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가장 무더웠던 여름은 1994년의 여름인데, 올여름이 어쩌면 그와 겨룰 만하지 않나 싶다. 정확한 건 두어 주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여하튼 덥다(지난해 이맘때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터라 더운 걸 모르고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늦은 오후에 책을 읽으러 동네 카페에 갔었는데, 자리가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붐볐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온 가족도 드물지 않았고. 음료를 비우고도 몇 시간씩 죽치고 있기 뭐해서 두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한여름의 독서도 요즘 같아선 그 자체로 '전투적 독서'다.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라 이 전투는 고지전에 해당하는데, 발에 치이는 책 가운데 하나가 앤서니 그래프턴의 <각주의 역사>(테오리아, 2016)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교수로 미국 역사학회 회장도 역임한 수준급의 학자다. 이번에 찾아 보니 <시간 지도의 탄생>(현실문화, 2013)과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일빛, 2000)이 번역된 바 있다(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 지도의 탄생>은 액면가가 44,000원이고, 절판된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은 중고본이 50,000원에 나와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뜻이겠다).

"과학적 역사의 기호가 되는 각주라는 종의 기원은 흔히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라고 여겨져 왔다. 랑케가 1824년 출판한 처녀작 <라틴과 게르만 여러 민족들의 역사>에서 최초로 상부와 하부의 이원적인 구조로 역사를 서술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랑케가 처음으로 지면의 위쪽에는 중심 이야기가 있고, 그 아래 발치에는 그 중심 이야기를 지탱하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제시하면서 부차적인 이야기를 형성하는 각주가 있는 근대적인 이중적인 서사로 역사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 <각주의 역사>에서 저자 앤서니 그래프턴은 각주가 랑케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논의들 모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흩어져 있는 연구의 가닥들을 연결함으로써 이제까지 서술된 적 없는 각주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일단 책 제목에서 '각주에도 역사가 있나요?'라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질 독자들이 이 책의 타겟 독자다. 물론 '각주'에 대한 나름의 경험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논문을 써본 독자들) <각주의 역사>라는 제목만으로도 뭔가 상쾌한 느낌을 얻을 수도 있겠고. 미국의 서평가 마이클 더다의 촌평이 책을 실감을 잘 전달하는 듯싶다.

"현학자에게는 무기, 신출내기 학자에게는 눈엣가시, 학생에게는 골칫거리. 지면 하단에 놓인 각주는 오랫동안 부수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의 은신처였다. 이러한 각주가 이 책에서는 당당히 중심으로 등장한다. 각주의 역사는 근대 학문의 전개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놀라운 역사이다. 앤서니 그래프턴은 그 놀라움을 ‘역사에 대한 각주’를 ‘역사로서의 각주’로 바꾸며 보여 주고 있다. 지식을 글로 쓰는 형식이 어떻게 진보했는가를 섬세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전개하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마음도 사로잡히기 위해선 적정온도가 필요하다. 이런 무더위에 각주 달린 책을 읽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발이라도 씻으면 좀 나아질까. '독서 전투'의 전우들은 어떻게들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16.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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