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한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을 어제 받았다. 이달말쯤 배달되는 걸로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배송되었다. 덕분에 나의 '가을'이 좀 일찍 시작되었다. 하긴 내일모레면 이미 '새학기'가 아닌가? 문학과 여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을 맡은지라 지젝의 몇몇 책들을 재독하며 정리해둘 필요성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느낌만으로 뭐가 될 리는 만무하고 책을 손에 잡을 여가를 그간에 갖지 못했다.

다급한 처지에 '요약정리'라도 미리 읽어두기 위해 펼쳐든 것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책의 4장이 '성차이의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한데, 조금 읽다가 곧 주마간산으로 뒤적거리게 됐다. 어제 서문을 읽으면서 번역본이 별로 미덥잖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원서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볼 만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이다. 그런 걸 몇 가지 지적하기 전에 먼저 번역본이 다소 무성의하다는 걸 꼬집고 싶다. 혹은 교만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게 아니라 그간에 출간된 지젝 번역서들의 제목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무성의/교만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역자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삐딱하게 보기>, <향락의 전이>, <까다로운 주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서명을 갖다 쓰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너의 증상을 즐겨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물어보지 못한>으로, <진짜 눈물의 공포>는 <진정한 눈물의 공포>로, <환상의 돌림병>은 <환상의 역병> 등으로 다르게 옮겼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대신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옮기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나는 두번 읽어봤지만 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역으로 범벅돼 있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도 제목이 참조된 걸로 보아 여기에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임의적인 것이다. 역자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도 국역본 제목인 <앙띠 오이디푸스>를 취하고, 버틀러의 책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도 제목을 그대로 갖고 오는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랜덤'이다.

그리고 인명 표기의 경우 'Lacan'은 가끔씩 '라캉'이란 표기도 나오지만 대부분 '라깡'으로 통일시키고 있는데, 그게 '원칙'이라면 'Foucault'는 왜 '푸꼬'가 아니라 '푸코'이고, 'Guattari'는 왜 '가따리'가 아니라 '가타리'이며, 'Althusser'는 '알뛰세'가 아니라 '알튀세'일까?(그런 한편으로 '쥬디스 버틀러'는 '쥬디쓰 버틀러'로 표기됐다.) 또 지젝의 동료이자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주요 멤버인 'Mladen Dolar'는 어떤 표기 규칙에 의해 '믈라덴 돌라르'가 아닌 '밀러던 돌러'로 표기되는 것일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냥 임의적이란 것. "모두가 번역자 맘이다!"

그러니 나의 참견은 좀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자의 맘 혹은 구매자의 맘이란 것도 함부로 무시할 건 아니라는 뜻에서 몇 마디 참견을 보탠다. 내가 잠시 들여다본 페이지들에 국한하자면, 먼저 133쪽에서 "그러나 그는 페니스(penis)와 남근(phallus)의 차이점에 대해 개의치 않기 때문에 종종 둘을 혼돈한다"라고 옮겼는데, 페니스/남근의 이분법을 택한 것은 역자의 권리이지만, '혼동한다'를 '혼돈한다'로 적은 것은 오류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역자 자신의 것이기도 해서, 분명 역자후기에서는 'enjoyment'를 '향락'으로 'pleasure'를 '쾌락'으로 번역했다고 설명해놓고 있지만 상당수의 'enjoyment'는 그냥 '쾌락'으로 옮겨졌다(가령 <까다로운 주체>의 부제인 '정치적인 요소로서의 쾌락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그런 차이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인가? 

"사실 지젝은 성 인식이라는 사회적 내용에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에서도 '성 인식'은 (좀 놀랍게도) 'gender identity'의 번역이다. '성 인식'과 '성 정체성' 사이엔 그래도 개념상 얼마간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는데, 역자는 그런 데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란 문장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한다는 표현은 "challenging the universal as non all"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non all'(흔히는 'not all'로 영역되는데)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옮긴 건 역자의 부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게 '무지'가 아니라 '부주의'인 것은 몇 페이지 뒤인 138쪽에서 "그러므로 이것은 여성적인 전부가 아닌 것(non-all)을 나타낸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면 '무성의하거나 부주의하거나'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논증불능(undecidability)'(138쪽)인 것일까?('결정불가능성'으로 옮겨져야 한다.) "어떻게 실제로 경험된 보편성이 특수한 현실이 되는가라고 지젝은 묻는다."(133-4쪽)도 역자에게 묻고 싶은 문장인데, 원문은 "How, he asks, is the universal experienced as a lived, particular reality?"이다. "어떻게 보편성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현실로서 경험되는가, 라고 그는 묻는다."란 뜻 아닌가? 여러모로 영문학 전공자의 번역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다(교양과정부 학생들의 번역인가?).

 

 

 

 

사실 서문에서부터 몇 가지 암시/단서는 이미 주어졌었다. 저자 사라 케이가 '지젝 연구'의 창시자로서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에드먼드 라이트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서문은 시작되는데(엘리자베스 라이트의 책들은 언젠가 소개한 바 있다), "<지젝 독본>과 그들이 편집한 지젝에 관한 <문단>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미개척 분야의 서막을 열었다."(7쪽)고 한 대목에서 '문단'은 'Paragraph'란 원어가 병기돼 있지만 잡지명으로서 고유명사이기에 그냥 '패러그래프'지라고 해야 했다.

참고문헌에 나오지만, 라이트 부부는 패러그래프 지 24호(2001)의 슬라보예 지젝 특집호를 같이 편집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젝 독본The Zizek Reader>(Blackwell, 2001)과 함께 '지젝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지젝에 관한 <문단>"이라고 모호하게 옮길 게 아니라 "지젝에 관한 <패러그래프>지의 특집호"라고 옮기는 게 나았다.    

저자 사라 케이는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만 불문학자이자 중세문학 연구자이다: "중세 연구가로서 살아있는 사람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적어도 우리말 독자들에게까지 공유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 "비록 이와 같은 책을 쓴다는 바로 그 행위가 지젝 본인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라는 걱정이 들지만, 라깡은 그의 통찰력을 저지시키고 그로 인해 그를 망쳐놓으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8쪽)

인용문의 원문은 "Lacan resisted all attempts to arrest and therby stultify his insights."이고, '저지시키다'로 옮긴 'arrest'는 문맥상 이런 류의 '입문서'를 쓰고자 하는 시도를 가리킨다. 라캉은 그런 류의 시도들에 저항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라캉은 입문서를 쓰기가 어렵고(폴리티 출판사의 이 시리즈 목록에 '라캉'은 아직 포함돼 있지 않다), 견적도 잘 안 나온다는 얘기겠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 하지만, "그의 통찰들을 엉성하게 포획함으로써 결과적으론 망쳐놓으려는 시도들"이 어찌 저지들만의 것이겠는가.

애초에 폴리티 출판사측으로부터 지젝에 관한 책을 청탁받고 케이 교수는 자신이 저자로서 부적합하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공이 프랑스 중세연구인 나는 그런 일에 결코 알맞은 인물이 아니(었)다.(A French medievalist by profession, I might seem the last person in the world to take it on.)"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Which is precisely why, on reflection, I did so."

역자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고 옮겨놓았는데, 거꾸로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바로 그것이 내가 그 일을 떠맡은 이유이다." 왜? 뒤이어 <삐딱하게 보기>에서의 <리처드 2세> 인용을 저자가 재인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부적합하 듯 보이는 유리한 지점"이 지젝의 작업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를 식별해낼 수 있는 좋은 지점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니, 내가 읽기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는 토로는 저자의 것이 아니라 역자의 것이다. 그걸 독자의 반응으로 옮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가 그 일을 맡았던지." 이 책의 번역 또한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중세 불문학 전공자가 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06. 08. 26.

 

 

 

 

P.S. 덧붙이자면, 사라 케이의 입문서는 토니 마이어스의 책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뽐낸다. 국역본에는 옮겨져 있지 않지만, 원서의 뒷표지에 보면 조운 콥젝과 맬컴 보위 같은 저명한 정신분석/라캉 연구자들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보위는 "이번엔 지젝이 사라 케이에 관한 책을 씀으로써 보답하기를 기대해본다. 케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적었다). 좀더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 거듭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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