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출간된 장 폴 브리겔리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해냄, 2006)는 사드의 독자라면 탐을 낼 만한 전기이다. 이미 모리스 르베의 전기가 <사랑, 자유 그리고 거짓말>(창, 2001)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왠지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브리겔리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기 몰락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다 당대와 이후에 수많은 전기 작가들에 의해 왜곡된 사드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는데, "1부에서 사드의 일대기를, 2부에서는 사드가 영향을 미친 분야와 그 기록들을 담았다. 58컷의 도판과 함께 바타이유, 보들레르, 바르트 등의 사드 연구 저작들이 수록되었다."

스튜어트 후드의 <사드>(김영사, 2005)와 함께, 그리고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1996)와 함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이자 매뉴얼로서 갖춰둘 만한 책이다. 아직 재정형편상 구해놓지 못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06. 05. 26)에 자세한 서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다놓고 '예고편'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필자는 지용진 기자이며, 타이틀은 "탐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드'를 다시 보자"이다.

-이탈리아 감독 빠졸리니(*파졸리니 혹은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은 불쾌할 정도로 적나라하다(*오래전에 영화 전공자로부터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영화를 구해보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거친 영상을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직접적인 재현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 자체를 무마시킬 정도로 뇌를 얼얼하게 만든다. 영화에 녹아있는 사디즘의 정의(定義)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의 권력’을 통해 규정되면서 복종의 미학을 정당화시킨다. 사도마조히즘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그 의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사디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한 쾌락과 음탕함 그리고 강제적인 유린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그야말로 편의적인 접근이다. ‘쾌락과 불쾌’의 단순한 구도 안에 ‘사디즘’의 의미를 가둬두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장 폴 브리겔리 지음 / 성귀수 옮김)는 그러한 박제된 통념을 거두기 위해 인간 사드(1740∼1814)의 인생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사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간을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63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긴 서적에서 느껴지는 방대함은 사드에 의한, 사드를 위한, 사드의 이야기로 촘촘히 매워져 스펙터클 함마저 감돈다. ‘집대성’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이유다.

-크게 2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책은 제 1부에서는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다뤘고, 제 2부에서는 균형 있는 시각에 근거해 그를 에워싼 통설을 세세히 드러냈다.

-수많은 정부(情婦)를 둔 외교관 아버지와 폭군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래서 사드는 아버지의 성적 괴벽이 적힌 일기를 보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의 의식을 점령한 성(性)은 그로테스하게 변질되면서 애초부터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에 의한 강제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드는 ‘사랑’이란 감정을 싹 틔우기 전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랑’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멋대로 해석하는 ‘사디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의 불행을 밖으로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결론을 미리 고정시켜 놓고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패한 사랑과 그에 이은 정략결혼. 사드는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에 침잠하게 되면서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성욕과 변태성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광란한 방탕함과 예수상(像) 모독으로 감옥에 가게 된 사드는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용되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사드의 기억이다. 그는 억압과 괴벽의 아버지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신화화를 이룩해냈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하다. 이른바 전복(顚覆)된 오이디푸스를 반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저서를 활용해 이를 입증하면서 사드의 삶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객관성에 근거한 ‘사드읽기’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저자의 자료수집과 인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드(Sade)’의 인생을 책 속에 옮겨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지만 의도를 강요하거나 인위적인 결론을 맺지 않는다. 다만 수백 년 간 누적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면서 천재로 살다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 자체에 무게를 둔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드 만큼이나 포괄적으로 인용되는 인물도 드물다. 종교, 풍습, 철학, 예술 심지어 정치까지도 ‘사드’를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된 영역 안에서 재활용시키며 번식시켰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적 활용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서 차별적으로 해석됐다는 데 있다. 사드의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추종자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게 사드를 활용했다. 하나의 사드가 여러 의미로 분열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된 것. 저자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제점이다. 사드는 악마적인 천재였다. 동시대에서는 미처 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비쳐졌지만 그가 후세에 끼친 정신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연의 정상상태로서의 사디즘은 ‘도착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문제 안에 머무름으로써 자연에 기댄다. 자연을 부정하면서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인위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모순구조는 ‘사드’라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듯‘사드’의 모호성은 그를 종교로 삼는 탕아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 돼버린 ‘사드’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동을 목격한 사드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구하게 되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당화한다. 이후 나폴레옹 시절에는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남은 일생을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쥘리에트> 등의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사드를 거론하는 것은 음담패설에서는 유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왜곡된 사디즘에 경도된 나머지 전체를 보지 않고 작위적인 해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사드>에 천착하는 목적은 ‘바로 알리기’다. 저자의 전방위적인 탐구는 사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으로 독자들을 포섭한다. 다분히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쫓으며 ‘사드’의 오용(誤用)을 걱정하는 저자의 노력이 눈부신 건 일차적으로는 방대한 분량에 있겠고, 그 다음으로는 진정성을 들 수 있다. 지면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어법은 사드에 대한 몰이해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스며있기 때문에 와 닿는다.



-사드의 실험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인간은 혼자이고, 악은 필연적으로 만연한다.”소름끼치도록 자기 희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고뇌는 절대본능을 추구한 방탕한 탐미주의자인가? 욕망의 충족을 선도한 희대의 성적 자유자인가? 선택은 온전히 ‘사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갈린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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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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