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 서재에 초창기부터 자주 들락거리시는 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재작년 연말에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렸던 글의 제목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었고, 데리다의 <법의 힘>의 일부분을 읽고 정리한 것이었다. 이 페이퍼는 그걸 다시 정리한 것이다(내지는 다시 정리하려는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아무리 크리스마스이고 연말 정서에 취해 있다고 해도(*이 글은 2004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씌어졌다), ‘법의 힘’을 무시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읽은 대목을 정리해두겠다고 해놓고 입 닦는 건 혹 ‘사기죄’에 걸리진 않을까? 해서 입막음으로 약간의 시늉은 해두어야겠다. 책들을 펴놓으시길 바란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음, 책은 지난 7월에 나왔군.) 1부의 제목은 ‘법에서 정의로’이다. 제목부터 벌써 기죽이지 않는가? 역자에 따르면, 이는 또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복화술’이 법에 고유한 것인지, 데리다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학부시절 법학과 경제학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은 걸 은근한 자랑으로 삼고 있는 나이지만(그러니까 나는 ‘법’과 ‘경제’를 고의로 무시했던 것인바, 결정적으로 나는 ‘돈 버는 법’을 잘 모른다. 안쓰럽게도 이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이럴 때는 (‘무시’가 발각되는 게 아니라) ‘무식’이 탄로날까봐 ‘긴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짐작에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정의의 권리’란 말은 데리다의 의도(?)와 무관하며, 다만 프랑스어의 중의적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본문에서 ‘정의의 권리’란 말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치는 않지만(한번 읽었기 때문에), 그럴 법한 것이 데리다가 일차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은 법과 정의의 차이/구별이지 않은가?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37쪽) 법은 계산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불어의 ‘droit’는 ‘법’과 ‘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란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이다. 법이 정의의 상 아래에서 심판될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받을 수 없으며 (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인 데리다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대로, <법에서 정의로>는 1989년 10월 미국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학술콜로퀴엄에서 발표된 것이고, 이 발표(영어본) 텍스트는 나중에 (1992)란 단행본에 수록되었다. 나는 이 책을 제본해서 갖고 있는데, 그걸 구하러 몇 년 전에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십 몇 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법대도서관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법전’들을 혐오하는 편이다. 그 일본어투의 한국어들을 말이다. 그런 내가 제 발로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 ‘데리다의 힘’이다.

데리다는 먼저 자신이 ‘기조연사’로 초대된 콜로퀴엄의 주제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그는 다른 글들에서도 대부분 ‘타이틀’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곤 한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성마른 연설자’로 지칭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수사법도 ‘해체’와 ‘정의’의 이런 연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나는 이 사물들 또는 이 범주들 각각에 대해, 그리고 이 유사범주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말해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질서나 분류법 또는 어구에 따라 말할 수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11쪽)

거기서 ‘범주들’과 ‘유사범주들’은 문법용어로 말하자면, 실사(實辭)와 허사(虛辭)를 말한다. 즉,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단어결합)에서 ‘해체’ ‘가능성’ ‘정의’가 실사(=실질형태소)이고, ‘와’와 ‘의’가 허사(=형식형태소)이다. 역자는 ‘그리고’ ‘정관사 la’ ‘-의’라고 옮겼는데, 이 꼼꼼한 번역서에서 옥의 티라 할 만하다. ‘그리고’는 물론 불어의 ‘et’(영어의 ‘and’)를 옮긴 것일 테지만, 그 ‘et’에 해당하는 것이 ‘와’이며, ‘정관사 la’는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번역어구에 대응어를 갖고 있지 않다(이 제목의 불어문구 자체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러니 번역할 필요가 없는 단어이다). 데리다의 말은, 자신이 ‘해체’ ‘와’ ‘정의’ ‘의’ ‘가능성’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그걸 다 결합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에 대해서 말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흔히 하는 말로 ‘주최측의 농간’이라는 것).

그는 잠시 자문자답을 하던 끝에 이 문제를 이렇게 일단락을 짓는다: “이 최초의 허구적인(=가상적인) 의견 교환에서부터 이미 법과 정의 사이의 애매한 미끄러짐들이 예고된다. 해체의 ‘고통’, 해체가 겪는 고통이나 또는 해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은 아마도 법과 정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과 규범, 그리고 확실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는 규범이나 규칙, 기준이라는 개념들에 관한 문제다.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12쪽)

자신이 기조연설자로서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숙고/강조하면서 데리다는 (데리다답게) 이 언어의 문제로부터 연설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즉, 그는 불어에는 없고 영어에만 있는 관용표현 두 가지를 인용하는 것에서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 그 하나가 ‘to enforce the law’인바(다른 하나는 ‘address’란 동사이다), ‘법을 집행하기(법 집행)’이란 내용을 영어/불어/한국어는 각각 ‘to enforce the law’(직역하면 ‘법을 강제하기’)/‘appliquer la loi’(직역하면 ‘법을 적용하기’)/‘법을 집행하기’라고 표현한다. 이 셋은 동의어이다.

하지만, ‘to enforce the law’란 영어표현에서 데리다가 끄집어 내고자 하는 내용은 불어에도 우리말에도 없는데, 그건 바로 힘(force)이다. 이 법과 힘의 관계는 오직 영어표현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적용’이라거나 ‘집행’이란 표현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고로, 이 녀석들이 힘/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해서, ‘to enforce the law’를 불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에 대한 직접적인 문자상의 암시를 상실하게 된다.”(강조는 나의 것) 

어쨌든 이 영어표현에서 강하게 암시되는바,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은 법에 대하여(…) 외재적이거나 부차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법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법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이다.”(15쪽) 요컨대, 힘과 법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칸트의 <법론>에서도 환기되는 바이지만,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 가능성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16쪽)

 

 

 

 


역자가 계속 ‘적용가능성’으로 옮기고 있는 건 우리말의 ‘집행’을 뜻한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참에 언급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최상의 텍스트이다(데리다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해체도 시도한 바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과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데리다에 좀 익숙한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법의 힘’과 ‘폭력’이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식의 ‘해체’가 이후에 진행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암시를 데리다는 이번엔 독어에서 가져온다. 게발트(Gewalt)란 단어에서.

2부에서 그가 자세하게 다룰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의 제목에도 쓰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이 ‘게발트’인바, 이 단어는 독어에서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기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17-8쪽)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데리다는 영어에서 ‘법=힘’이라는 등식을 가져오고, 독어에서는 ‘힘=폭력’이란 등식을 끌어온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법=폭력?! 법에 대한 이런 사전정지작업 이후에 데리다는 ‘해체’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에 들어간다.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 왜냐?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시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21쪽)이기 때문이다.

해서 ‘가설상’ 이러한 해체가 고유한 (하지만 불가능한) 장소를 갖고 있다면, 그건 철학이나 문학부라기보다는 법학부, 혹은 신학이나 건축학부가 될 거라고도 데리다는 말한다(그런 이런 관점에서 ‘비판법학’이나 스탠리 피시 등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까 데리다를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쪽은 나 같은 문학도가 아니라 법학도이고, 신학도이고, 건축학도이다. 그게 데리다의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해체라는 이름을 지닌 가장 잘 알려진 작업들에서 해체가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24쪽)

그리하여, 데리다가 이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해체 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의의 문제를 ‘전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 일반이 해온 일은 오직 이 문제를 전달하는 일이었는지”(25쪽)이다. 즉,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시작이다. 아니 시작도 아니다(“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파스칼과 몽테뉴의 단장을 인용하면서, 그걸 해석하면서부터이다. 데리다가 <팡세>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스칼의 단장은 이것이다.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Justice, force – Il est juste que ce qui est juste soit suivi, il est necessaire que ce qui est le plus fort soit suivi.)

이 대목은 브륀슈빅판의 단장 298번으로 돼 있는데(대부분의 우리말 <팡세>도 이 브륀슈빅판을 옮긴 것이다), 역자가 역주에서 참고로 제시하고 있는 국역본(셀리에판을 옮긴 서울대출판부본)의 번역은 이렇다: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추종받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강한 것이 추종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해 보건대(그리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해보건대), 아무래도 역자(혹은 데리다)가 이 문장을 독특하게 읽은 듯하다. 내 불어실력이 고등학교 때보다도 못하지만, 그걸로라도 판단해 보건대, 역자가 ‘지속되다’로 옮긴 것은 ‘soit suivi’이며, 그 경우 이걸 (영어로 치자면) (사전을 보니 ‘suivi’라는 형용사가 있다. ‘연속적인’이란 뜻)로 본 듯한데, 나로선 , 곧 수동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말이다).

‘suivr’란 동사의 과거분사 역시 suivi이니까 나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그러니까 suivi는 그 과거분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모양이다). 그 ‘suivr’의 뜻은 ‘따르다’이다(국역본은 ‘추종하다’로 옮겼고, 러시아어본은 ‘복종하다’로 옮겼다). 가장 큰 차이는 ‘따르다’가 타동사인 반면에 (be+형용사를 동사로 본다면) ‘지속되다’는 자동사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에 하자가 없다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문맥일 텐데, 나는 타동사(수동태 구문)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옮기면: “정의, 힘 – 정당한 것(=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힘)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불가피하다).”

이어지는 단장의 내용은 이렇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27쪽)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는 ‘그런데’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힘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정의)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것(=힘)을 정당한 것(=정의)으로 간주했다는 것. 아주 냉소적인 단장인데, 곧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의해서 힘이 정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알다시피, 미국이 ‘무한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정의’ 덕분이 아니라 ‘힘’ 때문이다).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국회의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이 ‘정의 없는 힘’이라면, ‘파병(연장) 반대’는 ‘힘없는 정의’이다. 어떻게 하면 정당한 것이 강해질 수 있을까?



파스칼은 다른 단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28쪽) 러시아어본은 마지막 문장을 “관습을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라고 옮긴다.

즉 권위의 신비한 토대는 ‘관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당히 래디컬한 관점이다. 거기에 견주면, 관습법(불문법)과 성문법을 구분하는 상식(적인 관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사실, ‘관습법’이란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가로막는 알리바이는 아닐까? 마치 관습으로서의 법 말고 다른 법이 또 있다는 듯이 암시하는? 비유컨대, 관습법과 성문법의 관계는 니체에게서 은유와 개념의 관계와 같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파스칼-니체적 견해에 따를 때,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따라 위헌이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생각보다 ‘래디컬한’ 결정이다(이 재판관들을 무슨 ‘8적’ 운운한 김용옥의 견해야말로 상식적이지만 ‘보수적’이다). 우리의 재판관들은 법적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성문)헌법이란 그저 닳아빠진 관습헌법에 다름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니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쨌든 우리의 재판관들은 (무)의식적으로 법에 대한 자기-해체를 감행했던 것. 해서, 한국은 경이롭게도 (프랑스에도 없을 법한) ‘해체주의적’ 재판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은 파스칼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몽테뉴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정당하게도 몽테뉴에게 관심을 돌리는데, <수상록>(혹은 <에세>)의 저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법들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28쪽)



이 대목은 <수상록> 3권 12장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수상록>은 전3권의 방대한 텍스트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13장(마지막장)에 나온다(러시아어본은 <경험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3권이 모두 완역돼 있다. 2권짜리와 4권짜리로 두 종류). ‘신용을 얻으면서’란 표현은 아마도 ‘credit’가 들어간 어구를 번역한 듯싶은데, 그냥 ‘신뢰를 얻으며’ ‘준수되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 신용불량자의 경험이 있는 나는 ‘신용’이란 말을 싫어한다). 하여간에 몽테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거창한) 정의와 무관하다. 비록 법은 정의를 요구하며 정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해서 이러한 관점은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며, 그러한 비판을 넘어선다.

“정의와 법의 돌발(=우발적인 출현)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더 내재적이고 좀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31쪽)

사실 나는 첫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법을 만드는 작용은(…)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의 의미를 간취하지 못하겠다. 걸리는 건 ‘해석적인 힘’, ‘해석적인 폭력’이란 표현이다. 그게 ‘해석적인’이 힘/폭력의 수식어인지, 아니면 해석과 힘/폭력이 등가적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해석적인 폭력’의 짝개념은 무엇인가? ‘기술(記述)적인 폭력’인가? ‘해석적인’이란 말은 그냥 (오스틴의) ‘수행적인’이란 말로 이해하면 되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어떤 정당화하는 담론도 창설적인 언어활동의 수행성 또는 이 수행성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대하여 메타언어적인 역할을 보증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32쪽) ‘지배적 해석’? 데리다의 ‘메타언어는 없다’는 테제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이해는 나로선 장래의 것이다(이해란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인데, 나는 이 대목을 아직 내 식으로 패러프레이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후의 내용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정초의 순간에는 불법적이지도 비적법하지도 않다.”(32-3쪽) 같은 지적은 이해하기 쉽다.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또 다른 법)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폭력(게발트)’이다. 르네 지라르가 얘기하는 ‘정초적 폭력’ 같은 게 여기에 대응할 것이다.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의)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이다.

이러한 법의 구조가 해체 가능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 토대에 정초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건축학적으로 어떤 건물이 해체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부실해야 한다). 이러한 법, 혹은 법으로서의 정의와는 대조적으로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해체 그 자체 역시 해체 불가능하다. 해서, “해체는 정의다.”(33쪽) 이걸 좀 어렵게 말하면,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34쪽)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이것이(=이러한 정식화가) 명료하리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확신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곧 좀더 명료해지리라고 희망한다.” 그것은 또한 ‘성마른 독자’인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어서 데리다가 끌어오는 것은 영어에서 ‘address’란 타동사이다. 이 동사는 ‘연설하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다’ ‘(편지에) 주소를 적다’ ‘(편지를) 발송하다’ ‘구애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역자는 주로 ‘전달하다’라고 옮긴다. 그러니까 address란 동사는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 기조연설에서 (데리다) 자신을 청중들에게 address해야 하며,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문제)를 address해야 한다. ‘정확하게’ ‘우회 없이’. 여기서 특별히 ‘정확성’을 문제삼는 것은 흔히 ‘편지/문자(letter)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전달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해체(주의)의 표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러한 표어 혹은 주제를 이 기조연설에서 address해야 하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길-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道斷)’을 뜻하는바, 해체의 지배적 관심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그에게 ‘강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의무를 ‘to enforce the law’와 ‘address’란 두 가지 영어표현을 문제삼음으로써 주제화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갖게 된 것은 “힘과 정확성, 그리고 정의의 독특한 혼합물”(36쪽)이다. 이 혼합물과의 대면은 아포리아의 경험 자체를 요구한다. 먼저, “정의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인지, 욕망, 요구는 자기 자신, 곧 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37쪽)

다시 반복하자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포리아적인 경험들은 정의에 대한, 곧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결정이 결코 어떤 규칙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경험들이다.”(37쪽)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법은 정의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권리)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법의 곤궁에 대해 더 파고들어간다. “전달/주소(address)는 방향처럼, 정확성처럼,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데(*주소를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편지/문자는 전달된다. 안 그러면 반송된다), 우리가 정의를 원할 경우, 정당하고자 할 경우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전달/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38쪽)

그렇다면,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 하는(…) 정의의 행위(법관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는 정의, 규칙이나 규범, 가치 명령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에 일치하게(=합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되겠지만,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규칙은 독특성(=단독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고진의 문제틀을 가져오자면, 합법적인 결정/판결이란 건 고유명이라는 단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법은 갑, 을, 병을 다루지 배용준과 이나영을 다루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즉,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데리다는 그러한 확신이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어서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자신이 처한 언어적 상황(영어권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해야 하는 상황)과 계속 비교해가면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까 불어로 말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연설의 주제는 제대로 제시/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제시/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원텍스트’는 불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이다.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그렇다. 비록 발표문이 최초의 불어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더라도 이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으며 이 연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to enforce the law’와 ‘address’란 두 (우연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39쪽, 나의 강조)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정의가 (불가능한) 아포리아인 것처럼.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 언어의 문제는 어떤 판결이 그것을 구성하는 고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졌을 때 발생하는 불의의 폭력을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건 (이 콜로퀴엄의 담론공간을 넘어서) 더 나아가 동물(재판)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데리다 자신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넌지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동물의 희생은 (인간의)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며, 또한 지향적 주체의 정초 및 (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법의 정초에 본질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법의 기저에 있는 동물 희생과, 양육과 사랑, 애도 및 사실은 모든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전유에서 상호주관성을 구조화하고 있는 상징적이거나 비상징적인 모든 식인 풍습 사이의 친화성”(41쪽)과 연계된다(이에 대해서는 ‘애도’와 ‘식인풍습’과 관련한, 역자의 용어해설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아주 복합적이며 방대하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간 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42쪽)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걸 통째로 문제삼고 있는 해체를 “정의에 관한 윤리적/정치적/법적 물음 및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대립을 유사-허무주의적으로 포기하려는 태도”로 간주하는 일부의 피상적인 이해/오해는 (데리다가 강조하거니와) 해체와 무관하다(그들은 엉뚱한 ‘주소지’에 가서 해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와는 전혀 반대로, (1)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양하고 있으며(‘가제’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앙가제’하고 있다).”(43쪽)

여기서 불어의 ‘가제’ ‘앙가제’는 영어의 gage와 engage로 옮겨서 이해해도 무방해 보인다. 즉 해체는 정의의 요구에 ‘be gaged’ 돼 있고, ‘be engaged’ 돼 있다. 그리고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것이 해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변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애초에 그는 법과 힘(폭력)의 관계를 정식화했고, 이어서 정의와 해체의 (아포리아적) 관계를 진술/전달했다. 암기하기 좋게 말하자면, ‘법=힘(폭력)’이고, ‘정의=해체’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의 연관성이다. 정의로서의 법에 대해서 해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에 정의와 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법은 정의가 아니다)이 진정한 구분(…)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문제는 거기서 종결될 테니까).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집행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법은 힘 아닌가? 그러니 정의가 힘을 얻는 방도는 그것이 법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쪽)

거기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세 가지 아포리아의 기술이 이 연설의 결론부이다. (1) “어떤 결정(=판결)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59쪽)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고,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요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해서, “이러한 역설로부터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결정이 정당하며 순수하게 정당하다고, 더욱이 ‘나는 정당하다’고 현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이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때 읽은 한 동화에서는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인가(동화에서 여자들이 갖는 두 가지 ‘명분’이다), 하여간에 한 처녀가 왕으로부터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알몸이어서도 안된다. 말을 타고 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걸어와서도 안된다. 이런 아포리아적인 요구에 대한 ‘현명한’ 처녀의 해법은 이랬다. 옷을 입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걸쳤고(그건 ‘옷’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을 타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말에 매달고 끌려왔던 것(적어도 걸어오진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법과 정의 사이에 끼인 해체는 내게 그러한 해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해체는 지혜인가?

그리고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흔히 해체는 결정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이해되지만, 그때의 결정불가능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같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는 두 번째 아포리아인바,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53쪽)

“만약 현전하는 정의를 규정하는 확실성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 해체된다면, 이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작동한다.” 물론 이 정의의 이념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환원불가능성은 타자로부터, 타자의 (단독적인) 독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렇듯 결정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며(이 또한 정당하지 않다) 오직 결정(=판결)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이 아포리아의 내용이다(그러니까 정의는 판단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판단의 실행에 있다).

끝으로,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이것이 세 번째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전제로서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다. 즉,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이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56-7쪽)

따라서 결정은 광기 어린 것이며 신들린(=수동적인) 것이다. 하긴, 정의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 혹은 불가능한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불가능한) 아포리아에 대응하는 것이 ‘광기’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데리다가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54쪽)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나 엄살은 아니겠다.

이상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다시 암기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불가능성] (2)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불가피성] (3)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아주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계산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판단하고 결정/판결해서는 안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영역하면, “Unaccountable justice orders us to account!”)(그러니, 정의도 미쳐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해체 불가능한, 현전 불가능한, 계산 불가능한, 그래서 ‘견적 안 나오는’ 정의의 구조이며 요구이다. 그리고 해체는 거기에 미쳐 있다. 왜?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59쪽, 나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붙)들릴 때 우리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망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데리다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04. 12. 26-27.

P.S. 한 일주일 정도 인터넷 사용정지 처분을 받은 탓에(소위 '유비쿼터스'가 안되고) 뜻대로 내용을 업그레이드할 수가 없다. <법의 힘>의 나머지 부분도 조만간 정리할 계획은 갖고 있지만, 논문과 서평 여러 편을 다음 주까지 써야 하는 까닭에(게다가 종강하고 리포트 처리하고 하는 일들!) 언제 가능할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위기지학(爲己之學)인 걸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다. 위인지학(爲人之學), 곧 남들을 위한 공부였다면, 이 얼마나 불성실한 공부인 것인가!..

06.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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