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북리뷰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 ''문학집배원'의 인기비결'을 옮겨온다. 문학의 사회적 가치/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지라 제목을 본문의 문구인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로 바꾸었다.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짐작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인간은 대체로 유구하다), 칼럼은 보다 긍정적인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한겨레(06. 07. 14) 평소에 시, 소설, 드라마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거나 일 년에 최소한 몇 편이라도 챙겨 읽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어떤 행동상의 특징을 보이는가? 문학교수들치고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보거나 그 질문에 자진해서 시달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와는 별 관계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정치학을, 혹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행동 특징을 보이는가라는 것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본령의 질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어쩌면 이게 진짜일지 모른다) 그 질문에 그렇다/아니다로 대답할 실증적 증거를 들이댈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거라면 몰라도 문학독자와 비독자 사이의 행동 차이라고?

-그러나 그 질문은 상당히 의미 있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소위 ‘문학 강의’란 걸 하면서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던져보는 일이 없다면 문학 강의가 될까? 학생들에게 시, 소설, 드라마를 읽어라 해놓고 그 읽기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닌지 아무 관심도 없다?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학 강의가 망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질문이 강의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교육 일반이 의도하는 것이지 '문학 강의'만의 특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를 측정하거나 측정의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문학 강의의 본령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면 문학 강의의 교육적 의미는 살아날 길이 없다(*이러한 주장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얼마간 공감하면서도, 이젠 문학교육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해 있구나, 라는 유감). 학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적으로도, 문학을 읽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문학 독서의 중요성을 어디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구 문예진흥원)는 작년부터 ‘문학의 대중적 친숙화’를 위한 사업들을 펼쳐오고 있다. 작년에는 ‘문학회생’이라는 이름으로, 금년에는 ‘문학나눔’이라는 명칭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업들이 그것이다. 회생이건 나눔이건 간에 사업의 목적은 문학의 대중적 향수 기회를 넓히기, 곧 사람들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크게 열고 넓혀보자는 것이다. 창작자들을 위한 생산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향유자를 위한 지원이다. 이 점에서 문학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고 들어가 시민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문학을 나눌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은 독서인구 키우기는 물론이고 시민의 예술참여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다.

-문학의 이런 대중적 친숙화 작업의 하나로 지금 두 달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시인 도종환의 ‘시 배달’이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인터넷으로 배달해주는 것이 그 사업의 골자다. 시인이 손수 고른 시가 플래시 영상카드에 실려 텍스트와 낭송의 형태로 매주 월요일 아침 사람들에게 ‘선물’로 배달된다. 스스로 ‘문학집배원’이 되어 시 배달에 나선 시인은 우리더러 잠깐 삶의 템포를 조절하고 “당신의 한 주일을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바쁜 쳇바퀴에 갇힌 사람들에게 이건 신선한 메시지다. 시인의 이런 노력에 대한 호응이 ‘폭발적’이라는 소식이고 보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알만하다. 대구 지역에서는 교육청이 나서서 대구경북 일원의 중고등학생 2만 여명에게 월요 아침의 시를 받아볼 수 있도록 주선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무엇보다도 시는 내가 나보다 더 큰 어떤 것, 내가 ‘나’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과 연결되게 한다.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라는 소리가 고깝게 들리는 사람에게라면 말을 바꿔도 된다.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 붙여 그 모든 작은 것들의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문학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미국 예술기금위원회(NEH)가 2002년에 연방 통계청을 통해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참여도’ 조사를 보면 그 질문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다른 변수들과는 정말로 무관한 것일까?).

-문학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참여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 외의 예술 형식,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율도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도 그 조사에서 드러난 발견의 하나다(*문학 체험이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거꾸로 미술관/박물관을 방문할 여력이 되고 자선활동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문학도 향유하는 건 아닐까? 이 '인과성'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가?).

 

 

 

 

-우리는 문학의 가치와 효용이 그것의 무효용성에 있다는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 있다(*가장 대표적인 건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유용성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는 김현의 문학론이다). 그 주장의 진리 가치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문학을 읽고 즐기는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가 사회적 삶의 기초라면, 문학 읽기는 사람이 사람으로 자라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그리고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배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의 큰 줄기 하나도 거기 있을 것 같다.

(*)시배달의 사회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와 효용'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사회적 장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과 결부돼 있으며 또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는 문학전공자들의 인성이 (아무래도 문학작품을 덜 읽게 되는) 공학도/공학자들의 인성보다 특별히 우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게임중독자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게임매니아를 자처하는 문학교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해서, 이 칼럼은 아무래도 아침에 배달되는 기분좋은 덕담 정도로 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문학이 사람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 당연하지! 한데, 그 바꿔놓기 능력에 있어서 문학이 돈이나 정념을 따라갈 수 있을까? 뭐라고요, 문학이 돈이나 정념에 들러붙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06.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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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7-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저로선 감수성(sensibility)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언젠가 인(仁)이란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란 취지의 강연을 하는 걸 보았는데, 문학은 그러한 감수성과 직결돼 있는 것이죠.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건 아니고 허접한 문학도 많이 있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