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다(*이 글은 2003년 7월초에 씌어졌다). 4박 5일 동안 (부)자유로웠는데, 핸드폰과 인터넷, 그리고 시계와 책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짐들 때문에, 박상륭의 <산해기>나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학Ethics of the Real>을 들고 가려던 계획을 접었고, 덕분에 온전히 바다와 햇살 하고만 지냈다(다른 거 다 제쳐놓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헤어져 보면 안다. 우리가 길들이거나 우리를 길들인 이들이 얼마나 그립고 애틋한가를. 책이 얼마나 그립고 어쩌고, 젠장...

출판계가 유례없는 불황에 허덕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지만(인터넷 서점의 할인폭이 커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책값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건지, 오기인지 잘 모르겠다. 황석영의 <삼국지>(창작과비평사)가 20일새 20만부가 나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식도 있는 거 보면, 활로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참에 황석영은 노후대책을 확실히 마련한 것 같고, 창비는 제2의 '동의보감'을 발판삼아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 반응이 미지근한 <서유기>는 안타깝게도 문지 살림에 아직은 큰 도움이 못되는 거 같다(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이런 즈음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압권은 역시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남) 완역본이다. 정가 38,000원에 867쪽. 내가 알기로는 아직 영어 완역본도 없는 형편이니(기존의 <광기의 역사>는 영어 축약본의 번역이다), 생각보다 빨리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것만은 틀림없다. 알다시피 책은 푸코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출세작이다. 같은 급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것도 번역중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2004년에 출간됐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이것도 축약본이 번역돼 있다) 등이다. 푸코를 읽은 지가 오래됐지만, 신간은 다시금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조금 제한적인데, 데리다와 벌인 논쟁에 국한된다. 기존의 <광기의 역사>에는 논쟁의 빌미가 됐던 텍스트가 빠져 있었다. 이 논쟁만을 다룬 책이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이다. 그리고 김현 교수의 푸코 연구서인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도 한 장을 이 논쟁에 할애하고 있다. 또 그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 3>(동문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단, 김웅권이 옮긴 <구조주의의 역사> 시리즈는 웬만큼 눈이 밝지 않고서야 내용을 짚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참고로, 데리다는 푸코 이외에 리쾨르, 가다머와도 논쟁을 벌인 바 있지만, 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남들 논쟁에 왜 관심이 많으냐 싶을 테지만, 논쟁이란 각기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보다 효과적으로(예전에 많이 쓰던 표현으로 '쌈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책은 얼마 전 세상을 뜬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사회평론)이다. 600쪽이 넘는 신간의 원저는 1981년에 초판이, 그리고 199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다윈 이후에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로 불리던 저명한 고생물학자/진화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이다.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그의 책들에는 <다윈 이후>(범양사), <새로운 천년에 대한 질문>(생각의나무), <판다의 엄지>(세종서적), <풀하우스>(사이언스북스)가 있고, 몇 권의 공저도 번역돼 있다. 나는 <다윈 이후>를 읽고 적어도 그의 단독 저작들은 다 모으고 있는데(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다),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은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이다. 책의 원제는 '도킨스 대 굴드'인데, 진화생물학계의 두 간판스타가 벌이는 한판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할 수 있다.

 

 

 



세번째 책은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신>(동문선)이다. 가까운 시일내 내가 이 책을 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두께이다. 정가 34,000원에 711쪽짜리. 아마도 철학적 신학 계통에서 가장 두꺼운 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바이셰델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철학의 뒷계단>(분도출판사)이란 책 덕분이다. 철학의 '정문'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아주 요긴한 '뒷구멍'을 일러준 책인데, 나중에 <철학의 뒤안길>(서광사)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돼 나오기도 했다(둘다 절판됐지만. *이후에 나온 <철학의 에스프레소>(아이콘C, 2004)는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같은 책이다). 저자가 편집한 책으로 <별이 총총한 하늘아래 약동하는 자유>(이학사, 2002)가 있다. 부제가 '칸트와 함께 철학을 읽는다'인 칸트 철학 발췌서이다. 바이셰델은 실제로 칸트 전집을 편집하기도 했다고.


 


 

 

네번째 책은 <증언으로서의 문학사>(깊은샘)이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문학사/문단사에 대한 11명의 원로 작가/비평가들의 대담/증언을 싣고 있다(*전체적인 문단약사는 김병익의 <한국문단사>가 유익하다). 최근에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 나오고 있는데(강준만 등), 신간 또한 유익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1,2>(한겨레신문사)도 근래에 나온 필독서이다. 나는 이런 책들은 고등학생들이 좀 많이 읽었으면 싶다.

 

 


 


우리 문학 얘기를 좀 덧붙이면, '컬트 작가'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 다시 쓰기'로,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문학동네)가 나왔다. 책은 '(속)산해기'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뒤늦게 <산해기>까지 구입한 것인데, 사실 나는 박상륭 마니아가 아니다(문단에는 생색내는 마니아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이 아닌 '잡설'을 쓰므로(잡설가라 해야 할까). 서양의 경우라면, 쿤데라도 포함되는 에세이 소설 양식이라는 걸 들 수 있을 텐데, 그의 잡설이 그러한 에세이에 견줄만한 것인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는 후기 조이스에 견줄 만한 대단한 작가이거나 아니면 변칙/트릭의 작가이다.

 

 

 

 

다섯번째 책은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낸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여이연이론5). 여이연의 정신분석세미나팀에서 낸 자료집이자 정신분석 주제사전이다(*그 후속작이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2005)이다). 열두가지 개념을 정리하고 있고, 실제비평 5편과 번역 3편을 싣고 있다. 대표필자인 임옥희의 표현에 따르면, '다락방의 미친년들'이 2년 넘게 공부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물론 책으로까지 낸 데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353쪽의 버틀러 번역에서 철자가 틀린 단어가 3개나 나오는 걸 보면, 잘 정제된 자부심은 아닌 듯하다.

5권이 나온 여이연 이론서 가운데, <여사서>를 빼고, 가장 중요한 책은 4권으로 나온 가야트리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이다. 인도 출신의 이 인텔리 이론가는 흔히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와 함께 탈식민주의 3인방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각각을 대표하는 책들이 <오리엔탈리즘>, <문화의 위치>,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이다. <문화의 위치>(소명출판)의 우리말 번역이 좀 부실한 데 비해서, 다행스럽게도 <다른 세상에서>는 최적임자가 번역을 맡은 책이라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잡다한 책들. 김근의 <욕망하는 천자문>(삼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독자들의 호응도 좋은 편이지만, 내가 당장 읽을 책은 아니어서 여기서는 제외했다.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한길사)도 유용한 지식인 사전이지만, 이 책까지 사는 건 재정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굿모닝미디어)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는 매트릭스 현상에 대한 철학자/과학자들의 개입이 얼마나 유효/무효한지는 보여주는 책들이고, 프란체스카 리고티의 <부엌의 철학>(향식)은 간식으로 딱 좋은 책이다.

 

 

 

 

굴드의 책이 아니었다면, 더 주목을 받았을 책이 니콜라스 험프리의 <감정의 도서관>(이제이북스)인데, 원제는 '내면의 눈'이고 부제는 '사회적 지능의 진화'이다. <유혹하는 본능>(참솔)이나 <호모 에로티쿠스>(청어람미디어)도 <비열한 유전자>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다.

 

 

 



끝으로, 김수영 전집이 다시 나온 소식. 민음사에서 품절된 전집이 이번에 하드카바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는데,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듯이 이런 책들도 웬지 사(주)고 싶어진다. 1권(시), 2권(산문)만이 우선 나왔는데, 별권으로 묶였던 김수영론은 좀더 두툼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세기 단 한명의 한국시인으로 고종석은 백석을 꼽았는데, 나는 백석과 김수영 중 아직 결정을 보지 못했다...


 

 

 

참,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도 나왔다. 이쯤되면, 김훈의 지겨움이라 할 만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보는 수밖에. 그의 지겨움에, 그의 비애에 동참하는 수밖에. 얼마전에 나온 <아, 입이 없는 것들>의 이성복과 함께 그는 '비애적 세계관'을 대표한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왜, 어떻게, 어쩌다, 어쩌자고,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쏟아지는 책들을 어쩔 수가 없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앤드루 샌더즈의 <옥스퍼드 영문학사>(도서출판 동인)가 번역돼 나왔다. 정가 38,000원에 968쪽짜리이다. 두껍기로는 <철학자들의 신>이나 <광기의 역사>를 능가한다. 책의 모양새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서평으로 보아 번역된 영문학사로는 가장 방대하며 가장 풍부하다. 번역의 질도 양호하다고 하나, 고유명사들을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한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한다). 같은 출판사에서 <현대문학이론 용어사전>도 나왔다. 사전이야 많을수록 좋다는 건 상식이다. 778쪽이고, 정가는 역시 38,000원. 바야흐로 3만원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김홍경의 <노자>(들녘)도 거기에 속하는데, 880쪽에 정가 32,000원이다.

 

 

 



잡다한 책에서 빠뜨렸지만, 오강남의 <세계종교 둘러보기>(현암사)도 필히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한 책이다. 그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과 함께. 지각있는 기독교인들의 필독서이다. 종교학 관련으로 아주 따끈따끈한 신간은 존 D. 카푸토의 <종교에 대하여>(동문선)이다. 기독교철학쪽 전문가이자 하이데거와 데리다 전문가이기도 한 저자의 책으론 <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시간과공간사, 1993)가 번역돼 있다(절판됐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데리다와 함께 편집한 <호두껍질 속의 해체론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유익한 데리다 입문서이다.

문제는 역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의 번역자이기도 한데(이것도 종교와 관계가 있다고 번역을 맡은/맡긴 것일까?), 우리말 <믿음의 대하여>는 처음 인상만큼 읽을 만하지가 못하다(그래서 이전에 '읽을 만하다'고 한 발언은 취소한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고,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대상 a'가 뭔지도 모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겠고. 그런 역자가 열성적으로 번역에 나서고 있다. 좀 걱정스럽다(*<믿음에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후에 이 같은 내용의 리뷰를 올렸다).

2003.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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