ‘거‘와 ‘남‘이 음성모음과 양성모음의 조합이어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는다. ‘옛날은 남는 것‘에서 ‘날‘과 ‘남‘이 호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의미론의 문제인데, 한국어에서 ‘과거‘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인다. ‘과거가 있는 사람‘ 같은 표현을 보라. ‘과거는 묻지 마세요‘ 같은 호소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옛날‘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다 쓰일 수 있지만 ‘사적인‘이라거나 ‘비밀스러운‘이라는 뉘앙스는 갖지 않는다. 과거는 숨겨져 있고 옛날은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 유명한 시에서조차 ‘과거‘는 숨겨지고 ‘옛날‘에 의해 대체된다. 문득 그런 조처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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