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출판문화(614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로 앤드루 델반코의 <왜 대학에 가는가>(문학동네, 2016)를 읽은 소감을 적었다. 대학 신학기가 시작되는 점을 고려해서다. 책에서도 언급이 되는 작품인데, 컬럼비아대학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허먼 멜빌 연구자이기도 하다(봄학기에 <모비딕>에 대한 강의도 계획하고 있어서 그의 연구서도 지난해에 미리 구입해두었다).   


 

출판문화(17년 2월호) 왜 대학에 가는가


대학진학률이 70퍼센트를 넘어서는 소위 대졸자 주류사회한국에서 왜 대학에 가는가?”란 질문은 몰라서 묻느냐?”란 반문이나 듣게 할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하자. “다들 가니까.” 대학졸업장을 필수요건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묵계 혹은 암묵적 합의가 작동하는 거라고 해도 좋겠다. 대학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진학하는 학교정도로 간주한다면 대학의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이 별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 앤드루 델반코의 <왜 대학에 가는가>(문학동네)에 손이 갔다. 미국 대학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 다룬 책이지만 대학은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다.


똑같이 대학이라고 번역되고 미국에서도 혼용된다고 하지만 미국 대학의 역사에서 칼리지(college)’대학(university)’은 구분된다. 칼리지가 학부 학생들에게 과거의 지식을 전수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면, 유니버시티는 과거의 지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 목표를 둔다. 좀더 간편하게 구분하자면 칼리지는 교육 중심이고 유니버시티는 연구 중심이다. 미국 대학의 출발점은 칼리지였지만 사회적 요구가 달라짐에 따라 점차 유니버시티가 그 중심이 된다(우리의 경우는 칼리지대학’, ‘유니버시티대학교로 불러줌으로써 구분한다).교육에 방점을 두는 입장에서 저자가 대학이란 말로 지칭하는 것은 주로 칼리지이고, 책제목의 대학칼리지를 옮긴 것이다. 바로 그 대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대학은 젊은이들이 청소년기에서 성년기로 이행해가는 중간지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1850년에 쓴 <모비딕>에서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이었다라고 썼을 때 대학이란 말이 뜻한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자아를 발견한 장소란 뜻이다.


모든 질문은 언제나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왜 대학에 가는가란 질문도 마찬가지다. 그 질문에는 대학의 가치와 의미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진짜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성격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물론 과거의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한 저명한 의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의예과 학생과 비의예과 학생의 차이는, 의예과 학생은 목요일 밤부터 술을 마시고 나머지 모든 학생은 매일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초점은 음주에 있지 않다. 잠시 동안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인생의 원대한 목표를 찾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대학 생활의 목적이자 의의였다는 것이다.


대학의 위기는 이러한 목적의 망각에만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대학은 특권적 장소였고 대학 수학기는 특권적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 특권은 상당 기간 동안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다. 이미 19세기 초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을 기초교육은 모두에게 제공되지만 고등교육은 사실상 누구에게도 제공되지 않는나라로 묘사했다. 1960년대까지도 미국의 엘리트 대학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노골적이어서, 가령 컬럼비아대학에서는 경비원이 백인은 학생이든 아니든 교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했지만 흑인 학생은 신분증을 반드시 확인했다. 또 한때 하버드대학은 유대인들이 머리는 좋을지 모르지만 인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입학을 제한했다.


그렇지만 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고 명문대를 포함한 미국 대학의 문턱은 상당히 낮아졌고 고등교육의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제대 군인들을 위한 정책적 배려의 결과였다. 저소득 가정 출신의 학생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되었다. ‘평등한 기회의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는 이러한 고등교육의 민주화에 빚지고 있다. 민주화를 가치의 척도로 놓고 보자면 대학의 역사는 얼추 진보의 서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보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정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말부터 대학에 대한 각 주정부의 지원이 급속하게 줄면서 장학금이 필요한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대학의 문턱은 다시금 높아졌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중산층 부모의 경제적 몰락은 그 여파가 자녀들의 교육에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를 예로 들자면, “연소득 10만 달러 이상 가정의 학생들의 전체 평균 SAT 점수는 5-6만 달러 가정의 학생들에 비해 100점 이상 높다.”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들의 점수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많은 부모는 자녀의 지적 능력을 끌어올릴 수는 없더라도 점수는 끌어올릴 수 있는 여러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학은 부와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개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더 악화시키게 된다. 한 작가의 신랄한 비평대로, 미국의 일류대학은 미국사회의 계층구조가 철옹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선전기관에 지나게 않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면서 대학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가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 1958년 영국의 사회비평가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 사회의 등장>이란 소설에서 처음 쓴 능력주의는 원래 대단히 부정적인 뜻을 가진 말이다. 영의 소설 자체가 모든 것이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극한의 경쟁사회를 묘사한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다. 능력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예기치 않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대립한다. 과거에 출신 학교와 집안 때문에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미국의 상류층은 자신이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 평소에 특권을 맨 앞에 누리던 사람들이 전시에도 마땅히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본 발상 아닌가. 그런데 능력주의는 이러한 책임감을 약화시킨다. 자신의 특권이 능력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때 명문대학이라는 학벌은 능력의 증거다. 오늘의 엘리트들은 입시경쟁을 통해 대학 입학 자격을 얻었기에 자신이 누리는 특혜는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여 사회는 능력 있는 부자와 무능력한 빈자로 양분된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는 이 능력의 차이를 반영하므로 정당화된다. 능력주의 사회가 디스토피아인 이유다.


대학의 핵심 이념 가운데 하나는 남을 돕는 일은 곧 나 자신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현재의 많은 대학들은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베풀며 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지 못함으로써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찾자면, 저자는 민주 시민 양성이라는 대학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캠퍼스 바깥의 시민적 삶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되살아난 것을 긍정적인 징후로 생각한다. 예컨대 이민, 환경, 공중보건, 교육 등을 다루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이민자 가정의 관청 업무 돕기, 환경단체를 위한 리서치 작업,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 가르치기, 노인 돕기 등의 자원봉사 활동을 읽기쓰기 과제와 함께 해낸다.”


이러한 활동이 개인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공익에도 기여한다는 미국 대학의 전통이 잘 구현된 사례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에서는 사익과 공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대학 교육의 핵심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저자의 결론을 그대로 옮긴다. “대학은 젊은이들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동료들과 또 자기 자신과 끝까지 싸우는 곳이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꼭 상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학을 잘 보존하고 지켜내 후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미국 대학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지만 나는 우리에게도 다른 결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생과 대학생 자녀를 부모 모두가 대학의 목적과 이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1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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