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도 일을 한 셈이니 여느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고 침대에 누워서도(사실은 업드려서도) 아직은 말똥말똥한 상태라 책을 뒤적인다. 내주 강의와 관련된 책도 있고 무관한 책도 있다. 장석주의 <은유의 힘>(다산책방)은 무관한 책인데 손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펼쳤다. ‘시에 관한 책‘도 시집처럼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다가 덮으면 되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펼친 곳에 전문 인용된 시가 류경무의 ‘팬지‘다.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이 시가 <은유의 힘>에서 인용된 것은 ‘팬지‘가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대신하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적 화자의 연인이었겠다. 다시 보면 시에서 팬지는 팬지로서도 등장하고 은유로서도 나온다. 대략 앞의 두 연과 뒤의 세 연의 팬지는 팬지꽃이고 그 사이 세 연의 팬지는 옛날 연인의 은유로서의 팬지다.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3연)란 고백을 매개로 두 팬지는 연결된다.

장석주 시인의 해설. ˝몸뚱이, 쓰다듬다, 붙어살다, 벌리다 같은 어휘들은 팬지가 성애적 경험의 대상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풍긴다. 한 대상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을 진술하는 이 시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낭만적 사랑‘이라고 특정할 필요와 근거는 모르겠지만 동의할 수 있는 해석이다. 팬지를 심으며 시적 화자가 떠올린 팬지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4-5연이 그 사랑에 대한 진술인데, 좀 특이하게 묘사된다.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시제상으론 옛날이고, 구문상으로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빛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줄거리다. 그런데 기억의 주체는 왜 ‘우리‘일까? 이어서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궁금해 하는 걸 보면 ‘우리‘에는 팬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해야 의미상 자연스럽다. ‘우리‘라고 한 건 미스터리(복잡하게 읽으면 팬지는 ‘우리‘의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다).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도 팬지의 생활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시에서 팬지는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다는 진술에 따르자면 바로 ‘내‘가 팬지였다! 그렇다면 사랑의 주체와 대상, 나와 당신이 모두 팬지라는 것인가? 팬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상을 이끌어내는 시이지만 논리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양한 색감이 팬지의 특징이자 매력일 텐데,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라는 시구는 그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분석적으로 읽으면 처음에 주목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주목하게 된다(그렇지만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처음 세 연이다). 찾아보니 팬지의 꽃말은 ‘사색‘(나를 생각해주세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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