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 비평, 게다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 '토탈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장욱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사실 나온 지는 좀 됐다. 한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한지라(저자 사인본을 보내줄 거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 몇 마디 거드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언론에서도 비교적 비중있는 리뷰들을 싣고 있어서 일단은 한 곳에 모아놓는다(참고로, 인용하는 일간지들의 게재일자는 인터넷상에서 옮겨왔을 경우 실제 게재일과는 하루 정도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 부탁을 받은 바 없지만 그래도 좀 띄워주는 게 의리가 아닌가란 생각에서. 그리고, 혹 잠재적인 독자가 <정오의 희망곡>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서. 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중앙일보(06. 04. 21) 2월 14일 정오 서울 프레스센터. 창비 40주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거기, 백낙청 선생 옆 자리, 공부 잘하게 생긴 청년 하나 앉아있었다. 농 섞어 질문을 던졌다. "거기 앉아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대답은, 제법 다부졌다. "제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오늘 창비의 모습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장욱. 1968년생이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87학번이다. 94년 시인이 됐고, 여태 평론집 두 권과 시집 한 권, 장편소설 한 권을 발표했다. 처음 썼다는 소설은 지난해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많지도 않은 나이에 시도 짓고 평론도 하고 소설도 쓴다는 얘기다.

 

 

 

 

-그가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을 발표했다. 시는 각오했던 대로 난해하다. 온전히 해석한다는 게 사실 무리다. 그는 평론가 권혁웅이 명명했던 이른바 '미래파'의 핵심 당원.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소통 기능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인칭과 시제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는 갖가지 실험 자체가 그의 시 세계란 뜻이다.(*사실 김소월의 어떤 시들도 상당히 난해하므로 '난해성' 자체가 시의 결함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난해함인가 하는 것.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 

-굳이 참견한다면, 그에게선 지식인 냄새가 난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난무하는 욕설과 흥건한 성적 암시 따위가 그에겐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상의 '오감도'가 연상되는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에서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우울과,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나는 사라지지 않지./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비닐봉지처럼 유연해.'('근하신년' 부분) 같은 대목에서 기존 질서를 거역하는 부정(否定)의 시학이 읽힌다고. 그러면 시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 맘대로 해. 나는 너를 피해 먼 곳을 돌아갈 테다. 우리 만나지 말자.'('비열한 거리' 부분)

-이장욱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자투리를 제공한다. 그는 진짜로 공부를 잘한다. 아니 열심히 한다. 그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입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짓고 소설을 쓴다(이런 시인, 처음 봤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 '빨간 바지'의 조직원이다. 권혁웅.김행숙.장석원.여태천.하재연 등 고려대 출신 또래 시인들의 시 합평회 모임이다.

-권혁웅에 따르면 시 두어 편을 두고 몇 시간씩 토론하는 지루하고 밋밋한 모임이다. 여태 외부에 알려진 적 없어 비밀결사란다. 이장욱은 98년부터 암약했다.(*이들이 '빨간 바지' 마피아들이다. 우리 시단의 전복을 꿈꾸고 있는?) 두 달 전 그는 창비의 신임 편집위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필경 뉴스였고 일종의 난센스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최전방 어딘가에 서있기 때문이다.(손민호 기자)

 

한국일보(06. 04. 22) 이장욱씨의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속의 시적 주체들은 엉뚱하다. 너무 엉뚱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엉뚱함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그의 시들은 ‘나, 당신, 우리, 그, 그들’ 등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수많은 인물들로 북적거린다. 종잡을 수 없다 함은, 등장인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한 편의 시 속에서도 하나의 캐릭터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표제작)

-‘당신’과 ‘나’의 감쪽 같은 탈바꿈, 혹은 시적 화자의 자리바꿈이 해명되는 유일한 단서라면 ‘우리는 우호적’이라는 아주 느슨한 연대감일 것이다. 그들은 그 느슨한 연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냉소적인 자’들을 어렴풋이 냉소한다. 그 배경 음악은 슬프게도 ‘정오의 희망곡’이다.

-그의 시에서는 시적 주체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역시 엉뚱하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결정’)오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10년 후의 야구장’)간다. “여름의 잎새들 사이로 12월의 눈이 내”(‘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리고, "수도관의 저편에서 빙하의 이동이 시작”(‘지진’)된다. 시간과 공간, 주체가 뫼비우스의 띠로 꼬아놓은 새끼줄처럼 그렇게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엉뚱한 시공간 속에서 엉뚱한 주체들은 ‘좀비 산책’을 하고, 길을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한다.(‘엉뚱해’)

-세상이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근대의 이성, 그 강박적 질서의식이 세상의 종잡을 수 없음을 정돈해 우리 인식 속에 체계화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은 질서 강박의 거푸집으로 주조된 가짜일 것이다.

-이들 시적 주체들의 종잡을 수 없음은 그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거나, 냉소이거나, 위로이거나, 견딤의 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마치 좀비라도 된 듯 산책도 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펭귄을 만나는 공상도 하고, 코를 맞대는 아프리카식 인사를 해보는 것(‘아프리카 식 인사법’)은 아닐까.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중독’ 부분)

-시집은 엉뚱한 세상을 향한 엉뚱한 저항과 냉소와 위안과 희망으로 풍성하다. 최소 저항으로 그 엉뚱함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삼차원을 ‘조용한 평면’으로 펴야 할지 모른다.(최윤필 기자)

'정오의 희망곡' 진행자 정선희씨.(라디오를 따로 듣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정오의 희망곡'을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정의 레퀴엠'이나 가끔 들었을까?)

동아일보(06. 04. 27)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 넘실거리는 음악, /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정오의 희망곡’에서)

-이장욱(38) 씨는 시인이고 소설가이며 평론가다. 등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씨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김민정 황병승 씨 등 젊은 시인들의 실험시가 시단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보다 앞서 쓰인 이 씨의 시도 주목받게 됐다.(*평론가 이장욱은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경향의 시인들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은 그런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언어인데 한 편의 시로 엮이니 낯설게 보이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 조용히 멈출 수 있다.’(‘가을에 만나요’에서) 인형처럼 생각도, 말도 없이 걷던 화자는 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감정을 갖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 나는 전진하였다 / 당신을 향해 / 한 발 한 발.’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시에서 메시지를 찾는 데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씨도 “내 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면서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한다. 시에 위대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서 언어미를 향유해 달라는 것이다.(김지영 기자)

(*)띄워준다고 해놓고서 시가 난해하다는 리뷰만 나열해놓았으니 이 또한 '수행적 모순'이 아닌가 걱정된다. 걱정을 덜기 위해서 샘플로 올려져 있는 시 '먼지처럼'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먼지처럼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이 시의 퍼즐을 맞춰보기로 하자. 다른 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여기서는 시인 고유의 어휘적, 통사적, 의미적 반복과 패턴을 재구성할 수는 없고, 단지 이 시에 한정하여 '보이는 그대로'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먼저,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이다(원론적으로 말해서 리듬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지기에 반복은 시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이동하였다', '우리는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가 이 시의 핵심 의미소이다. 묘사되고 있는 나머지 대상들은 이 이동중에 보게 되는 '우리의 배경'이다.   

'우리' 자신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의 시적 세계관은 허무주의이다. 먼지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의 유구한 상징이기에.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기꺼이 코끼리이고 개이고 기린이고 하마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 '먼지적 세계관'의 허무주의를 부드럽게 허락하고 수용한다. 그건 이를 테면 체념이다. 이 체념적 정서에서 '욕망'이 배태될 리 없다. 화자는 다만 관조할 따름이다. 바람결에 떠도는 먼지 같은 세상과 세월과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먼지처럼' 그냥 "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러한 관조적 허무주의이다(풍경 자체가 허무주의의 산물 아닌가?).

모든 의미가 증발해버릴 만한 의미의 영점, 혹은 '가장 짧은 그림자'를 거느린 정오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일 뿐(이런 시의 계보의 우두머리에 김종삼을 앉힐 수도 있으리라. 중간 보스쯤에는 박상순을)."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포즈를 취하고.

그런데, '피아니스트'로서 이장욱이 연주하는 음악은 지극히 모던해서, 독자의 이지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정서적인 감화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음악이 '정오의 희망곡'이란 표제로 배달되는 것은 또한 지극한 유머이다. 그 유머에 어떤 트라우마가 배어 있는 것인지는 나는 아직 알지/확인하지 못한다. 하니 나는 당분간 그의 시의 배경으로만 남도록 하겠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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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글로 해서 김행숙을 읽으며, 'too deleuzian'이라고 느꼈습니다. 비평가로서는 이런 작가가 얘기하기 쉽겠다 싶은... 하지만 신형철 문장이 워낙 매력 있어서 ... 이별의정거장을 사서 좀 읽었습니다... 그런 건 있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감성... 이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만... 저는 추사 세한도에서 그 극적인 예를 봅니다, 그런데 거기엔 충만한 숭고미의 '배면'이 있습니다. 진짜 기교적이죠!... 또 좀 들여다보니 김행숙의 시에서도 숭고미가 느껴집니다. 신형철은 탈숭고라고 해석했지만요... 그런데 중요한 건 '배면'입니다...

미지 2010-07-16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 시는 철학과 음악의 결핍이 겹치는 곳에서 탄생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어의 순서(학)와 감각의 순서(악)가 조성하는 물질적 공허, 육체적 무의미를 달래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을 거라는... 결국 시는 물질적으로 충만하고 육체적으로 의미로운 언어이자 음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자 일종의 요구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