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씨구나 싶은 날에 외출했다 돌아오니 아랫목을 찾는 기분으로 침대로 직행하게 된다. 읽을 책 몇권을 침대맡에 두고 펼쳐보는데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도 그중 하나다. 올봄에 나온 시집이지만 나는 뒤늦게 어제서야 주문하고 받았다.

이 시인의 시를 읽은 게 대체 언젯적인가 생각해보는데 20년은 훌쩍 넘기지 않을까 싶다. 42년생이니 시인의 나이도 70대 중반이다(그보다 고령인 현역 여성시인이 또 있는지?). 아하, ‘일흔 살의 인터뷰‘라는 시도 있다!

몇편의 시를 앞뒤로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와 만났다. ‘구별되지 않는 일들‘이 제목인데, 검색해보니 발표시에는 ‘쓴맛‘이란 제목이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을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따로 해독이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시다. 잘 구별되지 않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시는 명징하고 빗방울 하나처럼 분명하다. 더불어 그 빗방울은 독자의 이마에도 떨어진다. 나이에서 오는 지혜이지만 또 이런 시들을 쓸 때 시인의 나이는 흔히 하는 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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