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는 히치콕의 <누명 쓴 사나이(The Wrong Man)>(1956)에 대한 레나타 살레츨(살레클)의 읽기이며(참고로, <누명 쓴 사나이>는 국내에 <오인>으로 출시돼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의 제2부 9장에 실려 있다. 이 글은 그 '읽기'에 대한 (재)정리인데, 일차적으론 재작년 5월 모스크바에서 작성된 것이고(따라서 국역본과 러시아어본만을 참조했다) 거기에 이미지들을 붙여서 창고에 넣어둔다. 참고로, 살레츨의 이 작품론은 <히치콕>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꼭지라 할 만하다(해서,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 봄 직히다).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 2003)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레나타 살레츨은 재치있고 똑똑한 비평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언제나 논리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무대화’한다. <히치콕>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글이 '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 한 편인 것이 다소 아쉬울 정도이다. 대개의 다른 글들에서는 다루고 있는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이 글을 읽는 데 장애가 되었지만, 살레클의 글은 전혀 그런 장애감 없이 읽어나갈 수가 있었고, 다 읽은 후에는 마치 히치콕의 이 영화를 이미 본 것 같다는 느낌마저 갖게 되었다. 비평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이 장의 국역본 번역은 대체로 무난하며 ‘읽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물론 옥의 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따라서 이하의 언급은 오역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번역에 대한 ‘제안’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먼저, 히치콕의 이 영화는 평범한 음악가였던 매니 발레스트레로가 우연히 강도로 오인되는 바람에 악몽과도 같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는 카프카적 주인공과 그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살레츨은 여러 차례 카프카를 언급한다.



러시아어본은 첫번째와 두번째 문장 사이에 이 영화와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둘 다 ‘오인’을 다룬다)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8줄 더 들어가 있지만, 이건 아마 영어본에서는 뺀 모양이다(러시아어본은 영어본을 옮긴 걸로 돼 있지만, 이미 언급했다시피 편제가 다르고, 부분적으론 슬로베니아어본을 참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자가 그런 내용을 썼을 리는 없으니까). 269쪽에서 ‘실제의 기미’라고 옮긴 건, 나라면 ‘실화성’이라고 옮기겠다. “이러한 ‘실화성’을 강조하기 위해 히치콕은 그 영화를 의사-다큐멘터리적인 양식으로 찍었다(‘감독했다’).”



그런 맥락에서, 카메오 히치콕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일러주는바,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암영에 못지 않게 그 ‘진실’로 인해 어둡고 공포스럽다.” 물론 여기서의 ‘진실’은 그 이야기가 ‘실화’라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암영’은 ‘shadow’의 번역인지 모르겠지만(나는 ‘암영’이란 번역어에 반대하지 않는다), 러시아어본은 ‘음울함’(‘어두움’)이라고 옮기고 있다. 참고로, 러시아어본을 약간 의역하면, “이 이야기는 그 음울함 못지 않게 그것이 실화라는 점 때문에 슬픔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암영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히치콕은 스토리를 말하는 입각점을 결백한 매니에게 설정한다.”라고 돼 있는데, 나는 이 영화에서 아예 매니가 (부분적으로라도) 화자로 등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만약에 그렇다면, “히치콕은 결백한 매니를 스토리의 화자로 설정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혹 그가 화자가 아니더라도, 히치콕은 다큐멘터리적 양식(=객관적 시각)과 함께 매니의 시점쇼트(=주관적 시각)로 영화를 이끌어나감으로써 매니에 대한 관객의 공감을 호소한다.

그런데, 살레츨이 지적하는바,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히치콕이 사용하고 있는 시점쇼트가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사이코>에서 아보가스트 형사가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왜 그런가? 이것이 살레츨의 통찰인데(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바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 영화에서 매니의 주관적 응시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주체(매니)는 그 영화의 형식이 제시하는 주관화의 양식에 들어맞지 않는다.”(271쪽) 그건 매니가 히치콕의 다른 영화들에서 “실수로 죄를 뒤집어쓴 주인공(‘주연’)”들과 뭔가 다르다는 걸 암시한다. 그 주인공들이 ‘사실들’에 관해서는 무죄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는 유죄였던 반해서, 그래서 나름대로 죄의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매니는 어떠한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요컨대 매니는 어떤 관료적인 기제가 수행적으로 유죄로 만든 카프카적인 영웅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272쪽)

 

 

 

 

‘기제’는 물론 ‘메커니즘’의 번역이고 ‘영웅’은 ‘hero’의 번역인데, 이런 문맥에서 ‘hero’는 ‘영웅’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번역돼야 한다. 게다가 ‘카프카적인 영웅’이란 일종의 모순어법이다! “어떤 관료적인 메커니즘이 수행적으로 유죄로 만든 카프카적 주인공”의 대표적인 사례는 <소송>의 ‘요제프 K’이다. 결국에 자신의 유죄성을 승인하는 ‘요제프 K’적인 인물과 매니는 다르다는 게 살레클의 핵심적인 주장이며, 왜 다른가를 보여주면서 그녀는 <누명 쓴 사나이>에 대한 독창적인, 페미니즘적인 독해로 나아간다. 이 독해의 핵심은 매니 대신에 그녀의 아내 로즈가 죄의식을 덮어쓴다는 것이다. ‘정신병자’ 남편 매니 대신에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 주체가 바로 그의 아내 로즈이다. 이건 무슨 메커니즘인가?



273쪽에 나오는 건 로즈의 고백인다.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제 실수예요. 이제 철들 나이예요…”(‘나이에요’는 오타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국역본이 읽을 만하기 때문에, 굳이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지 않고 읽어나가다가 이런 대목에서는 멈추게 되는데, 뭔가 ‘튀기’ 때문이다. “이제 철들 나이예요.”? 러시아어본에는 ‘사랑니’라고 돼 있어서, 같은 뜻의 영어단어 ‘wisdom tooth’를 찾으니까 (‘wisdom teeth’에) ‘철들 나이가 되다’란 뜻도 들어 있었다. 그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274쪽에 바로 치통 얘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짐작에 “이제 철들 나이예요”라기보다는 문맥상 “사랑니가 문제였죠.” 정도로 번역되어야 한다.



문맥을 재구성하면, 아내 로즈는 사랑니 때문에 치통에 시달리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하지 못한다. 그녀는 어느 날 남편 매니에게 자신을 위해서 돈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하고, 보험 사무실에 돈을 꾸러갔다가 매니는 강도로 오인되어 체포된다. 로즈가 자신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자신의 치통(‘사랑니’)에 있다고 믿어서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남편 매니의 ‘완벽함’을 유지하고자 하며, 결국 그의 ‘유죄성’(‘정신병’)을 자신이 떠안게 된다. 이상적인 남편으로 묘사되는 매니의 유죄성? 영화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의 ‘이상성’에 어떤 균열이 내재해 있음이 암시된다. 치과에 갈 돈이 없어도 우린 아주 운 좋은 사람들이야, 란 매니의 말에 로즈는 “(과연) 그럴까요?”라고 받아넘기는 장면이 그것이다. ‘완벽함, 근면함, 헌신성’ 등과 같은 매니의 ‘이상성’에 가려진 그의 이면은 ‘무기력과 수동성’이며, 더 근본적인 것은 그의 ‘정신병적인 태도’(276쪽)이다.

매니는 왜 정신병자인가? ‘언어-존재(parletre)’, 즉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존재론적 죄의식’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식에 붙인 프로이트적인 이름은 물론 부모살해(parricide)이다.”(277쪽) 이 번역에는 혹 문제가 없을까? 있다! 물론 parricide의 사전적 정의는 ‘부모살해’이지만(그러니까 부모 중의 한 사람을 살해하는 걸 parricide라고 한다, 둘 다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고), 이 경우는 ‘부친살해’라고 해야 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문제되는 건 ‘아버지-살해’이지, ‘어머니-살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바로 다음 문장에서 확인된다. “라캉의 프로이트 재독해에서처럼, 우리가 말한다는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함축한다.”! 이런 건 역자가, ‘사랑니’의 경우처럼 앞뒤로 조금만 주의해도 피할 수 있는 ‘오역’이다. 

해서, 살레츨의 요점은 매니가 아무런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친살해’에 대한 ‘존재론적 죄의식’이야말로 ‘말하는 존재’의 근본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니의 경우는 죄의식이 억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봉쇄되어 있다(여기서 ‘봉쇄’란 말은 ‘배제’ 혹은 ‘폐제’와 연관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277쪽 중간에 ‘가족 전원시’란 말이 나오는데, 이건 물론 ‘family idyll’의 번역이겠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은 ‘가족 로맨스’와 동의어인데, 그런 경우라면, 좀더 친숙한 ‘가족 로맨스’란 말로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리고, 만약에 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라면(나도 프로이트는 전문가는 아니므로), 그 차이에 대해서 주석을 달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적인 경우에, 아버지란 ‘아버지의 이름’(=“공허하고 상징적인 기능”)과 (실제의 우연적인) ‘아버지’(=“경험적이고 우연한 거주자”)의 간극을 가족 구성원들이 수용할 때 ‘기능하게 된다’(“우연한 거주자”보다는 “우연한 담지자”쯤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매니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실제로(정말로) 생각하는’ 아버지로서 행동하며, 따라서 정신병자이다!

살레츨의 분석은 여기까지도 높이 살 만하지만, 278쪽 이하의 영화 속 한 장면에 대한 분석은 ‘예술적’이다. 매니의 정신병적인 무관심이 어떻게 로즈로 하여금 유죄라는 망상에 빠지도록 몰아대는가? 로즈가 (아마도 유일하게?) 매니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에서이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이 죄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죠?...”(278쪽의 스틸사진 참조) 로즈는 매니에게 빗을 집어던지고, 그에게서 튕겨나온 빗은 거울을 때리면서 금이 가게 한다.”(쇠빗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거울에는 섬뜩하게 왜곡된 매니의 얼굴 이미지가 나타나는데(280쪽 스틸사진), “그의 완벽한 아버지 이미지의 이면, 즉 외설적인 미치광이(‘광인’)의 균열된 우스꽝스런 얼굴”(279쪽)에 대한 응시는 매니의 것도, 로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테이블 램프’의 것이며, 로즈는 그 응시를 포기하는 대가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실질적인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매니는 로즈의 분노에 대해서 다시 ‘결백한 표정’을 지으며 다독거리려고 하고, 로즈는 체념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나한테 정말 뭔가 문제가 있어요… 죄는 나한테 있어요.” 국역본에서는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혼수상태에 빠져든다”라고 했는데, ‘혼수상태’는 정확한 번역이 아닐 듯싶다(지금 쓰러진 것도 아니니까). 이 ‘체념’과 ‘혼수상태’의 러시아어 번역은 ‘냉정’과 ‘자기비하’이다.

로즈는 남편의 혐오스러운 캐리커처, 조각난 얼굴 이미지를 견뎌낼 수 없으며, 그것을 “상징적 질서 속에 통합할 수 없”다(281쪽). 그리고 바로 그것이 ‘정신병’이다. 라캉에 따를 때, “(정신병에서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밝혀지지 않는 것이 실재, 즉 주체 바깥의 영역 속에서, 예를 들면 환각으로 나타난다.”(여기서 ‘환각’은 아마도 hallucination의 번역이며, ‘망상’과 동의어이다.) 이 문장의 러시아어 번역은 더 압축적인데, “상징계에서 배제된 모든 것은 실재 속에서(혹은 실재로서) 되돌아 온다. 가령 환각의 형태로.” 그러니까, 주의할 것은 우리말 번역에서 ‘실재=주체’가 아니라 ‘실재=주체 바깥의 영역’이라는 점이다(원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반복되는바, “그의 아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상황의 압박이 아니라 사실상 남편의 실제 이미지인 그 외설적인 캐리커처에 대한 시선이다.” 여기서 그 ‘시선’은 ‘그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남편의 외설적인 실제 이미지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살레츨의 결론은 “로즈의 정신병은 궁극적으로 매니의 정신병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마저 들어보자. 번역도 잘 읽힌다. “죄의식을 스스로 덮어쓰고 미쳐버림으로써 그녀는 매니가 정신병적 무관심의 태도를 보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나쁜 여자의 역할, 죄의식의 부담을 지는 역할을 떠맡았기 때문에 그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운 올바른 남자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적인’ 미친 여자의 역할을 취하기 때문에 그의 광기는 정상성이라는 공적인 가면을 계속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히치콕과 매니 역의 헨리 폰다.

결론 이후의 한 문단은 유쾌한 보너스이다. 여기서 살레클은 사회주의 시기 소련의 농담 하나를 인용하고 있는데, ‘라디오 에레반(Radio Erevan)’은 사람 이름이 아니고, 라디오 방송사 이름이다. 러시아어본에는 ‘아르메니아 라디오’라고 돼 있는 걸로 봐서, 아르메니아의 한 라디오방송사인 듯하다. “라비노비치가 모스크바에서 복권 당첨으로 차를 탔다는 게 사실입니까?”란 물음에, “원칙적으론 그랬지만, 그건 차가 아니라 자전거였다는군요. 게다가 그는 그걸 타내지도 못했어요. 도둑맞았거든요.” 어디선가 한번 본 농담인데, 영어본에는 상당히 압축돼 있는 거 같다. 사실 이런 식의 버전이야 계속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소련의 농담이었으니까 러시아어본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도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이게 축약되지 않은 원래의 농담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라비노비치가 복권에 당첨되어 ‘볼가’(러시아산 중형차. 우리라면 ‘그랜저’)를 탔다는 게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맞긴 맞아요, 하지만 라비노비치가 아니라 이바노프구요, 복권이 아니라 도박이고, 볼가가 아니라 3루블이고, 딴 게 아니라, 잃은 거고…”

해서, <누명 쓴 사나이>가 “카프카적인 메커니즘(‘기제’)의 수레바퀴라는 함정에 빠진, 그래서 실수로 피소되지만(‘피소되며’), 그의 확고한 도덕 덕택에 사건 전체를 극복하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영웅’)에 관한 영화”라는 해석에 대해서, “반면 그의 아내는 성격상의 허약함 때문에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해석에 대해서”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여’ 살레츨은 이렇게 말한다. “맞긴 맞아요, 하지만, 그 남자는 처음부터 미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거구요, 그의 아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런 상황의 압박이 아니라, 남편의 실제 이미지, 그 외설적인 캐리커처였답니다…” 그렇다면, 글의 제목 또한 ‘맞는 여자와 틀린 남자’로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06.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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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2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응시를 포기한 또는 포기된 사람이 실재라면 결국 미쳐야만 감당이 되는 아니면 미치지 않는다면 감당이 되지 않는게 현 시대의 인간적인 삶인가요. 야만의 시대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 답답한 현실이네요.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존재론적 죄의식’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 말하는 존재는 왜 죄의식을 당위적으로 가져야만 하나요?

로쟈 2006-05-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뒤늦게 댓글을 답니다(어려운 문제라 좀 생각해본다는 것이 흐지부지됐던 모양이네요). 그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된 것인데, 그때의 죄의식은 제가 보기에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입니다.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상징적 거세'가 '존재론적 죄의식'과 짝이 되는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