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은 8년전 여름에 쓴 것으로 '모스크바 통신'에 옮겨놓은 바 있지만, 이미지-버전으로 다시 옮겨놓는다. 지난번엔 분재했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보기엔 좀 불편했다. 막 서른에 진입할 무렵에 쓴 것이기에 내게 '서른의 추억'이란 의미를 갖는 글이기도 하다. 회고적인 정서에 잠시 물드는 건 이제 본격적으로 연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첨삭과 함께 군말을 더 집어넣도록 한다. 그럼, 어져, 시작해보도록 하자...

 

 

 

 

1. 어져 내 일이야... Oh, my business!.. (*그러니까, 나의 목소리는 황진이의, 여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여성처럼(like woman), 여성으로서(as woman) 말하고자 한다. 가능하며 불가능한.)

2. 먼저, ‘어져’에 대해서 말하여야 한다. ‘어져’가 전제로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적 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따로 놓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겹쳐 놓인다. ‘어져’는 이 겹쳐 놓임의 양태에 대한 평가적 발화의 한 가지이다. 두 음절의 이 발화가 집약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현재의 안타까운 회한이다. 이 회한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이 이 세계에 지불하고 있는 자신의 몸값이며, 자기 삶의 무게이다. 현재의 우리는 간혹 목욕탕에 가 체중계에 올라서듯이 과거의 한 시점을 불러내어 닦아세운다. 자백해라, 왜 그랬더냐?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음(=무지) 때문이었다(‘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 어리석음이 과거가 저지른 과오이다. 그리고 ‘어져’는 이렇듯 겹쳐 놓인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 발화이다.

다음, ‘내 일’이란 건 ‘어져’가 포괄하고 있는 사태를 모두 뭉뚱그리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렇게 뭉뚱그려진 사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일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제값의 ‘일’(=업)이 된다. 그것은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면서 내가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일이다(그래서 ‘내’ 일이다). 우리의 회한은 결코 우리의 어리석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러니 어이하랴, 결국 어리석게도 나는 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이것도 비즈니스라고? 빌어먹을!

 

 

 

 
3.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나는 중장의 ‘제 구태여’를 ‘제 구태여 가랴마는’이 도치된 것으로 읽는다(혹자는 ‘제 구태여 보내고’로 읽는다. *원래는 고어(古語) 표기로 인용했었는데, 여기서는 현대어 표기로 바꾸었다. 인터넷에 띄우면 곧잘 깨지기 때문에). ‘가랴마는’ 뒤에 (구태여) 덧말로 붙여진 ‘구태여’가 정치된 ‘제 구태여 가랴마는’의 ‘구태여’보다 효과적이다. 말의 기능면에서 그렇다. 여기서 ‘구태여’의 주체는 님이다. 즉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그냥 가게 내버려둔 나의 과오) 구태여 님이(=지가) 떠났겠는가(=그리고 뒤늦은 회한), 라는 것이 중장의 내용이다. 종장의 ‘보내고 그리는 정’은 이 과오-회한의 구도를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가 바로 서정(시)의 구도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순한 서정이라면 흔한 서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의 푸념을 조금 멋을 내어(‘나도 몰라 하노라’) 표현한 것. 나는 조금 더 복잡하게 읽고 싶다. 이른바 ‘복잡한 서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중장. 가는 걸 말린다고 해서 못 이기는 체 눌러앉는 작자를 님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님은 적어도 일류의 기녀(=황진이)라면 용납할 수 없을 님이다(품위가 떨어지는 님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님은 (부여잡고) 말렸더라도 결단코/구태여 떠나갔을 것이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며). 그리고 우리에겐 그리움의 몫만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님을 두고 짐짓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 구태여 떠났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의 전략이며 복잡한 서정의 결과이다.

어차피 떠나고 말 님을 이시라 하며 말리는 것은 성과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정나미 떨어뜨리는 일이며 자존심만 구기는 일이다(이류들은 이런 일에 구애 받지 않겠지만). 그러니 그냥 가게 내버려두는 것. 이 사소한 과오 덕분에 나는 잘난 자존심과 님 그리는 정을 모두 지켜낸다. 그래도 이만한 어리석음(=과오)이라면 뒤집어쓰고 남을 만하지 않을까, 라는 계산이 바로 복잡한 서정이고 이중의 전략이다.


 

 

 

나는 이걸 달리 ‘유머’라고 부른다(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라고 부른다).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 나의 자존심은 님을 떠나가게 할 수도 없고 눌러 있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을 쓰라리거나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길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어져 내 일’이다. 이 시(조)에서 ‘내 일’은 ‘돌이킬 수도 있었던 과거’, 그래서 ‘달라질 수도 있었던 현재’라는 어떤 다른 삶의 (희박한) 가능성을 불행한 현실과 대질시킴으로써 완료된다. 이 일로 물론 구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는 지난주의 KAL기 사고를 떠올린다). 다만 어루만져줄 수 있을 따름. 그럼에도 이 어루만짐(=유머)은 소중한 것이며 오직 유한한 인간, 중간쯤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다. 희랍인 조르바의 경우.

 

 

 



4. 조르바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먹은 음식을 비계와 비료로 만드는 사람, 먹은 음식을 일과 유머에 쓰는 사람, 그리고 먹은 음식을 하느님에게 돌리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고 자신은 가운데 부류에 속한다고 말한다. “저는 셋 가운데 가장 흉측한 녀석은 아닙니다. 주인님, 그렇다고 가장 훌륭한 축에도 못 끼고 그저 어느 중간쯤에나 끼겠지요. 내가 먹은 음식은 일이 되고 좋은 유머가 된다는 거죠. 결국 그만하면 과히 나쁠 건 없어요!”

5. 나쁠 건 없지만, 배는 고프다. 한두 달 전에 문득 ‘어져 내 일이야’란 시구가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는 이것이 새 시집의 머리에 오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그리고 이렇게 몇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내가 호감을 가진 것은 이 시구의 품위이다. 따지고 보면, ‘아이고 내 팔자야’란 뜻에서 멀지 않지만 ‘어져 내 일이야’에는 그런 팔자를 관조하는 여유가 있다. 그런 여유를 나는 ‘품위’라고 부른다. 품위(品位)에서 품(品)자는 입구(口)자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 바, 품위란 세 식구(혹은 세 여자)를 먹여 살릴 만큼 자신을 세운 사람의 처지를 이른다(*나는 현재 세 식구의 가장이지만, 먹여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여유로운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그래서 조금 쓰라리다). 다만 그런 불운한 처지를 남의 일인 양 지껄일 수 있는 사소한 여유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분명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었다!

 

 

 



6.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다. 왜냐하면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나는 <팡세>의 이 단장을 ‘파스칼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7. 그러니 나를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나는 내가 비참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너는 물방개야, 아주 형편없는 자식이지!”(아, 나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요새 읽은 동료 위인전들. (a)“나는 여러 번 연기를 그만두려 했다. 내 안에는 정말 연기를 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모든 일을 경멸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나는 왜 말론 브랜도가 연기를 그만뒀는지 이해가 간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항상 내가 다른 누군가, 무엇이기를 바란다. 왜 그저 재미없고 뚱뚱하고 늙은 놈이면 안되는 거지?”(게리 올드만) (b)“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려 하지 않았으며 나도 아내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춥고, 난 혼자다. 삶 그 자체는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았다. 난 바라는 것이 많은 이기적이고 멍청하며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이다. 내 운명은 내게 당연하다. 가난은 증오스럽고 광기는 굳건하며 결국 난 끝장이다. 난 끝장이다.”(줄 파스킨)


 

 

 

8. 나의 경력.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어쩌다가 내가(그리고 우리가)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10년 후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이런 걸 읽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참고로, 이런 ‘장난의 대가(大家)’에 칸트가 있다.) 나는 더 울지 않았다. 대신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시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이란 말을 내가 했던가?).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카뮈) 같은 건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런 멋있는 시는 쓰지 못하고,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몇 권의 시집을 자비로 냈다. 한두 사람이 재미있어 했고, 많은 사람이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다, 진실 혹은 냉담!(*마돈나의 자전적 다큐필름의 제목이 <진실 혹은 대담>이었다. 어젯밤 이곳 MTV에 마돈나 특집이 방송됐다). 바로 그것이 세상이 유지되는 원리이다. 이렇듯 너무 많은 걸 알았는데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다(아으, 냉담이여!). 삶은 행복을 위해서는 너무 길다(행복은 지레 지쳐버린다).



 

 

 

9. 아침마다 일어나고 (한)숨을 쉬고 집을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온다. 많은 책을 사고 많은 영화를 본다(그렇다고 독서광이나 영화광은 아니다). 그리고 느리게 지나가는 삶의 시간을 본다. 이런 것이 변함없는 나의 현실이고 나의 삶이다. 아니 나의 현실-이미지이고, 삶-이미지이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이미지일 뿐이지 현실이나 삶 자체는 아니다. 현실이나 삶의 리얼리티는 분명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n차원(고차원)적인 어떤 것이어서 우리의 개념적 사유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다. 개념적 사유, 즉 우리의 인식이나 이해라는 것은 n차원적(이론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유력한 n의 값은 10이나 26이다) 리얼리티를 3차원적 리얼리티로 변형하고 조작하는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통 크기의 물체가 3차원에서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가 유일한 현실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아홉 가지건 열두 가지건 우리 이성의 인식범주가 동원된다. 이것이 내가 가진 인식론 그림이다(인식론에 있어서 나는 대략 칸트주의자이다).

이 그림에 의하면,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짜맞추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실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생산한다(나는 현실에 대한 일방적인 재현론이나 구성론에 반대한다). 여기서 현실-재현과 현실-생산은 단일한 존재론적 사태에 대한 기술로서 모순 없이 양립한다. 이들은 동의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침마다 일어나고 (한)숨을 쉬고 집을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나’는 내가 재현하는 나이면서 내가 생산하는 나이다. n차원적인 나는 거기에 없다. 나-이미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를 대신하여 내 일을 말하고, 파스칼의 ‘이상한 변증법’을 말하고, 나의 경력을 말하고, 또 당신에게 말을 건다. 우리들은 모두 다 아주 외로운 존재들이라고.

Christopher Doyle

10. 난 사람들은 모두가 외롭고,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영화를 무슨 예술 같은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사람들과의 대화, 일종의 연애편지 같은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안녕, 잘 있었니? 난 이렇게 지내고 있어”라고 말하기 위해 거는 전화 같은 것 말이다. 영화는 그런 것이다.(두가풍)(*두가풍은 왕가위의 모든 영화를 찍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중국 이름이다.)

11. 시집을 만드는 일은 영화를 편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러시-필름 속에서 필요한 장면을 끌어내 이렇게 저렇게 배열해 보는 것.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Le Pas Suspendu de la Cigogne)은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1991년에 발표한 영화(나는 보지 못했다)의 제목이다. 이 제목에 처음 시선이 닿았을 때 느꼈던 가벼운 흥분을 나는 기억한다. 이걸 새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건 작년 가을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선 시쓰기에 모든 걸 집중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나는 형편없는 자식이다). 지난 봄에 겨우 입막음 정도의 것을 썼다. 어떤 거냐고?

장대비가 내린 갈대밭에 먹물 같은 발자국이 찍힌다
버려진 빈 병 속에 모인 몇 알갱이 흙이 애써 기억을 더듬을 무렵
개굴치 한 마리 툭 뒷발질하며 물속으로 자맥질한다
너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모하였던가
뒤따르던 황새의 걸음이 문득 멈추어진다

어느새 먹구름은 저만치 먼데를 지나가고 있다


이건 아주 단순한 시이다. 조금 더 복잡하게 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들여다보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싶다(*그런 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에 내 인생을 걸지 않았으므로, 시로부터 이런 ‘박대’를 받는 건 당연하다). 어쩌겠는가. 이런 시집을 만드는 일의 바보스러움?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을 찍던 얘기를 들어보자.



12.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바보스런 일인가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아파트에 사는 소년(=토멕)과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여자(=막다)의 이야기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찍으려 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아파트 두 층(소년과 여자에게 하나씩)과 계단 일부를 빌렸다. 돈이 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자는 게 우리의 의도요 목표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영화를 찍는 동안 장소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바꿔야 했고, 그 결과 간신히 두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토멕과 막다는 한두 번 거리나 우체국에 나갈 뿐 다른 장면은 거의 없었다. 열일곱 군데의 촬영지 중 하나는(막다의 집 장면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2,30킬로 떨어진 조립식 빌라였는데, 상상할 수 있는 나쁜 점이란 모두 갖춘 건물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벽돌 하나를 가져다 휑한 벌판에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 빌라가 우리가 로케 때 촬영한 창 모양과 같은 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막다의 집 세트를 설치했다. 따라서 막다의 집은 한 블록 건너가 아니고 바르샤바에서 30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2층짜리 빌라였다. 거기다 토멕은 막다보다 한두 층 높은 곳에 사는 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빌라를 토멕이 바라보는 것처럼 찍자면 촬영팀이 올라갈 수 있는 탑이 필요했다. 작은 건물이었으므로 우리가 가진 롱렌즈로 그것을 토멕이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찍는 데는 2층짜리 탑이면 충분했다. 밤 장면이었고 잡음이 없어야 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 밤 10시경 도착해 탑 위로 기어오르곤 했다. 다른 스텝들은 제작사가 근처에 빌려둔 집으로 가 잠을 자거나 포르노 비디오를 보았고 나와 비텍(조명감독)은 동이 틀 때까지 한 쌍의 건달처럼 가설탑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 해는 7시나 되야 뜨는데 기온은 영도 이하로 떨어졌다. 탑과 빌라의 거리가 6, 70미터 가량 되었으므로 세트의 자폴롭스카(=막다)와는 마이크로 교신해야 했다. 내가 마이크를 들고, 빌라 안의 자폴롭스카는 스피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매일 밤, 추위 속에 홀로 남아 있었다(물론 내 조수와 촬영감독의 조수도 있었지만).

추운 밤 한적한 교외에서 창 하나는 휘황하게 불을 밝혀 놓고, 웬 구조물 위에는 두 바보가 앉아 하나는 마이크를 쥐고 ‘왼쪽 다리 위로! 다리 아래로! 테이블로 다가가! 계속! 이제 카드를 집어!’하고 외쳐대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동시녹음이었기 때문에 진짜 촬영할 땐 소리지르지 않았지만. 식사를 하거나, 하느라고 그 자리를 잠시 떠나 있으면 그 상황의 어처구니없음이 더 절실해졌다. 거대한 빌딩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작은 빌라, 있는 대로 조명이 밝혀진 창(우리가 사용한 망원렌즈는 구경이 낮아서 조명이 많이 필요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밤에, 우스꽝스런 구조물 위에 앉아 마이크로 ‘다리 들어!’하고 외치는 나. 물론 마이크가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었으므로 그냥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하여간 그 한주간 내내 나는 내 직업의 바보스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13. 작년 12월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시집 한 권이 날아왔다. 이바나 그루베로바가 자신이 번역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내온 것이었다(이 번역에 나는 몇 마디 조언을 한 바 있다). 한 대목을 들어볼까(*체코어 번역은 생략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사실 ‘차마 떨치고’ 떠나버린 님을 두고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한편 어수룩하며 바보스런 일이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정념의 자기운동(=사랑의 노래)이 ‘나’라는 장소에서 다 소진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운동이란 것은 그것 자체의 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현실적인 사태의 종결에 따라 마감되거나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장미의 ‘이름’만 남아 있는 사태가 얼마간 지속되는 것이다. 이 비어 있음의 사태(=님의 침묵)를 휩싸고 도는 사랑노래가 바로 어루만짐의 손길이다. 이 손길이 자신의 어이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은 일종의 손장난(=유머)으로 변모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 이런 건 어떤가.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14.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만해는 시집의 ‘군말’에 적어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기룬’(‘그리운’의 충청도 방언)이란 말이다. 그것의 기본형인 ‘기루다’는 내게 ‘그리다’와 ‘기르다’의 뜻을 합쳐 놓은 말로 들린다(우리말 사전에 ‘기루다’가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님은 우리가 그리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기르는 대상이다. 님을 ‘기루는’ 행위 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인과론적 시간질서는 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시간축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접히면서 이 과거-미래는 동일한 시간적 지평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시간 경험이 아닐까? 왜 아닐 건가. 바로 님에 들린 시간일 텐데 말이다.


 

 

 

 15. 들리는 시간이 있으면 들렸다 놓이는 시간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 좋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하늘이 정말로 그가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이라면 굳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할까 싶지만, 이런 정도의 믿음(이 또한 유머인데)은 우리에게 허락되어 마땅하다. 무얼 어쩌자는 건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한국 근대 시인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거명하고 있는 시인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백석과 윤동주, 두 사람이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오는바, 나는 그 시가 백석의 영향하에 씌어진 거라고 생각하다. 그런 의미에서, <별 헤는 밤>은 가장 백석다운(=윤동주답지 않은) 시이기도 하다. 백석론과 윤동주론을 쓰는 일은 나의 오랜 숙제이다).

16. 다들 자기 할 일은 한다. 하고 본다. (a)“시지프의 신화에 있어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 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b)“말벌(=나나니벌) 암컷은 먹이를 쏘아서 마취시킨 후 집으로 끌고 온다. 그런 다음 그것을 밖에 놓아둔 채,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먹이를 끌고 들어가려고 다시 나타난다. 땅에 구멍을 파서 만든 집 속에 말벌이 들어가 있는 동안에, 실험자는 먹이를 말벌이 놓아둔 곳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멀리 떼어놓는다. 말벌이 다시 나타나면 먹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재빨리 다시 찾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끌고 와서 자기 집 입구에 다시 갖다 놓는다. 말벌이 집안을 조사한 지 몇 초밖에는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벌의 행동 프로그램은 초기 단계로 다시 넘어간다. 말벌은 먹이를 굴 입구에 다시 놔두고 집안을 한번 더 조사한다. 실험자는 싫증이 나서 그만둘 때까지 이 짓을 40번이나 되풀이했다. 말벌은 이미 40번이나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로 다시 돌아가 자동세탁기처럼 행동했다.”

이 두 가지 사례의 차이? 그것은 프로그램, 즉 자기가 하는 일(=자기 삶)의 바보스러움을 아느냐, 모르느냐 (의식하느냐, 못하느냐) 이다. 비록 하는 일은 같지만, 거기에서 시지프와 나나니벌의 운명은 갈라진다.

17. “사랑하고 소유하는 것, 정복하고 소진하는 것, 이것이 곧 그의 인식하는 방법이다(성서에서는 사랑의 행위를 ‘인식하다(connaitre)’라고 부르고 있는데, 거기에서 자주 보이는 이 말은 뜻이 깊다).” 돈 후안주의에 대해 카뮈가 적고 있는 말이다(*모스크바에 와서 나는 카뮈 작품집을 두 권이나 샀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세 우리말에서도 ‘사랑하다’는 ‘사랑하다’와 ‘생각하다’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뜻이 결별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 어쨌든 이 결별의 결과, 우리 주변엔 사랑하는 만큼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는 새로운 ‘사랑’의 유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삶,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직접적인 행위와 그걸 바라보는 시선, 즉 인식행위의 종합에 의해 완성된다. 이때의 종합은 자신의 행위의 준칙을 보편적 입법의 원리(이것이 바로 책임이다!)로 만드는 것이면서, 이 입법의 원리를 자신의 삶 속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만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만인에 대한 사랑을 한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고), 한 개체의 삶을 살면서 인류 전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인류 전체의 삶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해서 삶은, 너무도 가벼운 존재인 우리에게 너무도 무겁다! 우리는 저마다 전 인류를 데리고 다니는 것(*지젝이라면, 헤겔의 말을 빌어,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8. 사실 우리의 몸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의 몸은 어제오늘 뚝딱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진화과정에서의 적응(=협력과 사투)의 결과이다. 우리의 개체발생은 바로 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인바, 우리의 개인사와 가족사는 전체 인류사(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사)와 별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전체로서의 부분, 부분으로서의 전체인 것이기에. 그래서 “우주에 관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아인슈타인)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정은 이렇다. “우주가 이해될 수 있는 이유는 우주가 바로 우리 자신인 인간 존재에 의해서 구성되고, 우리가 그런 우주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작업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이해할 수 있다.”(*이걸 ‘인간학적 원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즉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구성하는 우주의 자기인식이다(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책임은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19.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식과 이해는 개개 사물과 사건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행위이다. 즉 차이 속에서 어떤 반복을 보는 행위이며, 그래서 어떤 타입과 패턴을 파악하는 행위이다. 여기엔 동서양이 따로 없다. 동양의 주자학적 전통에서 공부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는데, 이때 ‘격물’은 사물을 격자 속에 놓고 파악하는 걸 뜻한다(패턴에 대한 앎이 바로 공부이다). 이 격자가 바로 서양철학적 전통에서의 기하학적 공간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 그림을 여기에 예시하겠다(D. 톰슨이 한 사각형 좌표격자에 한 종류의 물고기를 그리고 단순한 미분동형이라 불리는 변환을 수행함으로써 세 개의 다른 종류의 물고기를 얻어낸 것이다).(*이정우의 들뢰즈 강의록 중 한 권에도 그림이 인용돼 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하학적 이성이다. 기하학적 이성이란 자신의 삶이 유일한 삶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패턴)의 한 양상(=거품)에 불과하다는 걸 꿰뚫어보는 이성이다. 즉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카뮈는 이걸 ‘부조리’라 부른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반-기하학적 이성, 섬세한 정신이다(‘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의 이분법은 파스칼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진짜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개개의 물고기(혹은 물방개)의 물에 대한 현실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다. 즉 우리의 현실을 주무르는 손때 묻은 이성이다. 나는 이걸 달리 아줌마적 이성, 아줌마 정신이라고 부른다(아줌마들은 섬세한 걸 좋아한다).



20. 한 아줌마의 시적 발언 한 대목을 예로 들어보겠다(김상미의 <아줌마>).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이 시의 1행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줌마 나름의 (무시 못할) 내력이다. 이 내력은 기하학적 이성에서의 전체화된 부분, 부분화된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고 맞먹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행이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라는 건 뒤집어서 얘기하면, 아줌마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 이 자기-중심적 사고야말로 아줌마적 이성의 모토요, 아줌마 정신의 알토란 같은 핵이다. 이 억척 어멈의 이성(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이성’)은 삶의 현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물 밖에서 팔짱끼고 있는 제3자적 이성이 아니라, 물속에서 팔딱이고 있는 주관적 이성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멀거니 관조하지 않는다(‘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다). 악착같이 삶에 밀착하여 부대끼고 싸우며 이겨낸다. 그리하여 “육체적 편안함과 안락한 보금자리, 그리고 걱정 없이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가능성”(이런 것이 아줌마에겐 중요하다)을 확보한다. 아줌마는 동물적인 실존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줌마의 이러한 존재론에 비하면, 아줌마의 사회학은 별거 아니다(그런 사회학에 집중하고 있는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우리의 주목에 값하지 못한다). 이 아줌마들에게 E=mc2 같은 기하학적 인식은 오직 미학적, 장식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이건 결코 폄하의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아줌마’가 바로 우리 집 안에도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남성에게 있는 여성성은 ‘아니마’만이 아니다).


 

 

 

‘아줌마성’이란 무엇인가? “라파엘의 그림이 다 없어진다면 야단들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끼의 한 종류나 식물 한 가지가 없어지는 데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불균형한 휴머니즘이 현대문명의 이상한 점이다.”(레비-스트로스)라고 한 인류학자가 털어놓을 때,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 또 “언제나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내 낮은 목소리만을 듣고, 가슴만 뚫어져라 볼 뿐이다.”(제니퍼 틸리)라고 한 여배우가 털어놓을 때, 그녀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아줌마들은 돈을 좋아하고 또 음탕하다).

사실 이 아줌마성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생활 속의) 행복의 원천이긴 하다. 또 자기-중심주의와 가족-중심주의, 그리고 종족(민족)-중심주의, 자문화-중심주의에 아줌마성이 기여하는 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에의 편향이다. 무엇에의 편향(=편애)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기하학적 이성과 반-기하학적 이성의 균형과 조화에서 인간다움의 품위와 가치가 찾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죽으면서 동시에 인류 공통의 죽음을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수많은 파도 중의 하나처럼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일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간 존재론이다.

 


 

 

 

과연 그러한 인간 존재론이 현실적인 것이냐, 라는 아줌마들의 우악스런 반론이 바로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나는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삶의 양립가능성을 예시하는 걸로 답변을 대신하겠다. 저쪽 이디오피아 얘기이다. “이디오피아의 도르제족이 보기에, 표범은 기독교적 동물이라 교회의 금식 행위를 준수하는데, 이는 이디오피아에서 종교의 기본 척도에 해당하는 규율이다. 그렇다고 도르제인이 금식일인 수요일과 금요일에 다른 날에 비하여 자기집 가축 보호에 덜 신경 쓰지는 않는다. 표범이 금식한다는 것과 표범이 매일 식사한다는 것, 도르제 인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진실로 여긴다. ‘표범은 항상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그리고 ‘표범은 신앙적인 동물이다’는 것은 전통이 보장해주는 사실이다.”(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이 두 가지 진실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나는 이 사례가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 없는 종교’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의 탁월한 사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젝의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말하기로 하겠다). 이디오피아의 도르제족이 우리보다 특별히 우수한 종족이 아닌 이상(이디오피아가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그것은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즉 ‘나’란 존재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런 ‘나’가 이 세상에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이런 걸 배워야 한다.


 

 

 

21. 이른바 존재론 교육. 매일같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하는 것을 숙지시켜야 한다(제멋대로 키우면 안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러한 ‘있음’의 신비스러움에 눈을 뜨게 될 때(시라도 몇 자 적게 될 때), 그래서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비트겐슈타인)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직업교육을 시켜야 한다(사실, 나는 교육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의미론 교육. 우리의 젊은 철학자는 명철하게도 세계의 의미에 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 가치는 없다.”(그는 철학을 그만두었다.)

세계의 의미가 세계의 밖에 놓여 있다는 말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는 세계의 의미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이건 아주 당연하다). 이것 또한 숙지시켜야 한다.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물리(론)적 불가능성이 의미론적 불가능성을 필함한다(=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지구를 들어올리는 계산을 해준다(이것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주저 없이 몇 대 패준다).



22. 생각해보자. 받침점을 갖다 놓고 우리가 지구를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길이의 지렛대가 필요한지. 지구의 질량은 6.0×10*24kg이다. 이걸 (무거우니까) 10*-3m(1mm)만 들어올리도록 해보자. 우리의 질량을 편의상 10*2(100)kg으로 한다면, 지레의 원리에 따라 (6.0×10*24)×(10*-3)=(10*2)×(x)의 등식을 만족시키는 x의 값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렛대의 길이가 된다. 계산해보면, x=6.0×10*19m(=6.0×10*16km)이다. 이건 얼마만한 거리일까? 초속 30만(3.0×10*5)km의 빛이 1년간 가는 거리인 1광년을 대략 9.46×10*12km라고 하면, 대략 6.3×10*3광년, 즉 6,300광년 정도의 거리이다. 어쨌든 이만한 길이의 작대기를 지렛대로 구했다고 쳐도(어디서 구했는가를 묻지 말아 달라), 지렛대 저쪽 끄트머리까지 가는데 6,300광년이 걸린다는 얘기다(*지난번 계산이 틀려서, 이번에 다시 했다. 물론 이번에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광속으로 간다면 모를까, 현재로선 불가능하므로 일단 음속(≒초속 330m)의 한 1,000배, 즉 대략적으로 1.04×10*10km/년 정도까지 날아간다고 해보자. 그럼 6,300광년의 거리는 ‘인간적인 거리’로 대략 5.73×10*6년 정도가 된다. 573만 년(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건 200만년쯤 전이다). (편의상)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대략 우리의 19만 세대 후손이 비로소 지렛대를 잡게 된다(이걸 가능하다고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까). 해서, 적어도 광속여행이 가능하지 않은 이상(우리 문명에서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우리가 이 지구를 1밀리라도 들어올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걸 이론적인 산술에 기대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중력이 끌어당기는 만큼 우리의 떨어지는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다(*만유인력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머이지 진리 주장이 아니다. 유머는 이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견디는 방식이지 이 세계를 인식하고 기술하는 방식이 아니다(*’세계-내-존재’의 아렌트 버전은 ‘지구-내-존재’이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구를 들어올릴 수 없는 이상,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 닥치고 춤이나 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uber muss man schweigen;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비트겐슈타인)

23. 그런데, 사실 지구보다도 더 들어올리기 힘든 것이 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이다! 대략 40-100kg 정도 되는 질량을 지레로 들어올리는 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자기 자신이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이다(이건 손뼘으로 자신의 키를 재는 것과는 정말 다른 문제다). 즉 한 사람이 지렛대의 양쪽 끝에 동시에 올라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또한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유일한 가능성은 양자 효과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존재확률로서의 두 ‘나’가 지렛대의 양쪽에 동시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두 존재확률의 합은 당연히 100%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희박하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코끼리가 타자기를 제멋대로 두드려서 <파우스트>나 <정신현상학>을 쳐낼 확률이 이에 견줄 만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다(우리는 자신에게 무의미한 존재이다). ‘나’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뿐이다(빌어먹을!).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생물학적 요구에서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필요에서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리가 ‘의미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동물이란 걸 전제한다면 말이다.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S. 베이유를 따를 때)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아,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의 신은 또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24. 육신은 떠나지만, 사랑은 아니다
육신은 재가 되겠지, 하지만 재가 되어서도 느끼리라
먼지가 되겠지, 하지만 사랑에 빠진 먼지가 되리라
- 케베도,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사랑>

25. 물론 이제까지 내가 말한 세계의 의미와 자신의 의미란 건 기하학적 이성에 의해 따져본 것이다. 즉 기하학적 의미론(혹은 의미의 기하학)이다. 이 의미론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은 ‘나’의 생태학이다. 우리는 결코 순수 기하학적 공간에 존재하는 순수 사유체가 아니다. 그건 이론적 가정일 뿐이다(이론물리학적 모델). 현실 속에서 우리는 ‘먼지 일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먼지’로서 존재한다. 즉 사랑에 빠지건, 욕조에 빠지건 하여간에 어딘가에 빠져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먼지인 것이다(생물지리학적 모델). 반-기하학적 이성, 즉 아줌마적 이성은 바로 이 ‘빠짐’에 기초하여 모든 의미를 주관한다. 바로 이러한 국지적 구체적 시-공간에서의 의미론이 생태학적 의미론(혹은 의미의 생태학)이다. 이제 자리를 서서히 정리해야 할 시간을 맞이하여, 이 생태학적 의미론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 기술해보기로 한다.

26. 내가 존재하는 공간은 세계의 아름다운 영혼(SeOUL) 한 구석이다. 나는 동생과 전세방에서 산다(나는 이사하는 게 귀찮아서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직업도 없고 따라서 대단한 벌이도 없다(그래도 직장인 평균의 빚이 있다). 매일같이 학교에 가고(이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도 학교이다), 일주일에 두세 편의 비디오를 보며 한번 정도 극장에 간다. 매주 5-10권 정도의 책을 산다. 공부도 간혹 한다(학생이니까). 한 달에 두어 번 술을 마시고(맥주 1-2병), 담배는 피지 않으며 바둑 이외의 잡기는 하지 않는다(*요즘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학교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만나자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리고 시를 쓴다. 전력으로 쓰진 않는다(돈벌이가 되지 않아서이다). 일주일에 한편 정도씩 몇 달 쓰다가 몇 달은 자칭 휴가이다. 지난 봄에는 두어 달만 쓰는 바람에 열두어 편을 쓰고 말았다. 아직 시쓰기에 모든 걸 투자할 만큼 잘 쓰진 못한다. 그렇다고 그만두어 버릴 만큼 못쓰는 것도 아니다(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은 우리말의 가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잘 쓰고 못 쓰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그러니 그냥 재미라고 해야겠지. 특별히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재미치고는 별로이지만. 그저 ‘빛 좋은 개살구’나 ‘굴뚝같은 마음’ 같은 흔한 우리말들이 건네주는 울림을 모른 체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우리말을 사랑하는바, 그것은 특별히 우리말이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잘 아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나를 길러준 말이기 때문이다(사람은 분수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쓰다 보니 10년이 되었고(반은 휴가였지만), 백여 편 이상의 시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렇게 시선집까지 묶는다(*이 글은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시집’의 서론이었다). 그동안 시집을 만드는 일은 ‘내가 무얼 어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면서 ‘내가 당신을 지겹게 하는 몇 안되는 일’이었다. 이걸 종합하자면, 어져 내 일이다. 이 일이 그래도 몇 사람에게는 사소한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이건 나의 욕심이다). *어떤 시들인가, 혹 궁금해할 사람들도 있을 듯하여 한 편만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빈 병 속의 시간>(한 지면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은 빈 병 속에 넣어둔다
시간은 시간의 과욕이며 연적(戀敵)이다
그리움이 막막할수록 부질없는 시간은 빈 병 속에서 묵직해지고
나는 어느덧 텅 빈 세상 하나를 거느리게 되었다
빈 병 속 보이지 않는 자갈이 깔리고 보이지 않는 꽃들이 핀 길
그대가 원한다면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마저 심겠다
보이는가, 저 텅 빈 세상의 물살과 바람과 먼지……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이, 아아 더 소중해 보인다
시간은 시간의 변덕이며 불가피한 오용이다
그대를 그리워하던 다락 같은 방도 이젠 저 빈 병 속에 있다

27. “그는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왕가위(=왕자웨이)의 여섯 번째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해피 투게더)는 그렇게 시작한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영화를 적어도 올해는 볼 수 없게 되었다(나는 결정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찍기로 했다. *기억에 동성애 장면 때문에 문제가 됐던 것 같다. 오래 전 얘기이다. 장국영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이들의 거의 모든 영화를 몇 번씩 봤다. 이들은 영화만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세계와 만나는 세 가지 방식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니 나는 내게 맞는 이들의 영화를 통해서 그런 걸 봤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유감스럽다. 나의 20대에 바쳐지는 이 여섯 번째 시집(합본을 제외하면) 또한 이런 말로 끝을 맺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우리의 삶은 잘할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28. 언제였던가. 87년, 그리고 5월. 나는 20세(만 18년 9개월)의 대학 신입생이었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없었다. 그때 곽지균이 감독하고 강석우, 안성기, 이미숙이 주연한 영화 <겨울나그네>(결말의 장황함은 불만이지만)를 봤었고, 가사도 모르는 ‘보리수’를 흥얼거리고 다녔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는 민우(=강석우)의 대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이 대사는 이후에 곽지균이 만든 <상처> <그 후로도 오랫동안>에도 나온다. 그가 요새 만드는 <깊은 슬픔>에도 나올까?). 정말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맘때 나는 학생생활연구소에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에게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들먹이며 자살과 부조리와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 떠들었다(카뮈에 대한 ‘경의’가 이 글의 앞부분에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은 무더웠고, 나는 세상이 빨리 끝장나기를 은근히 빌었다. 나는 그저 20세였던 것이다.

29. 하여간에 나의 30세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이젠 30대도 말년이다!) 여전히 내겐 아무런 꿈이 없다(몇 권의 책을 쓸 계획만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못 쓰고 있다!). 그런데도 대책 없이 또 10년이 지나갈지 모른다. 그래, 너를 두고 하는 소리다. 여전히 ‘나’라는 장소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안녕, 잘 있었니? 난 이렇게 지내고 있어.” “근데, 너 형편이 좀 나아졌니?”(*“아니!”)

30. 새로운 시작의 나이에서 나의 걸음은 멈추어진다.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6박 7일이 걸렸다. 그리고 하루가 더 걸렸다(이젠 지겨워진다). 반 정도의 분량은 말복인 날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작성한 것이다(*오늘이 말복이다!). 어쨌든 끝났다. 편집과정에서 몇 가지 빠지긴 했지만(주로 ‘확실성’ ‘가능성’에 대한 얘기들이다), 언젠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면 되는 것이지. 자, 이제 이걸로 무얼 할 것인가? 일단 읽어주기 바란다. 뭔가 재미있거나 전달되는 것이 있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만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30.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고 한다. 복습하자면, 이때 ‘전달’은 시의 n차원적인 어떤 리얼리티가 (주관적)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걸 말하며, ‘이해’는 이렇게 전달된 것을 다수가 경험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형태로 변형함으로써(n차원의 3차원화) 보존과 공유가 가능하게 하는 걸 말한다. 이 ‘이해’를 달리 ‘개념적 사유’라고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시(=예술)는 자신이 발견한 어떤 새로운 사태에 이 개념적 사유(=철학)가 도착하기 전까지 현장을 보존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 개념적 사유 이후에, 자신의 의미를 모두 증발시킨 이후에 시가 직면하는 것이 시의 여생(‘자기 앞의 생’)이다. 나의 시들이 그런 여생의 한 풍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그런 풍경을 말이다. 끝으로,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제목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그리스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Le regard d’Ulysse)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택시 운전사의 말로 이번 여정을 마감한다(*그러니까 이 여정은 황진이의 말로 시작해서 택시 운전사의 말로 끝난다).

30. “빌어먹을 자연아, 넌 외로우냐? 나도 외롭다. 여기 비스킷이나 먹어라!”

05. 12. 01.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2-01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성복의 시와 소월문학상 수상 소감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마흔 즈음에는 무얼 읽어야 할까요?^^

2005-12-02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2-2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을 안해도 일정 나이에 이르면 아줌마인가요?
김상미 시인은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을 안했는데...ㅎㅎ

함성호 시인의 시를 검색하다 보니 이 페이퍼에 이르렀습니다.^^

로쟈 2006-03-0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자신과 시적 화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요.^^

로쟈 2006-03-1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가끔 뒷북치시면서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유령이시라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2007-01-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다운된 이미지들을 수정했네요. 새해 복많이 받아요, 남주지 말고!..