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간간이 하고는 했지만 하한선은 기형도였다. 기형도 이후, 혹은 2000년대 이후 시인들에 대해서는 그 전 세대 시인들만큼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래서 덜 읽었다. 어느샌가 생소한 시인들이 늘었고 읽지 않은 시집도 차츰 쌓였는데, 어쩌다 넘겨본 시집들에 동의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시를 발견하는 일도 드물어서 나로선 더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 강의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면서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다시 기획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년에는 일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정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에 나온 시집들도 챙겨보고 있다. 이번주에 훑어본 건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와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이다.

여유가 있다면 두 시집에 대해서 내가 지지하는것과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볼 테지만, 그건 나중의 일로 미루고 요지만을 적는다. 내가 지지하고 공감하는 시를 더 자주 만나기 위한 계산속으로.

내가 지지하지 않는 건 안이한 포즈의 시, 근거없이 난해한 시, 가짜 감정으로 허세 부리는 시들이다. 그렇게만 적으니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느냐 하겠다. 부분만 떼어서 읽는 게 허용된다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서 집히는 대로 적는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사람의 재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청춘의 기습‘)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호수‘)

등등. 내게는 심오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구절들이다. 그와 비교한다면 내가 보기에 시집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는 ‘내가 쓴 것‘ 같은 시다.

눈을 뜨고 잠을 잘 수는 없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나무 이파리 한 장이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잔다

그날 아침
카페에 앉아 내가 쓴 시들을 펴놓고 보다가
잠시 밖엘 나갔다 왔는데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바람이 몹시 들이쳤나 보다

들어와서 내가 본 풍경은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에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내 테이블 위에다 한 장 두 장 올려다 놓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니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내가 쓴 것‘)

전문을 다 옮긴 건 완벽해서다. 다른 게 찬란한 게 아니라 이런 시들이 찬란하다. 한데 역설적인 건, 이 시가 묘사하는 풍경이다. 시인의 시보다 더 시답고 찬란한 건 시를 둘러싼 풍경, 구체적으론 바람에 날린 종이들을 카페 사람들이 주워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장면이다. 그걸 보고서 눈시울이 붉어진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내가 쓴 것‘에서 힌트를 얻자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는 ˝쓰려고 쓰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이 섞여 있다. 이병률은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아니라 시를 쓸 수 없을 때 시인이 된다. 시인으로 포즈를 잡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벌레 같다고 느낄 때 시인이 된다(‘비를 피하려고‘). 곧 시의 포즈를 취할 때 그의 시는 시답잖고 시의 바깥에 있을 때 그의 시는 오히려 빛난다.

독자로서 나의 계산속은 ‘내가 쓴 것‘ 같은 시를 더 읽고 싶다는 것. 그런데 그건 시인에게만 부탁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잎의 이파리부터 생각 없는 바람과 카페에 모인 사람들까지 다 동원되어야 하겠기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시를 ‘마음속 혼잣말‘에 비유했는데 영문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그 혼자만 쓴 게 아니어서 비로소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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