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벼랑끝 인문학'에 대한 기사들을 모아두었는데, 사실 내가 더 공감하는 것은, 그리고 보다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위기'이다. 소득 양극화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 멕시코와 함께 가장 심각한 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어제 보도로는 자살율도 2년 연속 세계 1위라고 한다. 각종 통계수치에 대한 신뢰도를 조금 낮추더라도 '살맛나는 사회'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정치권 안팎으로 갈수록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골은 깊어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게 '길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 지난주 경향신문의 창간 60주년 특집기사를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쪽에 모셔두고 있는 이유이다(지금 보니까 가방에 있다). 기사는 주로 '진보개혁의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 중에서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 아니 보다 실감나게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장'의 비판은 여러 모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사실 '아파트값 안정'과 '사교육비 경감', 이 두 가지가 대내적으론 가장 핵심적인 국정과제 아닌가? 정부나 정치권에도 난다긴다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왜 해결이 안되는 것일까? 거꾸로 사정은 왜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일까?). 진단에 걸맞는 해법이 현실화될 수 있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의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읽어보고자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경향신문(06. 09. 14) “현실 모르는 ‘반쪽 진보’ 권력 맛본뒤 퇴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사람들 정치는 잘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냐 반독재냐, 직선제냐 간선제냐 같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정치 문제에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독재자를 타도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바보’다. ‘실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처럼 이분법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다. 또 정치 문제와 달리 바로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야 느낀다.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관료다.

나는 그걸 DJ 때부터 봐 왔다. DJ는, 태생적으로 DJP연합이다.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를 택했다. DJ때 경제 정책은 모두 개발 관료에 의존해 나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 건설 경기 부양, 신용카드, 외자 유치 등이다. 그러다 말미에 아들과 측근이 개발 세력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YS, DJ보다 나은 진보 정부라 여겼기에 서민·중산층을 위한 진보적 경제 정책을 내놓을 줄 알았다. 또 재벌·기업의 특혜를 파헤치는 경제 과거사의 진상 규명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룰 줄 알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만 유능, 경제는 바보
참여정부는 집권 1년간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이 적다고 변명했다. 2004년 4월 ‘탄핵풍’으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대거 입성했다. 민노당도 거저 들어갔다. 여대야소 정국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총선 승리로 진보개혁 세력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의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였다. 의미있는 입법 하나 못했다.

경제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아파트 선분양은 그것 자체가 특혜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아파트는 분양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돈주고 사는데 ‘구입’이고 ‘매입’이지, 왜 분양이냐. 분양이라는 말에 나눠 준다는 뜻이 있다. 강아지 분양하듯 이해하는데, 누가 주체인지 잊고 산다. 신도시 개발 방식도 들여다보자. 정부가 농민들의 농지, 임야를 30년간 헐값으로 뺏어서 건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택지 조성도 하기 전에 말이다. 농민은 도시민에게 당연히 빼앗겨야 하고, 국가는 농민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인식이었다. 빼앗은 농지를 건설업자에게 30년간 판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그리고 소비자는 분양받는다. 분양이란 말이 ‘값싸게’를 뜻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시세보다도 높다. 그 자초지종을 알아야 한다.

◇기득권층 얘기만 들어
청와대에 들어간 진보개혁 세력 이야기도 해보자. 학자 출신이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도 현장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이 통계와 자료를 관료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청와대 들어가서 외국에서 배운 이론만 접속시키려다가 항상 관료와 재벌 민간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역이용’ 당한다.

집권 이후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내 진보개혁 세력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관료, 재벌, 재벌 이익단체, 재벌 민간연구소 연구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이다. 시민단체 사람도 만나지만 열에 한두번 정도일 뿐이다. 경제부문의 무능함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료, 이익단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진보’가 어느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보수’가 된다. 권력의 맛도 느낀다. 그런데 정치권내 진보개혁 세력들은 어떻게 접대와 로비를 피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들? 경제 관료나 재벌에게 팽팽당한다. 재벌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 예전에 경제 공부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스터디하나. 관료나 재벌, 이익집단의 연구소 연구원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자료에 데이터에 논리까지 만들어주니까 편하다. 가만 있어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또 그런 세상이니까.

각종 국가정책 용역 생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관료를 통해 나오면 관료를 위한 용역 보고서만 생산된다. 국회나 정당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책 연구소도 100%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미국처럼 관료나 행정부는 법안을 발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관료는 국민을 위한 머슴이다. 머슴한테 의존하는 법안은 안된다. 대의 기구인 국회의원과 정당이 정책·제도를 파고들고 연구해 내놓아야 한다.

보수적 관료들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지시받는다고 갑자기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 바뀌는 데 무엇을 바꾸겠는가. 미국의 연방 공무원은 정권이 교체되면 고위 공무원 절반이 바뀐다. 우리도 헌법이나 공무원법을 싹 바꿔야 한다. 한국처럼 ‘고시’로 평생을 보장받는 나라는 없다.

개발독재 때도 대다수 국민은 희망과 꿈을 가졌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현재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자신감과 희망 있었다. 지금은 우선 열심히 일할 곳조차 없다. 일해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래가 안 보인다. 항상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다. 결국 부동산 문제다. 개인 자산의 80%가 부동산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고민 80%가 부동산이라고 보면된다. 집값 폭등하니까, 5년 10년 일하면 집 사고, 평수 늘리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투기 잘 하는 사람이 선망받는 시대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기를 죽여놓는다.

서민, 중산층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선진국 돼간다지만 재벌만 선진국이고 ‘그들만의 천국’이다. 집권 세력이 95%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5%의 기득권 세력에게 점점 살기 좋은 환경,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다. 95%는 박탈감에 점점 힘들어지는데 5%는 불로소득으로 자산 늘리면서 잘 산다. 이런 게 위기의 본질이다.

대통령, 정부, 여당은 ‘성장률’에 집착한다.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잘 받으려면,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거품을 조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기 주머니, 집 마련, 저축, 일자리 이런 것 고민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은 ‘자기만의 성장률, 성적표’에 집착하고 결국 거품 유혹에 빠지게 된다. 거품 조장하면 결국 투기라는 병이 생긴다.

참여정부가 재벌에게 특혜를 늘려줬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기업도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각종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거품 조장을 해왔다. 주택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백만~2백50만명이다. 그중 15% 정도만 정규직이고 지식 노동자다. 나머지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다. 참여정부 들어 50만~1백만명 고용이 창출됐다. 그중 30%는 외국인 노동자다.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란 게 우리 지식을 배운 청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계 투기 자본이 ‘부동산 투기장’에 투입됐고, 지금도 투입되고 있다. 자꾸 돈이 모이니까 개발과 부동산에 집중되고, 지식 산업과 거리가 멀어지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고 병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못한다. 주택값은 폭등한다. 미래에 대한 위기, 불안 때문에 결혼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빈부격차 심화,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킨 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하니까, ‘미친 놈’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만 말고 대안 내놔야
진보는 그게 지식이든, 돈이든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보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천5백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 기업, 보수 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천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천만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진보인가. 반독재하고 길거리 행동했다고 진보인가. 지금 진보개혁세력은 ‘머리만 진보’거나 ‘행동만 진보’가 많다. 머리와 행동이 다 진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진보’가 없다. 이것이 또 위기의 요인이기도 하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정치, 관료 사회 진입하기 위한 시민단체인가 싶을 정도다. 진보는 인재양성소가 없다. 그래서 인재도 탄생하기 힘들다. 학생운동하다 노동계로 가고, 정보도 자료도 차단된 상황에서 행동하고 일했다고 해서 본인이 인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경실련도 마찬가지다. 무슨 정부나 지자체 위원회에 왜 그리들 많이 가는지, 시민단체가 무슨 이력 관리하는 곳인가.

우리 사회가 왜 위기가 왔고, 중병이 걸렸느냐. 황우석 거품, 부동산 거품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서 선진국 진입단계에 왜 발생했나? 브로커 천국이 된 근본 원인은 뭔가. 엉터리 진단에 엉터리 처방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예견해야 하는데 중병이 들어야 치료법을 생각한다. 그나마 병치료 늦어지고 치료하다 마는 게 반복된다. 어쩌다 먼저 떠들면 미친놈 되기 일쑤다. 지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데 견제하고 감시하고 대안을 내놓는 자들이 없다. 그것이 위기의 실체다.(정리 김종목·사진 권호욱기자)


-김헌동 단장은?-

경실련 김헌동 국책사업감시단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1년부터 19년 동안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97년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사표를 내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2월 경실련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아 분양원가 공개운동을 벌여왔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씨가 친형이다.(*다른 건 몰라도 '아파트값 거품빼기' 같은 게 한국사회의 진보이다. 어려운 이슈들을 제기할 것도 없다. 이게 정치적 진보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보다는 좀 복잡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일까? 김헌동 본부장은 아파트 반값 공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시민단체쪽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정주영의 대선공약이 아파트 반값 공급이었다. 문제는 혹 '의지'가 아닐까?)

06. 09.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