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신간을 만나는 반가움의 반대편에는 없는 돈을 축내지 않아도 좋은 고마움이 있다(*이 글은 2003년 3월초에 씌어졌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바로 반가움이거나 고마움이다. 지난 두주 동안에도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요즘 출판계를 불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행히도 눈길을 끄는 책은 많지 않았다. 반가움보다는 고마움이 더 앞섰던 두주였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책들 몇 권을 적어본다.

 

  

 



맨처음에 소개하고 싶은 책은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이다. 영화잡지 <프리미어>팀이 옮겼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에버트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평론가이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러시아 영화에 관한 그의 기사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의 글들은 모아놓으면 더 힘을 발휘하는 거 같다(이와 반대되는 저자들도 많다). 추천사를 쓴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말을 빌면, "젠체하지 않고 냉소적이지 않으며 무한한 애정으로 영화를 껴안으면서 정확하게 분석적 거리를 유지하는 평문"들을 그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들뢰즈, 라캉을 들먹여야지만 영화평론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도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이었다. 그중 기자들이 비교적 길게 리뷰를 쓴 책들은 10권인데, 참고로 그 목록을 적어둔다. <채플린-거장의 생애와 예술>(한길아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길>(민음사),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시공사), <데즈카 오사무- 만화가의 길>(황금가지),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시공사),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올리버 스톤1,2>(컬쳐라인), <로저코먼-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열린책들), <펠리니>(한길사), <마틴 스코시즈- 비열한 거리>(한나래) 등이다.

나는 이 열권 중에 <감독의 길>(구로자와 아키라)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펠리니>는 그냥 갖고 있으며, <히치콕과의 대화>는 분실했다(조감독하는 동생 친구가 가져가버렸다, 필시). 해서 한때 영화평론에도 생각이 없지 않았던 자신이 다소 부끄러워졌다. 물론 영화관련서들을 몇십 권 갖고 있지만, 그래봐야 최소한 읽을 책의 3할이 못되는 책인 것. 하물며, 봐야할 영화들은 또 얼마나 봤을까?.. 참고로, 아주 최근에 영어로 된 러시아 영화 소개서 한권이 나왔다. 저자는 D. Gillespie이고 책제목은 'Russian Cinema'이다. 200쪽이 안되는 비교적 얇은 분량이다.

 

 

 

 

노마디스트들에겐 반가운 소식으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이 번역돼 나왔다(*내가 아직까지 번역서를 안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들뢰즈 책이 아닌가 싶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평을 얻고 있지 못한 책이다).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 책은 두 권인데, <표현의 문제>는 그 중 두꺼운 책이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몇 차례 청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부교재의 한권이었고, 나는 그 영역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도중하차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나 비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사상>(갈무리) 정도를 참고해봐야겠다(*하트의 책은 <들뢰즈 사상의 진화>로 재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또 한권의 철학책. '이달의 철학자' 헤겔의 <믿음과 지식>(아카넷)이 번역돼 나왔다. 서점에 아직 진열되지도 않은 채 쌓여 있는 걸 봤는데, 분량이 그리 두껍지 않다. 헤겔 책을 그래도 남들만큼은 갖고 있는 편이지만, 신간은 전혀 생소하다. 야코비 등의 신학/철학에 대한 비판서인가 싶다. 하지만, 내가 더 바라는 것은 <정신현상학>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으로 재번역되는 것이다(*알다시피 이후에 <정신현상학>은 임석진 교수의 번역으로 개정본이 출간됐다. 그것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인가는 모르겠다. 몇 안되는 서평을 읽어봐도 가늠할 길이 없다).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도 소리소문없이 번역돼 나왔다(원제는 'Bodies that matter'). 쥬디스 버틀러는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영미권 여성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즘적 라캉 독해로 우리에겐 알려져 있는 듯한데, 신간은 최초로 번역된 그녀의 단행본 저작이다. <라캉의 재탄생>(창작과비평사, 2002)에 실린 라캉과 버틀러에 관한 장을 참조할 수 있다.



 

 

 

국내 저작으로는 주은우의 <시각과 현대성>(한나래)이 출간됐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손본 것인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묵직한 국내 저작이다. 아직 통독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순 없지만, 학위논문으론 김종엽의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의 현대성 비판 연구>(창작과비평사, 1998)과 함께 가장 궁금했던 책이었다.

 

 

 

 

묵직하기론 <리오리엔트>(이산)도 만만찮다. 종속이론가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신작인데, 나로선 저자의 이름만 얼핏 들어본 적이 있다. 나로선 당분간 읽을 겨를이 없는 이 책에 대해선 중앙일보에 실린 최갑수 교수의 서평을 참조하시길.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이 샘플이 공개됐다. 그 결과는 오늘자 한겨레에 실려 있다. 샘플 작품은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인데, 검토대상이 된 21종 가운데, 14종이 표절번역이었고, 나머지 7종도 거의 읽을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사태는 상당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영미문학학회지인 <안과 밖>에도 매호 고전 번역을 검토하는 글이 실리는데, 지난호의 경우 도 결론은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우리말로는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평가사업의 보고서가 내년초쯤 책으로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지만(*2005년에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로 출간됐다), 총체적인 문제의 점검에 이어서 새로운 재번역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사실 이런 평가사업은 다른 분야의 고전들에도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학진(학술진흥재단)이 제대로 돈을 써야 하는 사업분야는 바로 이런쪽이다.

최근 일간지 북리뷰들에서 비판적인 읽기 코너들이 생겨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지난번에 소개한바 있던 중앙일보의 죽비소리가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인데, 출판계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오역이 많은 걸로 지적된 <루시의 유산>과 <붉은 여왕>의 출판사측에서는 해당책들을 환불조치하거나 개정판과 교환해줄 방침이라고 한다. 언론의 파워가 이런 거구나 싶은데, 하여간에 좀 뻔뻔한 (부실한 지젝 번역서들을 양산하고 있는) 인간사랑을 비롯하여 몇몇 출판사들도 이 참에 각성했으면 싶다. 그리고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고 있으므로 책값의 거품도 좀 빠졌으면 싶고.

가만히 입다물고 있으면 좋은 책들이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악착같은 관심과 비판이 더욱 요긴한 계절인 듯싶다...

200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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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h1999 2006-05-09 02:3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리플 남겨주신 분 맞지요? 글이 굉장히 많네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로쟈 2006-05-09 10:32   좋아요 0 | URL
예, 한 2-3년 되다 보니 많은 축에는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자주 오실 정도는 아니고 가끔 들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