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8월 중순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의 일부를 따로 떼서 옮겨놓는다.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글에서 번역에 관한 몇 마디로 어쩌다 들어갔던 대목인데, 중요한 저작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 독서계의 '관행'에 대한 불만을 얼마간 늘어놓고 있다. 그 관행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제목은 '침묵에 대하여'라고 고쳐달도록 한다.

 

 

 

 

낮에 (모스크바의) 인터넷카페에 갔다가 알라딘의 신간서적들을 검색해봤는데, 지젝의 경우 ‘최신간’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의 경우 ‘기이하게도’ 한 건의 리뷰도 붙어 있지 않았다(*적어도 이 글을 쓸 시점에서는 그러했다. 지금도 이 책은 부당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요컨대,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거의 100쪽 분량의 2판 서문까지 쓸 만큼 지젝이 애착을 갖고 있는 책이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지젝은 곧 들뢰즈를 추월할 것이다) ‘지식인’ 혹은 ‘사상가’의 ‘대표작’이 이런 ‘냉대’를 받는다는 건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답지 않은 일이지만, 모두들 갑자기 ‘신중해진’ 것인지?

물론 두뇌를 긴장시키는(‘머리를 아프게 하는’이 아니라) 두툼한 ‘이론서’를 완독하고 뭔가 한 마디(=리뷰) 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하버마스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인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이 번역돼 나왔을 때에도 이와 같은 ‘기이한 무관심’이 조성되었는바, 나는 아직도 그 책에 대한 ‘리뷰’를 보지 못했다. 짐작에, 그런 사정이 지젝의 경우에도 재연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지레짐작일까? 하지만, 내 ‘경험’은 그런 지레짐작의 편을 들도록 부추긴다. 다시 번역돼 나온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에 대해서도 너무나 ‘조용한’ 걸 보면(민음사본이 나왔을 때 얼마나 떠들썩했던가!), 한국의 ‘독서계’(혹은 ‘지식사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카르텔’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침묵의 카르텔…



얼마 전에 한 출판사에서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없는 말 그대로의 아이디어 제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누설’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이 제안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여간에, 제안자는 내가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걸 알고 나의 ‘책읽기’에 ‘유로지비’란 말이 들어간 제목을 붙이는 건 어떨지 구상해본 듯했다. ‘유로지비’란 러시아어는 ‘바보 성자’로 흔히 번역되지만, 일차적으론 ‘광신도’를 뜻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를 일컫는 말이 이 ‘유로지비’인바(그는 리자베타 또한 ‘유로지비’라고 부른다), “이 여자는 유로지비구나!”란 말은 “이 여자는 바보 성자로구나!”라는 긍정적 경탄이 아니라, “이 여자는 광신도로구나!”라는 부정적 인지를 뜻한다. 광신도는, 대체적으로 ‘냉정하다’는 얘기를 듣는(‘쿨하다’로 번역하면 나쁜 뜻이 아니지만) 내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자기-이미지이지만(평소에 나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나는 그걸 성격상의 ‘결함’이라고까지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비위가 강한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혹 유로지비의 인상을 주었다면, 그건 아마도 남들이 적당히 침묵할 때 떠들어댔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조용히’ 떠들어댔음에도!).

무엇에 대해서 떠들어댔는가? 책을 읽고 쓰는 일을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는(물론 그런 일이 아직 밥벌이도 못 된다는 게 유감스럽다) 나의 주된 관심은 좋은 책들을 읽는 것이고 내 생을 바꿔치기할 만한 책들을 쓰는 것이다(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후자는 물론 떠들면서 해야 할 일이 전혀 아니며, 내가 떠드는 건 주로 전자에 대해서이다. 즉, 어떻게 하면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을까? 제대론 된, 제값을 하는 책들을. 나는 그런 책들에 경탄하는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책들, 제대로 안된, 제값을 못하는 책들을 혐오한다. 이건 생태계의 문제이다(가타리가 ‘생태학’을 문제삼는 것과 유사하게). 더불어, 건강의 문제이다(그리고 돈의 문제이다). 불량서적들은 불량식품들만큼이나 유해한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독이다.

물론 적당한 불량식품(가령 불량감자들)을 섭취함으로써 그에 대해 ‘내성’을 키우는 것도 생존의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으리라. 즉 불량서적들도 익숙하게 읽다 보면 또 그런대로 적응이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코흘리개들을 등쳐먹는 값싼 불량식품이나 불량서적들에나 해당한다. 그리고 대개 그런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은 ‘나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자신을 공개/공표하며, 오히려 그런 ‘불량함’으로 식자들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공개돼 있고, 또 그걸 인지한 상태에서 먹거나 읽는 행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나의 관심사도 아니다.

내가 문제삼는 건, 값비싼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인바,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멀쩡하고 고급/고상한 척하지만, 실상은 엉터리 약재와 정교한 무지로 가득 채워진 건강보조식품들이고 ‘고급 교양서’들이다. 즉, 대체로 ‘냉정한’ 나를 분개하도록 만드는 것은 (1)값비싼 것들이면서, (2)그래서, 고상한 체하는 것들이면서, (3)실상은, 부실한 엉터리인 것들이다. 물론 이 세 가지가 모두 결합돼 있는 경우. 그런 경우에 나에겐 ‘저자에의 의지’가 아니라 ‘교정원에의 의지’가 발동한다. 그 ‘교정원에의 의지’란 건, 세상을 좀 바꿔보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아니라(세상이 좀 바뀌는 건 부대효과로서나 기대할 만한 일이다), ‘체하는 것들’의 (문화적) 상징폭력을 못 봐주겠다는 ‘저항에의 의지’이다(왜, 문화적 폭력뿐이겠는가, 경제적 착취이기도 하다! 나처럼 벌이도 변변찮은 사람의 돈을 갈취하는!).

지식인들이 위선적인 거야 그들의 유구한 내력이지만, 적어도 책은 정직해야 한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결을 말하자면, 위선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자리(=포지션)을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책을 쓰거나 옮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식인으로서의 ‘상징적 위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도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 이건 딜레마일까? 이 딜레마를 돌파/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바, 두 가지 방법, 혹은 두 가지 ‘행위’가 있다(지젝의 독자라면, 그에게서 ‘행위’란 말이 얼마나 숭고한 의미를 갖는지 알 것이다).

첫째는, 아무도 모르게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이땐 책이라기보다는 ‘논문’이라고 해야겠다). 혹은 자기가 낸 책은 자진해서 자기가 다 사들이는 것이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않을 책이지만(대학출판부들에서는 이런 책들을 곧잘 낸다), 덕분에 안전하게 저자로서 행세할 수 있다. 이걸 ‘유사-행위’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둘째는, 정말로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 즉 ‘제대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며(이런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흔하지 않다. 진정 고상하고 고귀한 것들은 드문 것인지?), 이것이 진정한 ‘행위’라고 불려질 만한 것이다. 창작행위, 번역행위...

다른 자리에서 나는 번역자들을 ‘성자들’이라고 일컬은바, ‘자학적일’ 만한 사회적 홀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먹을 만한 ‘정신의 양식’을 생산해내는 일이야말로 성자의 일, ‘바보 성자’의 일에 값한다(나는 이 성자들이 합리적인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바보’란 딱지를 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물론 여기서도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성자들과 유사-성자들이 있는바(유사-성자들은 성자들의 이면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유사-성자들을 제거한다면, 성자들도 남아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분별을 게을리하는 것은 “굶주림과 다이어트를 등치시키는 것”만큼이나 외설적이며 무책임한/부도덕한 일이다(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비유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한번은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 개념을 비판하면서이고, 또 한번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교적(秘敎的) 지식’ 개념을 비판하면서이다).

 

 

 

 

지젝의 비유를 계속 쓰자면, 내가 떠들어대는 건 일종의 ‘다이어트 비판’이다. 정신의 ‘부실한 양식’에 대한 이 다이어트주의자들의 변명? “다 당신의 다이어트를 위해서야!”(“아는 게 병이잖아?” “그거 알아봐야 체한다구!”) 하지만, 언제나 굶주려 있는 나의 정신은 ‘다이어트 사절’이며, 정말로 알고 싶다. 우리에겐 정말로 ‘침묵의 카르텔’이 있는 것인가? 거기에서 나만 제외/배제돼 있는 것인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정말로 순진한 ‘바보짓’인가? 유로지비의 짓인가?..

지젝이 지적한바 ‘음모론’은 불쌍한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더불어 그가 지적하는바, 우리주변엔 진짜로 음모들이 있다!..

04. 08. 14./ 06.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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