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8월말에 '번역의 속도에 대하여'란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다루었던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읽기에 앞서서 몇 마디 주절거린 것인데, 내용상 독립적이기에 아예 따로 떼놓으면서 제목을 따로 붙여둔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작시의 제목이다.

“신은 죽었다!”란 선언이 니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지만, 알다시피 그때의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기의)인바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 삶’을 넘어서는, 혹은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그 선언에는 함축돼 있다(“이게 다예요!”).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힘에의 의지’인바, 생물학 교과서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너무도 이해되고 있지 않은!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단지 무자비하고 냉담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의도 악의도 없고,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으며, 단지 냉담할 뿐인 어떤 사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속에는 목적이 가득 들어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것을 만든 동기나 이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병적인 상태로 발전하면 그것을 편집증이라 부른다. 즉 실제로는 우연한 불운일 뿐인데도 그 속에 어떤 악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에덴의 강>으로 재출간됨)

하여간에 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결코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우리의 몰이해 또한 ‘냉담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진실 혹은 냉담!).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니체의 철학을 ‘아줌마 철학’이라고 부른바 있다(아줌마는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가족 바깥은 없다!”). 니체는 자신을 경계로 하여,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로 구분했는데, 그러한 구분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아줌마 철학을 경계로, 아줌마 철학을 문턱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아줌마 철학은 무엇과 경쟁하며, 무엇을 부정하고 거부하는가? 그건 형이상학으로서의 ‘이데아 철학’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이데아 철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리고 기하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들이다.

가령, 점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서 점은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만 있다. 우리가 종이나 칠판에 찍는 점은 모두 그러한 가상(=이데아)의 유사물이고 복사물일 뿐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한 점이 연속적으로 움직여 이루어진 자취”가 선인바, 그것은 “길이와 위치는 있으나 넓이와 두께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 선을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현실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데아적 선의 (넓이와 두께를 갖는) 유사물, 복사물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모든 도형이 본질상 가상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데아를 본질로서, 실재로서 전제할 때, 현실은 그 복사물이고,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러한 복사물 내지는 복사물의 복사물을 진본(=오리지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동굴의 우화’는 바로 그러한 착각에 대한 우화이다.

 

 

 



진정한 어떤 것이, 현실 너머에 있다는 관념. 진정한 삶은 지상의 삶 이후에 온다는 관념.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메타피지카)적 사유의 요체인바, 모든 것은 메타(meta), 즉 이것 ‘너머에’ 있고, 이것 ‘다음에’ 있다. “이게 다가 아니야!” 그것이 이데아 철학의 구호이다. 하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아줌마 철학은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철학이다(그것이 여전히 철학이라면). 어째서 이게 다인가? ‘메타’라는 건 가상이고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메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캉 버전으로는 “메타언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현실은 그 자체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메타란 것은 (모자라는) 현실에다가 무엇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지만 충만한 현실을 대패로 깎아내서 판판하게(그래서 모자라게) 만드는 것이다. 곱슬머리를 다리미로 펴듯이.

 

 

 



칸트의 ‘보편 철학’과 니체의 ‘가치 철학’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칸트적 보편성은 차이를 지우고 개별성을 깎아냄으로써 얻어진다. 그에겐 남성과 여성이 철학적 주체로서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다. 실상 시계에 맞춘 듯이 똑같이 반복되던 그의 하루하루가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 ‘보편성’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세상엔 고급하고 고귀한 존재들이 있는 반면에 저급하고 저속한 존재들이 있다고. 이 ‘적대적’ 차이는 결코 극복되거나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건 고르지 않은 차이들(=시점들)이고, 각각에 충만한 현실뿐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철학에 ‘의미(Sens)’와 ‘가치’를 도입한 데 있다고 들뢰즈가 규정할 때, ‘도입’이란 말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철학이 삶에서 깎아낸 의미와 가치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점의 변경 혹은 도약이 있다.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 가령, 현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칸트 대 니체'는 '뉴턴 대 아인슈타인'이다. 즉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도입한다는 것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대신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간(=크로노토프)을 도입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 곡률을 도입함으로써 유클리드적 공간을 상대화함과 동시에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것, 그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니체 철학이 칸트 철학에 대해서 수행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때도 ‘도입’이란 것은 어떤 편의성 때문에 직선으로 간주(=계산)되었던 세상의 곡률이 회복되는 것이지,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상대성 이론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컨대, 현실은 이미 의미-담지적이며, 세상은 이미 곡률-의존적이다(유클리드적-평면적 세계란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곡률=0인 특수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 우리가 의미를 도입하고, 곡률을 도입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편의상의 이유에서일 뿐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전부인 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조상이 된다는 것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들이 훌륭하게 설계된 기계를 만드는 유전자를 물려받는 경향이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새는 왜 잘 나는가, 물고기는 왜 헤엄을 잘 치는가, 원숭이는 왜 나무를 잘 타는가, 바이러스는 왜 잘 번식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며 아이를 사랑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이 세상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다위니즘(Darwinism)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반복하자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보다 근본적인 건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건 상당히 덩치가 큰 문제이기 때문에).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작용’일 뿐이며,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뿐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는바, 그것은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의 물음이다.

알다시피 형이상학의 표준적인 물음은 “What is it?”, “그것은 무엇인가?”이다(WIT라고 부르자). 그 물음은 ‘무엇을 넘어선 무엇’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달리 목구멍에 걸리는 물음(=뼈다귀)인바, 이 물음을 떠안게 되면서부터, 혹은 이 물음(=뼈다귀) 자체로부터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병든 인간’이다. 즉 그 물음으로부터 인간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인간은 ‘무엇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엇을 넘어선 무엇들의 세계’에 살게 된 것. 즉 그는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은 다른 여자에게 있다!”).



생각건대, 모두가 ESR에 몰두할 때, 어느 날 문득 이 물음을 처음으로 던진 인간은 위트 있는 인간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병적인 인간이었다. 문제는 이 WIT가 상당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는 것(역시 언어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일본의 ‘이모 원숭이’가 모래 섞인 모이를 바닷물에 던져서 모이만을 골라내는 방법을 ‘발견’한 이후에 이것이 원숭이 사회에 ‘문화’로 전파되었던 것처럼. 한 ‘위트 있는 이모’가 발견했을 이 물음은 인간의 문화를 병든 문화, 병적인 문화로 변모시켰다(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 모든 종교의 전제는 삶=질병이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병든 인간’은 ‘병든 인간들’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간 자체가 돼 버렸고, 인간 자체의 존재방식이 돼 버렸다. 해서, 원래의 병들지 않은 인간, 위트에 물들지 않은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 초인(=위버멘쉬)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간은 인간을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호모 로쿠엔스가 극복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건 오직 언어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젠. 초인(=위버멘쉬)에 대한 구구한 설들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의 초인은 병들지 않은 인간, 건강한 인간, 그래서 ‘현재의 이 삶’을, ‘이 모양’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즉 그에게 다른 삶은 없다(“삶은 다른 곳에 없다.”). 모든 남자는 ‘이 남자’이고, 모든 여자는 ‘이 여자’이다(해서 “세상에 옛 애인이란 없어요!”).

헤겔의 말을 비틀면, 초인, 그는 “현실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아무런 부정도, 비판도 않는 니체는 보수적인가? 결코 아니다. 역시 헤겔의 예를 따라서, 니체 우파가 “현실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이들의 구호는 “이대로!”이다), 니체 좌파는 “긍정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즉,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긍정적인 것일 때 비로소 ‘현실’이다)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현실에 맞서는 어떠한 가상(illusion)도 거부하는바, 진정한 빛은 현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발하는 빛이다.

요컨대, 인간과 초인, 혹은 병들고 나약한 인간과 씩씩하고 건강한 인간이 있다. 전자가 중언부언하면서 수사적으로 말한다면, 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동어반복적으로 말한다. “나는 나야!”라고. 먹는 건 먹는 거고, 싸는 건 싸는 거고, 싸지르는 건 싸지르는 거라고.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부득이 위트를 섞어서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은 어느 쪽인가, ESR의 편인가, WIT의 편인가?(혹은 생각 없는 편인가, 생각만 많은 편인가?)



두서없는 말이 많았는데, 요점은 니체 철학의 의의이며 니체를 읽을 필요성이다. 니체를 읽는 재미는 정신의 스트립 쇼를 보는 재미이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우리의 정신을 발가벗긴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예요, 이게 다예요!” 그런 점에서 니체는 유머러스하다고 말하고 싶다(이때의 유머는 형이상학의 ‘위트’와 대조되는 것이다). 이 유머는 니힐리즘의 유머이다. 니힐리즘에서 니힐(nihil), 즉 무(無)가 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나 권위도 니힐리즘은 부정하는바, 그것은 그러한 가치/권위가 부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존재 혹은 사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고귀한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귀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저속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속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건 당신이 머리를 싸맬 일이 아닌 것. 그냥, 멍게가 있고 해삼이 있듯이(멍게적인 해삼과 해삼적인 멍게가 있는 게 아니라), 쏘가리가 있고 왜가리가 있듯이(거기에는 물론 매운탕도 있다), 제법 있는 것들이 있고, 또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찬 것들이 있고, 빈 것들이 있는 것이다(“빨간 우산, 노란 우산, 찢어진 우산…”).

중요한 건, 그걸 당신이 긍정하느냐 마느냐이다(기독교 버전으로는, 보기에 좋으냐 싫으냐). 긍정? 그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정도의 긍정을 말한다(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이 여자를?!). 그러니까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에 이르는 여정(“높다란 학교길”)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닌 것이다(그런 생각만 하면 나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어쨌든 그런 확정/판결(“나는 나다!”)을 통해서, 우리는 제 자리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인간이란 가면을 벗어 던지고, 혹은 양의 탈을 벗어 던지고, 늑대에서부터 성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같은 놈’이란 딱지를 떼고서 정말로 무엇임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그레고르 잠자처럼 말이다). 나-말미잘, 나-촌닭, 나-너구리를 거쳐서, 나-거머리, 나-하이에나, 나-청소부, 나-나폴레옹, 나-아저씨, 나-아줌마, 나-세컨드, 나-어리버리에 이르기까지. 왜 동물성뿐이겠는가? 나-콩알, 나-잡초, 나-호박, 나-해바라기, 나-물망초, 나-도깨비풀, 나-옥수수, 나-고목나무, 나-가여운 풀벌레 등등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이들의 쟁투이고 합창이다(“우산 셋이 나란히, 티격태격 걸어갑니다”). 그런 세상에 대한 ‘인식’을 나는 예전에 몇 편의 시들로 옮긴 적이 있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그 중 하나이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나이를 먹는다, 나눠먹지 않는다. 어릴 적
느릅나무는 무얼 모르는 느릅나무, 물정에
눈을 부릅뜨면서 느릅나무 뿌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느릅나무는 다혈질적이다, 다혈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느릅나무를 꿈꾼다, 꿈으로 무장한다.
극좌와 극우의 곁가지들을 모두 가지치기한
중도적인 느릅나무, 중도좌파적인, 중도우파적인
느릅나무, 옆에 다소곳이 신파적인 느릅나무,
신좌파적인, 신우파적인 느릅나무, 들
저마다 한 그루의 느릅나무 이상을 꿈꾼다.
느릅나무의 극복을 꿈꾼다. 꿈꾸며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물길을 찾고
햇빛을 쬐고 탄산가스를 마시며 부지런히
동화작용한다, 작용하며 늙어간다. 어릴 적
여럿이 나란히 뿌리내린 그 자리들에서
제각각 비틀리고 말라가며 쪼그라진다.
곧 느릅나무 조합에서 제명된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다시 반복하자면,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 교량이고, 과정이며 몰락이라는데(도킨스 버전으로는 ‘유전자 운반체’), 어쩔 건가요? “어쩌긴요, 더없이 유머러스한 일인 걸요! 어쩜 그럴 수가!..”

06.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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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6-06-0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몇 편 안 읽긴 했지만) 항상 어렵군요! 어쨌든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6-06-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인'들의 시를 안 읽어보셨군요. 이 정도는 어려운 시의 축에도 못들어갑니다!..

2020-06-08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