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1장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컨템퍼러리'를 정리하는 게 이 글의 목표이다(며칠 뜸을 들이고 있다가 다시 달려들었는데, 머리가 좀 무거운지라 잘 진행될는지는 의문이다). 단토의 책은 출판사 미술문화의 '동시대 미학' 1권으로 나온 책인데, 뒷갈피에 씌인 기획의 변을 보면 "동시대 미학 시리즈는 먼저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단토의 주요 저서들을 통해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이해하고, 그 밖의 주요 미학자들의 저서들을 추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예술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하니까 단토의 저작들이 몇 권 더 소개될 듯하다. 기다려볼 만하다.

단토가 '미술의 종말'의 시점을 1964년 워홀의 '브릴로 상자' 이후로 잡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는 적은 대로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 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란 언제나 소급적인 성격을 갖는바, 실상 단토가 '미술의 종말'에 대해서 감을 잡고 치고 나오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미술비평가로 데뷔한 1984년부터이다. 그러니 그는 미술비평가로서 자신을 신고함과 동시에 '미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나선 것. 'The End of Art'란 논문을 Berel Lang이 편집한 책 'The Death of Art'(1984)에 실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예술의 종말에 다가가기(Approaching the End of Art)'를 한 박물관에서 강연하며, 이것은 그의 책 'The State of the Art'(1987)에 수록돼 출판된다(이 논문은 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이후 다시 10년쯤의 시간이 흐른 뒤 저자는 '예술의 종말' 혹은 '예술의 종말론' 이후에 대한 회고와 소회를 밝히고 있는 것이 이 글의 서두이다. 37쪽의 각주에서 자세히 보고하고 있는 것이지만, '미술의 종말'에 대한 아이디어를 단토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과 공유한다. 벨팅의 책 <미술사의 종말(The End of the History of Art)>(독어 1983, 영역 1987)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것이다: "대략 같은 시기에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미술의 종말에 관한 글들을 출간하였다."(37쪽) 

참고로, 벨팅은 독일 마인츠대학의 미술사 교수이며, 대표작으론 <유사성과 현존(Like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1984)이 있다. 단토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책인데(74쪽 등), 국역본은 독어본의 제목에 따라 <이미지와 제의: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라고 옮겼다.

  

 

 

 

<미술사의 종말>은 분량이 얇은 책인데(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책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의 갈피를 보니까 근간 예정인 도서이다. <미술사의 종말: 10년후의 결산>(가제). '경성대문화총서' 11권으로 예정돼 있는데, 쟌니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2003)에서부터 시작된 이 총서에는 현대문화와 미학관련의 유익한 도서들이 다수 포함돼 있고, 근간예정인 도서도 여럿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건 13권으로 예정돼 있는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가제)이다. 원제는 'Dreamworld and Catastophe'(MIT출판부, 2000)인데,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중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책이어서 작년에 구입해두었다. 한 러시아 철학자가 이 책과 관련하여 벅 모스와 나눈 대담 등을 포함하고 있는 대담집을 올해 번역할 계획도 갖고 있어서 <꿈의 세계와 파국>의 국역본 출간은 그만큼 기다려진다...

이런 식으로 진도를 뺀다면, 여름방학 때나 정리가 끝나겠다! 좀 서둘러야겠다. 상식적으로 말해두자면, 유행하는 종말론의 계보는 세 종류이다. 철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예술의 종말.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한마음사, 1992/1997)에 대해서는 군말이 필요 없겠다. 데리다의 <마르스크의 유령들>(한뜻, 1996; 절판된 이 책은 뜻없는 번역이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역본이 나올 것이다, 나와야 한다)에는 이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간단한 요약은 스튜어트 심의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이제이북스, 2002)을 참조. 그리고 철학의 종말은 하이데거의 테제이기도 한데, 전반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이 유용하다(한국어로 이보다 더 유려한 문체의 철학서를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그리고, 예술의 종말에 대해서라면, 가다머 등이 쓴 <예술의 종언 - 예술의 미래>(느티나무, 1993)가 있지만,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단토의 표현을 빌자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하다는, 즉 사변적이라는 얘기.

"(<근대성의 종말>에서) 바티모는 벨팅과 내가 다루고 있는 현상들을 우리 둘이 가지고 있는 관점보다 훨씬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서 바라다 본다. 즉 그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사회'가 제기하는 미학적 물음들에 대한 철학적 반응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일반의 죽음이라는 관점 하에서 예술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관점을 취하든간에 예술의 종말에 관한 그의 생각이 아직 '허공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38쪽)

반면에 "우리의 주장은,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가 여전히 명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실천복합체가 다른 실천복합체에게 어떻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벨팅과 나는 둘 다 예술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한 어떤 하나의 내러티브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었으며, 내가 보기에 종말에 도달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내러티브였기 때문이다.(...) 종말에 이른 것은 그 내러티브이지 그 내러티브의 주체는 아니다."(41-2쪽, 강조는 나의 것) 벨팅의 논지 역시 내러티브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점이 핵심이며, 단토에 예술종말론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내가 보기에 이 '내러티브 종말론'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기인한다. "예술은 끝이 없다"는 식의 반론이 그것이다(그 경우에 예술은 시작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냐? "이에 관해서 서둘러 해명해야겠다." 단토가 많은 영감을 빌어오고 있는 것은 역시나 헤겔이다(세계/역사는 자기인식에의 여정으로서의 교양소설로서 현상한다). 제2장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에서 앞질러 인용하자면,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나의 사유는 전적으로 헤겔주의적"(85쪽)이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것은 <헤겔미학>이다. 사소하지만, 원문에는 인용출처가 'Aesthetics,'로 돼 있고(38쪽), 국역본에는 'Aesthetics,'로 돼 있다(86쪽). 부분 인용하면:  

"우리가 예술작품의 내용과 표현수단, 그리고 이 양자가 서로 적합한지 부적합한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내면에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향유하는 것 외에도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고무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와서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예술에 관한 학문이 필요해졌다. 즉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도록 점차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을 예술로서 다시 회생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85-6쪽, 강조는 나의 것)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회생'은 '창조'로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87쪽에서는 '창조'라고 옮겨졌다: "그리하여 예술계의 구조가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을 다시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예술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술에 대한 이러한 역사철학적 성찰은 역사의 특정한 단계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건 워홀의 팝아트가 인상파나 입체파 미술보다 먼저 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그리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같은 팝아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게 된 시점도 20년 후인 1984년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단토에 의해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70쪽) 해로 규정된 그 해인데, 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음'이 실상은 컴템퍼러리, 혹은 탈역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제 회고적/소급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워홀 이후에 미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과연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  

"현재의 역사적 감수성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현재가 어떤 위대한 내러티브에 더이상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에 벨팅과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모던 미술과 컨템퍼러리 미술 사이의 예리한 차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19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차이를 정의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슬로건이나 로고도 없이, 어느 누구도 그것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시작하였다는 것이 컨템퍼러리의 특징이다."(43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미술사의 '거대 서사'가 종결된 이후에 남은 건 이 '종말'의 사후 충격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이상한 활력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아무런 지침도 운동도, 지향도 가능하지 않기에 비롯된다. "(모더니즘과 대조적으로)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은 그에 대항해서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하고도 전혀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미술을 정의하는 부분적인 특징은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과거의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 "오늘날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찬 장소로 여긴다. 미술관은 끊임없는 재배열을 위해 활용가능한 열린 곳으로서, 사실 미술관을, 특정한 테제를 환기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배열된 사물들의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데 쓰일 자료들의 저장고로 이용하는 하나의 예술형식이 지금 출현하고 있다."(44쪽)

문학의 경우에 견주자면, 작가들이 더 이상 현장이 아닌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스무살>, <7번국도> 같은 소설과 <꾿빠이, 이상>,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김연수는 이러한 종말의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의 종말 이후'의 작가들은 모두가 '유령작가'이거나 박민규 같은 '무규칙이종작가'들일 테니까. 조금 시야를 확장하면, 우리는 'Endgame'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만날 수 있다. 종말의 문학, 혹은 종말 이후의 문학.   

 

 

 

 

단토가 '박물관 미술'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설치작업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유희(THE PLAY OF THE UNMENTIONABLE, 1990 / INSTALLATION AU BROOKLYN MUSEUM, NEW YORK)'이다.

그렇다면, 미술(예술)은 어떤 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물론 길은 '막다른 골목'이어도 '뚫린 골목'이어도 모두 적당하다.)  단토는 세 가지 마디(에포크)에 의한 네 가지 단계를 설정한다. 이걸 내 식으로 정리하면, <예술 이전의 시대 -> 재현적 예술의 시대 - 자기의식적 예술의 시대(=모더니즘) - 예술 이후의 시대(=컨템퍼러리)>가 된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 중에서 단토가 가장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대목은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의 이행'이다. 모더니즘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종결되었는가를 철학적/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그의 '예술의 종말론'의 중핵인 것이다.

 

 

 

  

모더니즘 회회의 최고 이론가/비평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이다(<예술의 종말 이후>의 제4장이 그린버그에 할애돼 있지만, 여타의 장들에서도 그린버그는 저자에 의해서 끊임없이 참조된다).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토는 컨템퍼러리, 즉 탈역사 시대의 '그린버그'로 인정/평가받고자 하는 비평가적 욕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는 '그린버그에서 단토로'에 대응한다. 분량상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06. 01.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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