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길게 써보려 했지만 시간도 기력도 모두 부족하기에 짧게 적는다. 푸슈킨의 딸 얘기다. 풀네임을 적자면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1799-1837). 이번주에는 그의 <대위의 딸> 강의가 있어서 오랜만에 번역본들을 한데 모았다. 검토해보려는 생각은 있지만 뜻대로 될지는 아직 미지수. 다만 각 번역본에 실린 작가 연보를 보다가 교정사항이 있어서 적는 페이퍼다.
현재 주요 번역본은 네 종인데 알라딘의 판매량을 보니, 펭귄클래식판, 새움판, 열린책들판, 창비판 순이다. 저자명은 푸시킨, 뿌쉬낀, 뿌시낀이 혼용되고 있는데 나는 쓰던 대로 ‘푸슈킨‘이라고 적겠다. 푸슈킨은 1831년 나탈리야 곤차로바(1812-63)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둔다. 순서대로 하면 마리야(1832년생, 장녀), 알렉산드르(1833년생, 장남), 그리고리(1835년생, 차남), 그리고 나탈리야(1836년생, 차녀), 그렇게 2남2녀다. 애칭으로는 마샤, 사샤, 그리샤, 나타샤라고 부른다.
펭귄클래식판의 간략 연보에는 자녀들 얘기가 빠져 있으므로 넘어가면, 나머지 판본 가운데 새움판만 자녀의 성별을 정확히 기재하고 있고 열린책들판과 창비판은 장남 알렉산드르를 차녀로 오기하고 있다. 둘다 ‘딸 사샤 출생‘으로 적음으로써 2남2녀를 1남3녀로 바꿔놓고 있다.
착오가 빚어진 이유는 아마도 ‘사샤‘를 여자이름 ‘알렉산드라‘의 애칭으로 읽었기 때문. 보통 러시아어 이름은 애칭으로도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데 예외적으로 ‘사샤‘는 남자이름 알렉산드르, 여자이름 알렉산드라, 모두의 애칭으로 쓰인다. 따라서 연보의 내용은 ‘아들 사샤 출생‘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아들이고 딸이고가 중요하지 않다면 그냥 빼면 되는 일이고.
가장 최근의 번역본으로 나온 새움판은 비교적 상세한 연보를 싣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연보에 없는 오류도 포함하고 있다. 푸슈킨의 결투와 관련된 대목이다. 아내 나탈리야와 염문이 떠돌던 프랑스군 장교 출신의 단테스(불어로는 ‘당테스‘)에게 1836년 가을 푸슈킨이 첫 결투 신청을 했다가 주변의 중재로 무마된 일이 있다. ˝단테스와 나탈리야의 여동생 예카테리나와 약혼이 발표되어 결투 신청을 보류˝라고 연보에 적혀 있는데 예카테리나는 나탈리야의 여동생이 아니라 언니다.
나탈리야는 곤차로프 가의 막내딸이었고 위로 두 언니가 있었다. 큰언니 예카테리나는 세 살 위였으니(둘째 언니 알렉산드라가 한 살 위였다) 나탈리야와 동갑이었던 단테스에게는 연상녀였다. 두 사람은 1837년 1월 10일에 결혼한다. 고로 곤차로프 가의 자매와 결혼한 푸슈킨과 단테스는 동서지간이다.
하지만 푸슈킨으로서는 처형과의 결혼도 궁극적인 해결이 아니었다. 1월 하순에 단테스에게 재차 결투를 신청하며 이번에는 성사된다. 정확하게는 단테스의 양아버지였던 헤케른에게 비난의 편지를 보내며 단테스가 이에 결투신청을 하고 푸슈킨이 받아들인다. 연보에는 ˝26일 푸시킨은 결투로 복부 총상을 입고˝라고 되어 있는데 결투일은 26일이 아니라 27일이다. 푸슈킨은 29일에 사망한다. 구력에 따른 날짜가 그렇고 지금 쓰는 신력으로는 2월 10일이 푸슈킨의 기일이다.
간단히 적는다는 게 길어졌는데 푸슈킨의 두 딸 가운데 문학사에 다시 이름이 등장하는 이는 맏딸 마리야 푸슈키나(1832-1919)다. 1860년 결혼후 풀네임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가르퉁. 마리야가 문학사에 나오는 건 톨스토이(1828-1910)의 <안나 카레니나>(1877)의 모델이라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868년에 한 장군댁에서 서로 알게 되는데 톨스토이가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래가 1860년에 그려진 마리야의 초상화다. 이런 모습의 여성에게서(게다가 푸슈킨의 딸이라는 후광!) 톨스토이가 안나의 외모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니 <안나 카레니나>의 독자들은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