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토요일이면 4-5개 각일간지의 북리뷰란을 꼼꼼히 읽는다. 2/3 정도는 같은 책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나머지 1/3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고, 어쩌다 고대하던 책들과 그 리뷰를 만나게 되면 반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일간지 북리뷰에서 다루는 책들이란 관심범위가 한정돼 있어서 그냥 지나치게 되는 책들도 적지 않다. 그런 책들은 서점에서 직접 만나봐야 한다! 지난번에 언급한 <향락의 전이> 개역판 같은 것도 일간지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그 출간소식이나 리뷰를 찾을 수 없었다. 뭐든지 발품이 필요한 법이다...

 

 

 



그간에 나온 책들이 많지는 않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책은 역시나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이다. 전체 4권 중에서 그 제2권이 4년만에 출간된 것이다('나오다 만 책들'이란 글에서 다룬 바 있다). 나는 대략 출판사에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동문선 번역의 1/5 정도는 맡아서 하는 걸로 보이는 김웅권의 번역으로 이번에 나온 것. 다루고 있는 시기는 1960년대니까 바야흐로 구조주의의 전성기이다. 이 책이 갖는 강점은 현장감이다. 역사학쪽보다는 저널리즘쪽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하다 싶을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인터뷰들이 페이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때문에 구조주의가 '숨쉬던 공기'를 느껴보든 데 가장 적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권이 4년만 나왔으니까, 다음 3권은 아마 독일 월드컵때나 구경하게 되는 걸까?(*2003년에 3,4권이 모두 나와 완간되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한국학술협의회의 석학초청 강연으로 이번에 내한했던 다니엘 데넷의 책이 나왔다. 그가 쓴 책이 아니고, 그에 관해 씌여진 논문 모음집 <다니엘 데넷>(몸과마음)이다.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있는 이 강연에 작년에는 리처드 로티가 왔었고, 나는 직접 강연회를 찾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물론 데넷보다는 로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조선일보가 꼴보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넷의 '환원주의'는 심리철학에서 내가 가장 지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콰인의 제자였던 데넷은 옥스포드에서 길버르 라일(<마음의 개념>의 저자)의 지도로 학위를 받고 이후에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개척한다. 그의 대중적인 대표작은 <설명된 의식>과 <다윈의 위험한 생각> 등인데(후자는 나의 애장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현상을 신경생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략 내가 이해하는 그의 입장이다. 심리철학에서는 그런 입장을 강한 환원주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심리철학쪽을 읽은 지가 좀 오래됐다).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가 수반이론을 제시했던 김재권이다. 그의 <수반과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1994)은 쉽게 읽히진 않지만, 상당히 계발적이다. 특히 '비환원적 유물론의 신화' 같은 논문은 아주 파워풀하다.

어쨌든 데넷의 흥미로운 작업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의 책으론 <마음의 진화>(두산동아, 1996)과 호프스태터와 함께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민음사, 2001, 원제는 '마음의 자아')가 나와 있다(*<마음의 진화>는 올해 재출간됐다.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책세상) 새번역본이 나왔다. 책세상의 고전의 세계 시리즈로 나온 것인데, 이미 최재희, 이규호 등의 번역본이 있는 책이지만, 한글세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장정과 번역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사들었다. 원저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1781)을 쓴 4년 뒤에 나온 것으로 그보다 3년 뒤에 나오는 <실천이성비판>(1788)을 미리 집약해서 보여준다.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유명한 주석가인 허버트 페이튼은 이 책을 분량은 짧지만, 서양윤리학사에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비견될 만한 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뒤쪽에 실린 역자의 해설도 친절하다(152-3쪽에서 선험적 판단을 후험적 판단이라고 잘못 적어놓기는 했지만). 요컨대,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 좀 방대한 <실천이성비판>(백종현 역, 민음사,2002)은 미뤄두더라도. 사실 고진의 <윤리21>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두어야 하는 책이지만, 나중에 읽는다고 해서 고진이 눈쌀을 찌푸리지는 않을 것이다(*알다시피 작년에 <윤리형이상학의 정초>가 백종현 교수의 번역으로 완역돼 나왔다).

 



 

 

김춘수의 마지막 시집 <쉰 한편의 비가>(현대문학사)가 나왔다. 아직 생존 시인이지만(*시인은 재작년에 작고했다), 시인 자신이 아마도 마지막 시집이 될 거란 얘기를 했고, 남은 여생엔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라 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집 이후에 묶인 그의 시집은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에 이어 세번째인 듯싶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그에게서 릴케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깃발)란 시 구절(제목인지?)도 초기시에 있었고, 그 전에 시인으로서의 입문 자체도 일본의 한 책방에서 발견한 릴케 시집 때문이었다고 하는 시인으로선 마지막 시집을 릴케풍(시인은 패러디라고 말한다)으로 끝내는 것이 자연스러워도 보인다.

한국시사에서 김춘수는 넌센스의 시인이면서 가장 논리적인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때 논리란 것은 그가 시작 못지 않게 시론에 열심이었던 사정과도 연관된다(사실 넌센스란 것은 정확한 논리의 배경하에서만 의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시의 강점은 허튼 감정의 낭비가 없다는 점.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 전부는 김수영의 의미과잉의 시와 김춘수의 의미부재의 시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적어도 논리적으론!). 그래서 현대시를 읽겠다면, 먼저 김수영을 읽으라, 그리고 김춘수를 읽으라...

 



 

 

두어 주쯤 됐지만, 고종석의 책들이 나왔다. 한 2년만인데, <자유의 무늬>와 <서얼단상>(개마고원)이 함께 나왔다. <자유의 무늬>가 좀 짧은 글 모음이고, <서얼단상>이 좀 긴 글 모음이다. 그는 워낙에 잘 쓰는 저널리스트이므로 나는 좀 긴 글이 더 좋다. 이제껏 그는 10여권의 단행본을 냈는데, 영어단어공부책 빼고는 나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고 절반 이상을 읽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동네)과 <감염된 언어>(개마고원)이다. 아니 사실은 모든 책이 다 좋아할 만하다.

그는 내가 무조건 사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한국어 사랑이 믿음직스럽다. 그의 글은 김훈이나 김규항 같은 칼잡이의 글이 아니어서 부드럽고 유연하다(*나는 세 사람의 문체에 대해서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치밀하면서 오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문필가의 교양이나 상식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표준적인 인물이 고종석이다. 또한 그는 한국 저널리스트(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한 자존심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고종석을 읽으라...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기치로 내세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에서 <도쿄대생들은 바보가 되었는가>(청어람미디어)까지. 나는 그의 책들을 사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았지만(그의 고양이 빌딩은 부러워한다), 그의 입장들에 절반쯤 공감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돈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거 같다(*이 말은 절반만 지켜졌다. <뇌를 단련하다>를 샀지만 읽어보지는 않았기에). 사실 그와 무관한 인연은 아닌데, 그의 책을 내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절친한 대학 선배였다. 하루는 그 선배로부터 일어로 음역된 지식인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전화가 왔었는데, 내가 확인해준 몇 사람의 이름에는 마샬 맥루한도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란 책 얘기였다.

그럼, 내가 공감하지 않는 나머지 절반. 그가 자기 전공분야 외에도 과학 분야나 시사 쪽에 상당한 식견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는 데는 공감하지만, 그래서 그가 픽션쪽보다는 넌픽션을 더 강조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도쿄대 철학과 출신이고 서구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문학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실제의 현실은 가능한 현실들의 일부일 따름이다. 첨단과학에 대한 지식이 지식에 깊이를 주는 건 아니다. 다방면의 걸친 그의 박식이 그다지 부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분야가 서로 다른 것을 어쩌겠는가...

200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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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엇지 2007-09-11 14:54   좋아요 0 | URL
분야별 책의 판매량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봐 왔기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과학 분야의 책들은 거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은 이렇게 균형잡히지 않은 독서와 지식의 축적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세상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것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사회는 첨단과학의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고 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지요. 물론 자동차를 움직이는데 있어서 정비와 운전의 분야는 다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균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 분야가 연결이 되어 시너지를 발휘했으면 하는 것이 아마도 두 분야를 섭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첨단과학에 대한 공부가 지식에 깊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와 철학이 空에 대해 고민해 온 것 만큼, 자연과학에서도 도대체 空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노벨상 수상분야이기도 한 양자전자기동역학 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사회 전체의 지식 균형을 위해서 극단적으로까지 자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타치바나씨의 의견이 심히 동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