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교보에 들렀다가 미술사 책 한 권과 함께 구한 책이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이다. 얼마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책인데, 책에 대한 흥미와 일말의 책임감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육체'와 관련한 독서계획을 급조했는데(급조한 제목은 '낯선 육체를 찾아서'),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문학과지성사, 2000),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 2003)이 가장 먼저 꼽은 책들이다.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낯선 육체>는 원서를 구하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원서를 갖고 있던 책들이다). 버틀러는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도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의 재비판을 더불어 읽어볼 수도 있겠다. 다른 책들은 고려중이다.    

 

 

 

 

한데,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육체'보다도 먼저 일부 눈에 띄는 오역들. 대개 책을 구하게 되면, 서문과 목차, 그리고 색인 등을 들춰보는데, <낯선 육체>의 색인에는 '유어세너, 마거리트'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다. '낯선' 이름이지만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면 'Marguerite Yourcenar', 즉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이다. 국내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세계사, 1995)으로 일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명망 높은 작가이고 이미 여러 권의 소설들이 번역돼 있는데, '유어세너'라는 건 좀 무례한 호명이다. 전문 번역가들이 우리말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전문가들'보다 나은 편이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종종 실수를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낯선 육체>의 원서를 구할 때까지(이번주 안으로 구해질 것이다) 먼저 <육체와 예술>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좀 실망스럽다. 저자인 'Peter Brooks'를 '피터 부룩스'라고 옮긴 것부터가 의아한 대목인데(이게 얼마나 갈망질팡이냐면, 겉표지/속표지에는 '룩스'이고 본문과 서지정보란에는 '룩스'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었다는 얘기이다. 하기야 발음상으로야 대수롭지 않은 차이이지만), 이런 경우 검색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이런 무신경이 오직 저자명의 표기에만 국한될 리는 만무하다.  

<육체와 예술>의 원제는 'Body Work'이고, 부제는 '근대 서사에서의 욕망의 대상들'이다. 국역본 뒷표지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 육체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왜 육체를 다루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육체와 의미, 육체의(에 의한) 글쓰기를 탐구하고 있다." 저자인 브룩스는 예일대학의 불문과 교수로서 <플롯을 위한 독서(Reading for the Plot)>이란 대표적인 저작을 갖고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권택영 교수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동서문학사, 1991; 문예출판사, 1995)를 참조할 수 있다. '육체'와 관련한 주제로는 권택영, <몸과 미학>(경희대출판부, 2004)도 출간돼 있다).

그런데, 국역본의 표지에는 유감스럽게도(?) 원서 표지에 실린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의 그림 <롤라(Rolla)>(위의 그림)의 상당 1/5 정도만이 사용되고 있다. 나는 첫눈에 번역 또한 그렇게 '에누리'한 수준은 아닐까 우려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첫페이지의 번역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지 못했다. 첫 페이지라는 건 1장 '서사물과 육체'가 시작되는 21쪽을 말하는데, 가령 이런 대목을 읽어보자.

"상상적 문학에 있어 육체는 항상 매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육체는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상하는 중간과정이며, 물질성을 넘어서는 의미의 생성 작업에 있어 타자로서 작용한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 생성의 매개가 되고 하며(예를 들어, 글을 쓰는 손 같은 경우), 심지어는 작업의 장소로도 사용된다."

이 대목의 원문: "In imaginative literature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 which,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 takes a stand outside materiality -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this living hand that writes), perhaps even its place of inscription."(1쪽)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본 인상으로 판단하건대, 국역본은 대개 '의역'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문장에서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을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사하는 중간과정'이라고 옮기는 것도 그런 사례인데, '중간과정'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임의적'인 첨가어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body'가 아니라 'signifying project'이다. 문장의 요체만 간추리자면,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의미화 작업'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 즉, 육체는 의미화작업과는 무관한 타자이면서(의미화작업은 주로 '대뇌'에서 담당한다) 한편으론 그 수단이라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손(this living hand that writes)'이 바로 그 '수단'이다. 그리고 때로 육체는 심지어 '그 기입의 장소(its place of inscription)'가 되기도 한다. 육체에 뭔가를 쓰거나 새겨넣는 경우도 있으니까. 가령,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필로우북>(1995)이 좋은 예가 되겠다.

한국영화로는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에서도 '육체에 씌어지는 글자들'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았던 원미경은 80년대 초중반 여러 사극영화들에서 연기력 좋은 '육체파' 배우로 각광받았었다(<변강쇠>, <사노>, <물레야, 물레야> 등이 그녀의 주연작들이다). 이야기가 언제 또 '육체파'로 새버렸나? 

어쨌든 나의 요점은 <육체와 예술>의 번역이 '예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임의적인 의역/오역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의해 읽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에 '역자 후기'가 빠져 있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인데, 번역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알길이 없기에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육체와 예술>에 대한 읽기는 한동안 더 진행될 것이며 독후감은 나중에 따로 올리기로 한다.

06. 01. 31.

P.S. <의미를 체현하고 있는 육체>도 읽을 만한 번역이지만,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라캉의 '실재(계)'를 '실제계'라고 옮긴 것 등의 대표적이다). 서문에서 일인칭 주어 '나'를 '본인'이라고 옮기는 경우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이걸 오역이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공통감각'의 부재를 탓할 밖에. 이 책에 대해서도 브리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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