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출판문화(60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지면의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 2016)를 읽은 소감을 일부 적었다. 기대 이상의 자극으로 던져주는 책인데, 공자와 <논어>를 보는 시각으로는 내가 읽은 범위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새롭다(덕분에 공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핵심은 맹자와 주자도 공자를 잘못 읽었다는 것. 주자의 <논어집주>를 신주 모시듯 해온 이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견해다(이수태의 <공자의 발견>(바오, 2015)도 부제는 '탈주자(脫朱子) 논어학'이다). 그래서 희귀하며 계발적이다. 저자의 책이 더 번역되면 좋겠다.  

 

 

 

출판문화(16년 6월) 논어의 재해석

 

동양 고전으로 <논어>만큼 유명하며 많이 읽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듯싶은데, 고전 읽기 강좌라면 으레 <논어> 읽기를 출발점으로 하며 <논어>에 대한 이해가 동양사상, 혹은 중국사상에 대한 이해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한때 중국에서는 공자와 유교에 대한 비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 공자는 성인의 지위를 잃어본 적이 없고 <논어>는 경전의 자리에서 내쳐진 적이 없다. 물론 ‘공자왈’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어서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은 있지만 말이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논어>에 대한 이미지도 두 가지로 양분되는 듯싶다. 절대적인 존숭과 경탄의 대상이거나 구닥다리 같은 구시대적 인물과 낡은 사상의 대명사이거나. 즉 선생이거나 꼰대거나. 그 사이의 태도도 가능할까? 다수의 <논어> 번역본과 주석서를 읽고 때로 서평도 쓴 적이 있는 만큼 나는 <논어>를 고전으로서 예우해온 편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논어>를 열심히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논어>에 대한 나의 독서는 언제나 발췌독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읽을 시간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다. <논어>를 읽어도 안 읽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그 이유니까.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건 <논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여 아직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논어>의 미스터리인데, 일단 ‘어록’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논어>는 굉장히 쉬운 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으면 일반인도 해석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읽히는 문장들이 여전히 모호하거나 자주 모순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말인지 모호하다. 게다가 '시’(時)라는 말의 뜻이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렇듯 다르기 때문이다. ‘위정’편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라고 읽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기기도 한다. 정반대의 해석이 양립가능하다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또 ‘자한’ 편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대목의 색(色)을 여색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색’과 ‘겉모습’이 반대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런 식이면 <논어>는 읽어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맛보기 어렵다.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계속 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논어>에 대한 온전한 독서는 미래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논어>를 읽는 눈을 새로 뜨게 해주는 책과 만났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다.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제이앤씨)란 소책자가 지난해에 나오긴 했으나 그것도 따로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이고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다. 일본에도 공자와 <논어>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권위자들이 없지 않다. 시라카와 시즈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 등이 국내에는 소개된 바 있다. 오구라 기조는 그런 대가급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한국에 8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지한파’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부한 8년간의 수학 경험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본과 한국 ‘사이’를 체험했고 이 체험이 <새로 읽는 논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논어> 해석에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사이’다. 일단 그는 공자의 세계관을 생명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아주 대범한 구도를 제시하는데,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에는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대립해왔다. 바로 ‘애니미즘’과 ‘범령론’이고, 이 가운데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바로 공자라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범령론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범령론에 속하고, 동양에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의 기(氣)사상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공자는 “생명을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나 감성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는 독특한 생명관을 갖고 있었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애니미즘’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인 의미의 애니미즘과는 구별되기에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혼(soul)과 혼(soul)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이런 새로운 개념(용어)들의 타당성은 물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논어>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을 저자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논어>를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논어>에서 공자는 인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통상 인에 관한 공자의 산발적인 발언들을 취합하여 인의 통일적인 의미를 추출해보려고 애쓴 것이 기존의 독법이었다. 하지만 오구라 기조는 이런 관행을 뒤집는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통일적인 정의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인에는 그런 정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소울리즘)은 우연성이란 관점에서 생명에 접근하기에 무엇이 ‘생명’인지 보편적‧연역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즉 인은 지극히 우연적이면서 우발적인 성격을 갖는다.


흔히 인에 대한 정의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인데, 이 또한 저자가 보기에는 인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다. 극기복례할 때 거기에 인이라는 생명이 반짝인다는 뜻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생명’이고, 그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다. 그리고 어진 사람으로서 인자(仁者)란 그러한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실 인(仁)란 한자 자체가 ‘인(人)’과 ‘이(二)’의 합성어이며 본래는 ‘친하다’는 뜻이라 한다. 그 원래적 의미에 따르더라도 인은 ‘두 사람 사이’를 가리키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구라 기조는 인을 ‘사이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을 내면화하거나 인격화할 때 발생한다. 바로 맹자가 한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사상사에서 마음을 내재화한 이는 공자가 아니라 맹자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내면에 선한 도덕적 본성이 내재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발현된다고 본 것이다. 오구라 기조가 보기에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아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군자 또한 특정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즉 “어떤 사람이 인을 실현할 때 가끔 군자가 되는 것”이어서 공자가 이상으로 여긴 것은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극기복례’란 말도 다르게 해석된다. 주자는 극기(克己)를 ‘사욕을 이겨내다’로 해석하고 ‘복례(復禮)’는 ‘천리(天理)로 돌아가다’로 해석했지만, 오구라 기조는 자기 한 사람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예라는 공동주관적 공간(사이)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한자의 어의를 좇자면, 인(仁)은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는 ‘인간(人間)’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 곧 인간을 그러한 ‘사이적 존재’로 본 것이 공자의 인간관이자 생명관이라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한편 ‘인간’을 일컬어 영어로는 ‘human being’이라고 옮기는데, 그 의미를 살리자면 ‘interhuman’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이 두 용어를 원용하자면, 맹자는 공자가 말한 ‘인터휴먼’을 ‘휴먼비잉’으로 곡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무대’이자 ‘둘의 진리’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인(仁)의 정의에 바로 부합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을 가르친 공자는 ‘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 덕분에 도덕군자가 아닌 '사랑의 철학자'로서 공자를 다시 만난다.

 

16.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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