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은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터라 주말과 휴일이면 다중인격 비슷한 장애를 겪는다(그런 장애가 있긴 한가?). 다중강의 장애? 셰익스피어를 읽다가 스탕달을 읽고 홍길동전 자료를 보다가 다시 러시아문화사를 뒤적거리는 식이다. 그러다 또 새로 나온 책들에도 눈길을 주어야 하니 머릿속도 온통 뒤죽박죽인 책상을 닮아간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잠시 펴든 책이 <황석영의 밥도둑>(교유서가, 2016). 먹는 얘기로 시작해서 끝나는 음식 순례기이니 만큼 잡념이 없어서 좋다. 작가도 새로 붙인 개정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책에는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디자인하우스, 2001)의 최신 개정판이라고 돼 있는데,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향연, 2007)이란 개정판도 나온 적이 있어서 '최신'이 덧붙은 듯싶다. 원래는 90년대 말에 일간지에 연재한 이야기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맛있게 먹는 한 끼 식사가 만들어내는 행복감이야말로 삶의 원천이며, 진정한 밥도둑은 역시 약간의 모자람과, 누군가와 함게 나눠먹는 맛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제일 먼저 펴본 곳은, 혹은 따라가본 곳은 '카프카의 음울한 눈빛이 생각나는 밤에' 꼭지인데, 아무래도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라 '합석'이 가능할까 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북아프리카의 쿠스쿠스에서 파리 외곽 차이나타운의 돼지갈비에 대한 회상을 거쳐서 프라하에서 먹은 수프를 작가는 떠올린다.  

"체코가 변하고 나서 어두운 프라하 역에서 내려 요기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작은 술집에서 빵과 먹던 뜨거운 수프 생각이 난다. 더구나 밖에는 겨울비가 축축이 내리고 카프카의 음울하게 큰 눈이 생각나는 그런 밤이었다. 구야시 수프가 그것이다. 원래는 헝가리 음식이지만 겨울철에는 서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러시안 수프와 함께 인기가 있다. 소의 뼈를 우려내어 양파, 월계수입, 마늘로 맛을 내고 고기, 감자, 당근, 셀러리, 파프리카와 토마토를 넣어 걸쭉하고 뭉근하게 끓인 국이다."(183쪽)

그런 묘사를 읽으니 나도 바로 떠올리게 된다. 여름날 저녁 프라하에서 먹던 뜨거운 수프를. 그런데 내가 먹은 건 '굴라시'여서 찾아보니 헝가리에서는 '구야시'라고 부르고, 체코에서는 '굴라시'라고 하는 음식이다. 헝가리 원산이라지만 체코에서 먹었다고 하면 굴라시를 먹은 것이겠다.  

 

 

수프라지만 빵과 같이 먹어야 더 좋을 듯. 원래 음식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지라 수프 애기가 나온 김에 작가는 '러시안 수프'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시 베를린의 장벽 넘어 동독 쪽 알렉산더 광장 건너편에 있던 오래된 러시안 레스토랑이 생각난다. 보르시치 수프는 뉴욕에서도 싸고 맛있는 유명한 집이 있었는데, 속풀이 서양 해장국으로는 으뜸이다. 따뜻한 수프 위에 스메타나라는 사워크림을 살찍 얹어주는 게 특징이다."(183-184쪽)

 

굴라시(구야시)나 보르시치나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 음식이고, 나도 맛있게 먹던 기억이 있다. 수프니까 거의 기본 음식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 순전히 이런 음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다시금 프라하나 모스크바를 찾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가까운 데 이런 식당이 생긴다면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

 

16.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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